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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涅槃(선열반)(zenilv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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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 會長(회장)과 秘書(비서)
11/17/2017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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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설은 세상에 나그네 신세>


나의 시드니, 호주에서의 해외 지사원의 시작은 "멘지스" 호텔에서 부터였고 그곳에서 끝을 맺었다. 그곳의 겨울은 얼음이 얼지않는 추은 날씨였다. 나는 낙엽이 떨어진 앙상한 가지들을 내려다 보면서, 김상무가 귀국하면서 내게 남긴 말을 되뇌였다


"선경이 너를 이곳에 보낼 형편이 아닌지 너도 알지 않냐? 이 견본을 여기에 남길 터니 무슨 건이 생기면 내게 연락해라. 잘되면 네 용돈 정도는 내가 마련해 줄 수 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견본은 분명히 그의 것이었다. 여기 오면서 그 전에도 그 비슷한 아리송한 말을 했었다.


나는 "이또쯔 상사"의 시드니 지점이 마련한 한구석에 책상을 놓고, 그들의 주선으로  항구 건너 편의 물가에 아파트방 하나를 구했다. 그 창문 밖으로 호주의 명물인 외곡선의 철다리와 그 조개집 오페라 음악당이 건너다 보였다. 경관은 매우 좋았으나 해를 등지는 남쪽 기슭은 추웠고, 아침에 출근하려면 "훼리"(연락선)을 타야 했다.


시드니는 세계 3 대 미항의 하나라 한다. "훼리"는  바닷물 건너 선착장의  끝 "죠지 스트릿트"에 나를 내려 놓는다. 약간 경사진 보도를 걸어 올라가면 왼쪽에 "이또쯔"의 사무실과 약 100여 메타 더 가면 "원통 삘딩"이 서있었다. 그건물 20 몇층에 무역진흥공사 호주사무실이 있었고, 48 층에 "테이진" 지사가 있었다. 이런 곳들은 시드니의 "다운 타운" 중에서도 그 복판에 해당됐다. 이 항구는 영국의 범죄자들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됐음으로 해서 물가에서 언덕 위로 올라가면서 도시가 발전했다.


동서남북을 분별 못하는 나 혼자의 삶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녁 6 시 이후는 거리가 텅비었다. 나도 항구를 다시 가로질러 가서 뭔가를 해먹어야 했다. 내 아파트 인근에는 '그로써리' 등속의 쇼핑할 거리가 없는 바라 응당 자동차가 있어야 했다. 헌데,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마침내 이쪽 '다운타운'의 어느 옆골목에 식민지 시절의 조그만 호텔을 발견하고 그리로 이사를 했다. 방 하나에 취사시설까지 갖추었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근방이라서 교통비도 절약됐고, 저녁에 나다닐 수도 있었다. 방값도 비슷했다.


나는 "이또쯔"의 텔렉스 시설을 이용하여 본사와 교신했다. 글잣수가 많아지지 않도록 약자를 선정하여 본사로 보냈다. 그렇게 하여 경비를 줄이고자 했다. 그런데 약자든 긴문장이든 회답이 없었다. 영문 편지를 하던 유일한 사람이 이곳에 와 벌렸으니 회신이 늦을 수 밖에 없다. 하긴 이들이 편지를 자주 쓰지도 않고, 또 받은 편지에 답장일랑 아예 않쓰는 민족의 후예가 아니단가?


그들은 아직도 "이또쯔"의 젓꼭지를 놓치 못하고 있었다. 처음엔 내 딴엔 포부를 가지고 여기 저기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교통비가 꽤 나갔다. 내 생활비와 회사 경비를 분리하기로 했는데 본사가 몇달 만에 처음 경비를 정산해 보내왔는데, 내가 쓴 지사 비용을 내 생활비에서 까버리는 것이 아닌가! 약속과는 틀렸다. 내 생활비를 까먹으면서 까지 회사일을 벌려야 할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어쨌던 "이또쯔"는 내가 그들의 채널을 이용하여 본사에 보고하는 전문들을 읽어왔던 모양이었다. 나의 개별활동을 선경과의 의존관계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그들은 단정하고, 나에게 압력을 가해왔다. 그것이 본사의 지시냐 아니면 나 개인의 의사인가를 물었다. 나는 이런 미묘한 이해관계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고, 본사도 이 문제를 어떻게 답하라고 해명한 적도 없었다. 그후 부터는 "이또쯔"사무실을 피하여 KOTRA 사무실로 자주 가게 되었다. 마침 내 고교 및 대학 1 년 선배가 거기에 실무자로 와 있었다. KOTRA 쪽에서도 사업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 어른거리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기대했던 거라.


