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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산행  | 수필
01/23/2018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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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너무 가파르다. 이제 오르기 시작해서 몇 걸음 움직인 것 같지 않은데 벌써 힘이 든다. 50미터도 

못 오르고 숨을 고르며 걸음을 멈춘다. 조금 여유를 얻기 위해 깊숙이 들이마신 공기를 배로 내려 보내 본다

익숙한 숨쉬기임에도 이미 산소의 부족을 감지한 몸은 그걸 허락지 않는다. 그저 가뿐 호흡으로 모자란 

산소를 채우려고 할 뿐이다.


힘들지만 참고서 더 올라간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숨이 턱에 차오르고 다리는 뻣뻣해지기 일보 직전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제 겨우 반 정도밖에 못 올라왔는데... 왕년엔 한라산도 거뜬하게 다녀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은 그저 지나간 시간 속에 있었던 괜찮은 경험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그 정도의 힘도 없고 

사용된 에너지를 바로바로 보충하지도 못하는 것을 보니 기계도 좀 낡은 것 같다. 그래도 산이 머무는 곳 

가까이에 있고, 또 그리 높지 않아 정상까지 오르는데 별로 오래 걸리지 않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힘들다는 마음을 털어 버리듯, 조금 크게 발걸음을 떼어 놓으며 생각해 본다. 아마도 등산로가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리라, ‘분명 다른 곳에 이곳보다 비교적 쉬운 길이 있을 거야.’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사실이 길이 가파르긴 해도 정상으로 가는 데는 가장 빠른 길일게다, 아주 가파른 몇 고비만 넘기면 

바로 꼭대기의 능선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을 보면여기까지만 오르면 그저 슬슬 걷는 정도로 정상에 

다다른다. 꼭대기와의 높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아 거의 평지 같은 경치 좋은 오솔길에 가깝다. 아무튼

오르막길을 다 오르니 살 것 같다.


오르막 능선에 마련돼 있는 벤치에 앉아 호흡이 가라 않기를 기다리며 오가는 등산객들을 본다. 마침 

주말이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등산복에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고 있다. 재미있게도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딱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져 보인다. 숨이 턱에 걸린 채 땀을 비오듯 흘리며 걷는 

사람들과 그저 산책하듯 슬슬 걷는 사람들. 목표를 점한 사람들과 이제 그 목표를 향해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완연히 달라 보인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게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 일게다. 나도 느끼지 못한 사이에 

슬그머니 찾아든 여유인데, 어찌 사물을 보는데 이리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오가는 

사람들을 찬찬히 바라보는 대신, 나 역시 숨이 턱에 닿아 앞 뒤 생각 없이 그저 걷기만 할 게 뻔하다.

골바람에 몸을 맡기며 서서히 주변에 익숙해진다. 그러면 마음은 슬그머니 바깥세상에서 안으로 그 방향을 

바꾼다. 이렇게 되는 데는, 아마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나 가끔 들리는 새소리 덕분에 한없이 편안해진 

몸도 한몫을 했을 것 같다.


산을 오르며 가끔 등산이란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한데 오늘은 그것이 새삼 깊게 다가왔다

아마도 내려 쬐는 폭염 속에 힘들게 올랐기 때문이리라. 한창때 앞뒤 안 돌아보고 오로지 앞으로만 나갔던 

것처럼,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으며 시나브로 드는 생각은 어서 빨리 올라가자.’였다. 여가의 시간을 가진다고 

해도 늘 생활에 밀접한 일들이 우선되었듯이, 주변의 경치에 눈을 돌리는 것은 그저 잠깐일 뿐 곧 앞을 향한다.

이렇게 앞만 보고 정상에 도달해도 실제로 볼만한 것은 잠깐, 오래 머물며 이것저것 주의를 기울일 만한 것은

그리 없다. 그제야 나는 왜 그리 서둘렀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쉬엄쉬엄 주변의 볼거리에 시간을 

더 할애했어야 좋았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느낌 속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은 결국 지나온 행적의 내 모습까지 끄집어내고야 만다. 한 가지에 붙들리면 그것으로 

삶을 가늠하려던 우매함, 그리고 아직도 붙들고 있는 어쭙잖은 나의 기준들. 그것들 속에 묻혀서 판단하고 

쏟아냈던 무수한 말. 아마도 그 말들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을 것이다.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그 못은 그들에게서 사라져 버렸을 거라고 안위한다. 하지만 그 못이 남긴 자국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쩐 일일까.


세월이란 묘해서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언뜻언뜻 삶의 틈을 엿볼 수 있도록 한다. 삶의 틈이 보인다는 

것이 좋은 것일까. 왠지 그것이 슬픔으로 느껴진다. 달이 차면 기울 듯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

그럼에도 오르는 데만 붙들려, 여태 살아온 삶을 이제야 조금 볼 수 있다는 것이 왠지 저린 아쉬움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하산 방향으로 젊어 보이는 여자등산객들이 지나간다. 무슨 대화가 그렇게 즐거울 것인지, 갑자기 까르르하는

웃음을 허공으로 띠우더니 미처 추스르지 못한 젊음을 한 움큼 내 곁에 떨어뜨리고 간다. 슬며시 실소하며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녹슨 것처럼 뻑뻑한 나를 생각한다. 그래도 한 잔의 커피로 질 좋은 기름을 친 것처럼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 아직 젊은 것인가. 희망 사항일 뿐이다. 젊음이란 시간은 이미 저 멀리, 결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동화 속의 나라로 가버리고 말지 않았는가. 그래도 생각은 예전 그대로인데.



삶은 길이 없는 산과 같은 거야.’


그래, 산은 길이 없어서 어느 곳으로 올라가든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다. 그 길이 힘들고 가파르면 꼭대기에 

조금 일찍 도달할 수도 있고, 힘이 덜 들고 수월하면 조금 돌아 올라가는 것일 수도 있다때로 전혀 길이 

안 보이는 바위와 나무가 많은 곳을 톺아 올라가도 된다. 아니면 계곡을 선택해 시원한 물줄기를 즐기며 

한가롭게 산 위로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한번 시작된 상념이 끝없이 이어진다. 한참을 앉아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정상을 가지 않은 채 내려가기로 한다

산 위에 올라와서 한 점의 미풍에 땀을 식히며 자연을 즐긴 것이 유달리 큰 고마움으로 다가왔다. 그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한층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하산의 발걸음을 옮긴다.

 

수필, 산, 등산, 명상,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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