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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에 속아 북진 허용 트루먼 휴전만이 출구로 결심
06/07/201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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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넌 (왼)이 38선 넘는 것 못 막았지만, 말리크 (바른) 와 휴전 회담 시작엔 성공


맥아더에 속아 북진허용한 트루먼 휴전만이 출구로 결심


맥장의 참패를 원자탄으로 매꾸려하자


유럽이 들고 일어나


애틀리와 회합하고


확전 않고 무력 통일 반대와 전쟁을 휴전키로


트루먼의 휴전안 검토 대신


맥장 중국측 항복 요구 최후 통첩 발부


통수권 계속 무시 트루먼 맥장 파면


트루먼이 에치슨통해 휴전 강구지시


애치슨 명으로 케넌  말리크와


비밀 회동 두차례로 소련의 동의 얻어내


겉에 나타난 것이 반드시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

 

맥아더 장군 (이하 : ) 한국전이 발발하기도 전인 1949년에 이미 장개석 총통의 휘하인    쑨리런(孫立人·손립) 장군을 도쿄 사령부로 불러 본토 침공시에  지원하겠다는 언질을 주었고 , 또한 6-25 발발하자 7월말에 대만으로 가서 장개석과 만났는데, 장개석의 국부군에 폭격기를 지원한다는둥 사적 (私的)으로 비밀리에 총통의 본토 수복 침공을 지원하는 약속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았다.


맥장은 북진하는 것을 대한민국의 영토  수복을 통한 통일보다는 북한을 지나서 압록강을 넘어 중국 본토로 침임해 개석의 본토 수복에 열을 올리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콧노래 부르며 진군하든 맥장 휘하의 북진하든 군인들어 몰래 북한에 들어와 잠복한 중공군으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아 잠간 멈칫하였는데, 귀신 같이 공격을한 중국지원병은 다시 귀신 같이 산속으로 스며들어 자취를 감췄다.


이로 인해 유엔군은 중국지원군의 규모와 목적을 파악하는데 혼선을 빚게 되었다.  일부는 중국지원군의 규모가 작고, 압록강의 북한측 (강의 남안) 위치한 수풍 발전소 보호 목적으로 보기도 하였으나, 도쿄의 맥장 정보국이 중국지원군 규모를 몰랐거나, 목적을 이해 못했다는 것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미국의 각종 정보 기관들이 중국내 전보망과 전신 무전망을 감청했고, 한반도의 5만분의 1 (1/50,000) 지도를 대량 구입한 사실까지 파악해서 도쿄에 제공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중국이 북한에 보내는 군대를 중국인민지원군으로 부른데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 중국군의 공식 명칭인 중국인민 해방군 (People’s Liberation Army)” 사용하면 중국이 한국전에 공식적으로 참전하는 셈이 되어 교전 당사자가되어서 유엔군의 중국 본토 공격의 대상이된다.  그래서, 이러한 사태를 막기위해 중국 외교부의 관리가 스페인 내전 정부군과 왕당파에 소련과 독일및 이태리가 군대를 파병하면서 의용군/지원군 이름으로 보내서 본국까지 전화가 파급되는 것을 피할 있었다는 전례를 설명하고 인민지원군형식으로 북한에 파병하여 중국본국이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피할 있었다. 


군수물자를 보충하고 미국의 추수 감사절 특식을 먹은 유엔군 장병이 크리스 마스까지 끝낸다는 목표로 진군을 계속했는데, 이튼날부터 산기슭에 매복해서 기다리고 있든 중국 지원군들이 V (八자 ) 포위 상태에서 자루끝을 막아서 완전히 포위하여 사격을 하는 바람에 평안북도 산골에서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한국군은 1 군단이 외해되고 결국 군단이 해체되는 피해를 입었고, 미군 2사단은 4천명이 전사하고, 3천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한국 사람들은 그때 통일을 했어야 했다고 애석해한다.


이처럼 천하무적 미군이 경무장한 중국지원군에게 참패를 당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탄사용 의사를 비추자, 유럽이 온통 3 대전으로 확대될가 염려하여 영국의 애틀리 수상이 서구의 대표격으로 워싱턴에 날아와  트루먼 대통령과 회담하고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으며, 전선을 중국으로 확대하지 않고, 한반도를 무력 통일할 의사가 없고, 한국전을 휴전으로 중단시키겠다는 합의를 이루고 이를 만방에 선언하였다.

이로서 한국전쟁을 승리로끝내려는 노력은 인명 손실만 증대시킬 분이라는 점을 경험적으로 트루먼 대통령이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었다. 사이 유엔에서 연연방국들이 정전안을 제출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의 휴전안을 작성하여 관계부처에 검토라게 하였는데, 가운데 한부가 맥장에게 전해지자, 오직 승전만 고집하고 나아가 중국본토까지 수복하려는 그에게는 굴욕으로 여겨져서, 자신이 북측에 사실상 항복을 촉구하는 최후 통첩성 문안을 발표하자 이에 격분한 트루먼 대통령은 맥장에게 사표로 선수치는 것을 막기위해   밤중에 백악관 기자단을 소집하여 맥장의파면 결정을 발표했다. (1951 4 11)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 (중화인민공화국)과는 국교가 없기 때문에 중국과 북한의 배후 조종국으로보는 소련과 휴전 의사를 타진하도록 에치슨 국무 장관에게 비밀 특명을 내렸다. 에치슨 장관은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고 정책 기획국장로 있다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든 케넌 (George Kennan) 에게 소련의 유엔 대사로 있는 말리크 (Jakov  Malik) 접촉하여 휴전 회담을 시작할 있도록 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케넌은 당시 유엔 휴회 중이라 아일랜드 별장에서 휴가를 지내는 말리크 대사와  두차례에 걸쳐서 직접 면담하여 소련 정부로부터 휴전 회담 시작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 결과를 말리크 대사가 유엔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 한국전 교전 쌍방에 휴전 회담을 권고하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38선에서 정지하라는 케넌의 충고를 무시하여 엄청난 미군의 희생을 차뤘다 . 종국적으로, 케넌의 유연한 외교술 덕분에 한국전의 휴전이 오도록 공헌을하였다.)


투루먼 대통령의 지시로 케넌과 말리크간에 물밑 접촉을 덕분에 이러한 결과가 나왔으나, 이면 접촉은 외교 문서 비밀 해제될 때까지 수면 아래에 뭍혀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알려진 말리크의 방송만 기록에 보여서 말리크가 휴전 제안한 것으로 아직까지 한국의 모든 역사서에 그대로 적혀 있다. 그러므로, 표면에 보이는 것이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휴전 회담이 1951 7월에 시작했으나,휴전 조약에 이르기까지 2년이나 걸렸고, 휴전을 정치회의를 거쳐서 평화 협정으로 가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제네바에서 관련국들의 정치회담이 있었으나, 한국 문제 합의에 도달하지 않아 어정쩡하게  65년이 흘렀다.

 

중국의 한국전 참전에 여러가지 평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이 군사 강국으로 인정을 받아서 월남전에 미군이 참전하였지만, 북월남 (월맹)으로 군인을 보내지는 않았다. 한국전에 미군을 북한에 보내 중공인민 지원군 참전을 불러 이르켜  많은 (미군의) 인명 피해를 입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하였다.


그리고, 사실 여부는 없으나, 정의용 특사가 트럼프에게 김정은의 대화 의사를 전하기전에 이미 워싱턴과 평양간에 비밀 접촉이 있었다고한다.  (?!)


과거를 되돌아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관왕지래觀往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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