김상무는 이번 여행을 계기로 호주시장에서 직물류의 독점권을 따낼 계획이었다. 자기가 따라 나섰던 명분이 필요했을 것이니까. 이 일로 그곳의 수도 "칸베라"로 비행기를 탔는데 한국 사람 같이 생긴 키가 작은 분과 그 보다 훨씬 큰 숙녀가 기내로 들어와서 우리들  앞자리에 앉았다. 중요한 인물들 같아 보였지만 김상무는 알은체 하지 않았다. 한국 대사관에 가서 민충식 대사를 면회하겠다고 기다렸더니, 조금 전의 그 분이 나타나서 찾아온 연유를 물었다. 같은 비행기에서 방금 내렸다는 내색을 하지 않고 양쪽이 용건만 들먹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그런 고자세로 접근해서 과연 독점권을 따낼 수가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민대사도 수출을 많이 해야하는 압력을 박대통령으로 부터 받고있던 처지였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부탁하는 쪽은 우리들의 입장이었으니 당연히 공손하다 할까, 저자세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마는 김상무는 왜 우리가 직물수출의 선두주자로서 독점권을 받어야 한다고 거듭 설득하려 들었다. 나로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 하고는 무슨 언질을 받지 못하고 물러나 귀국해서는 자기가 하지 못한 일을 나보고 끝내라고 계속 독촉해왔다. 민대사는 대우의 조기성씨와 또 다른 무역회사와 그리고 KOTRA 공관의 2 명을 소집해서 한달에 한번씩 수출현황을 보고 받았다. KOTRA 쪽에서는 선경이 호주와 뉴질랜드에 다량 수출하는 공적은 인정하나, 우리들 말고도 상당수의 중소 기업들이 진출하는 마당이라서 한 기업체에게 독점을 인정함은 오히려 수출 장려에 도움이 않된다는 태도였다. 나는 이 사실을 본사에 편지로 통보했다.


내가 겨우"이또쯔"의 감시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일할 자리를 마련했다고 좋아했을때, 우리의 위대한(?) 무역상무는 "본사 호주 지사원의 보고에 의하면, 호주 소재 KOTRA 공관에서는 선경이 그동안 추진해온 독점권 획득을 저해하는 견해를 가짐으로써...운운"하는 상공부 장관 앞, 무역진흥공사, 무역협회 참조로의 공문을 띄웠다. KOTRA의 홍정표 관장이 "내가 언제 이런 말을 했는가..."라고 화를 내면서 그 공문서를 나에게 내던졌다. 이렇게 하여, 독립의 유일한 처소마저 김상무가 뺐어가 버렸다. 보고자의 신상의 안위는 전혀 고려가 안된 처사였다. 어떤 간첩이 몰래 보고한 사실을 그 상대국에게 간첩의 이름을 밝히면서 항의 할 수 있는가? 한국넘들이 하는 짓거리들이 이러하다.


내가 이곳에 올때는 둘째 아이의 출산이 임박했었다. 비록 혼자 온다는 조건이었지만 해외에 내보내는 한가정의 가장에게 회사는 출산의 경과를 묻기 전에 당사자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인도적인 배려이다. 두번이나 텔렉스로 부탁했던 얼마 후에 "You got a beautiful girl.".........이들의 인간 됨됨이가 이런 정도였다.


본사에서 상공부 기계수입과 과장이 호주에 연수차 갔으니 "Take care"하라는 전문이 왔다. 쪼달리는 상태에서 "Take care"를 하라고? 뭣을 어떻게 하라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 짐작컨대 돈을 집어주라는 것 같았다. 내가 "Take care means how much?" 라고 다시 전문을 보냈다. 결국 상공부의 어떤 쫌팽이 녀석한테 200불을 빼았겼다. 후에 "합섬쪽의 부사장"이란 자가  나를 불러세우고 한동안 말없이 빙긋거리더니 가보라고 손짓을 했다. 뇌물의 책임을 지지 않지으려 했다가 나 한테 당했다는 건지? 아니면 선경합섬의 "폴리에스터" 원사를 호주로 처음 수출하게 한 장본인을 보고 싶었던 것이였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금마 소관의 상품을 팔아주었으면 당연히 상관으로서 격려는 못할 망정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 이래서 한국 인간들이 웃대가리로 꺼떡거리는 짓거리를 나는 아주 경멸한다. 무지막지한 시끼들......


한번은 돈이 떨어져서 멀리 시 외곽의 노동자 합숙소로 일할 자리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은 워낙 싸구려였다. 유리창 조차 깨져있었고 신변의 문제도 우려되어, "이또쯔"에서 돈을 꾸어서 다시 호텔로 돌아 오고 말았다. 힘들었던 것은 이런 업무적인 것이 아니었다. -일요일의 주말이 가장 어려웠다. 텅빈 시내의 밤거리를 혼자서 터덜터덜 힘없이 걷다가는 불을 환히 켜논 백화점의 진열장 앞에 선다. 물끄럼이 그 안의 어디를 들여다 보는 고독감...... 또 다시 흐느적 흐느적 돌아와서는 빈 방의 TV앞에 앉는 매일밤을, 나는 집사람에게 편지를 쓰다가 잠이 들었다.


禪涅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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