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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편하려면  | 산문
02/19/201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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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인 지 벌써 며칠째인지 모른다. 웬일인지 동장군은 전혀 후퇴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눈과 얼음을 이용해 세상을 자기 영향권 안에 더욱 굳게 가둬 버렸다. 창문가에 비친 달빛이 은은하지만

밖이 너무 추운 탓인지 그조차 아무런 정취를 자아내지 못하고 있다. 가끔 불어 제치는 삭막한 바람 소리에

아무런 감흥 없는 마음만 괜스레 처연해질 뿐이다. 주말이 되면 날이 지나가는 것이 아까워 일부러 늦게 자곤 

했는데 그것이 버릇이 돼버렸는지 자정을 넘기는 것이 예사가 돼버렸다.

 

전화가 울린 것은 11시가 거의 다 돼서였다. 밖이 춥고 눈으로 덮여있어서 그런지 히터 돌아가는 소리조차 

고요 속에 동화돼 그리 소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밤 전화벨 소리는 마치 갑작스러운 총성처럼 촉각을 

곤두서게 한다.

 

평소, 사람에게 예지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런 능력을 떠나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는 섬뜩한 

느낌과 더불어 그냥 뭔가 좋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내가 수화기를 들었을 때의 

느낌도 바로 그리 좋은 소식 같지 않다.’였으니까. 초저녁에 자기 아파트로 돌아간 줄 알았던 작은 딸이었다.


딸은 도심 가까운 곳에 아파트를 빌려 살고 있다. 그 아파트 주변은 평일에도 주차 공간 찾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도로 양 옆에 주차 할 수 있지만, 그 길가를 차량이 빼곡하게 주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의 

도로이다 보니 눈이 많이 쌓이고 날씨가 추우면 길이 좁아지고 또 쌓인 눈이 얼어붙어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지기에 십상인 조건을 만들어 버린다.


 

딸의 설명은 주차하다 눈길에 앞바퀴가 미끄러지며 반대편에 있는 차와 접촉사고가 생겼다고 했다. 역시

며칠 전부터 내린 눈이 강추위에 녹지 않고 길 양옆으로 쌓인 탓이었다.

"그래, 지금 어디 있니?”

사실 이 반응은 딸이 아직도 그 사고 현장에서 전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 무의식중에 나온 것이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주위의 인기척을 살핀 뒤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차를 몰고 가버린다. 지금 

나는 딸이 그 골치 아픈 사고 현장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전화하고 있기를 바랐다. 주차하다 생기는 접촉 

사고야 가끔 생기는 일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딸아이는 내가 바랐던 대로 자기 

아파트에 들어가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3분 정도 지났을까, 딸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마음이 너무 불편해, 메모를 남기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그런 사고야 흔한 것이고 우리도 몇 번 당해 잘 알지 않느냐고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내 차에 흠집을 남겼을 때는 그냥 한동안 기분이 나쁜 정도였는데, 내가 다른 사람 차에 

긴 건 다른 거 같아.” 이어지는 그 아이의 이야기는 어느 때건 그런 흠집난 차를 보면 자기가 만든 그 흠집이 

생각날 것 같다는 거였다. 나는 속으로 살아가면서 때로 조금 뻔뻔해지는 것도 필요한데.’라고 중얼거리며 

금 숙고해 보자고 했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말이야 딸이 옳다.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당연히 메모를 남겨 흠집에 대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메모를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주차했던 차에 흠집이 생겼을 때

혹시나 해서 차 주변을 찾아보지만, 어느 곳에서도 메모가 적힌 쪽지 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하긴, 그런 

쪽지를 찾는 내가 어리석은지도 모른다. 언뜻 내가 처음 접촉 사고를 가졌을 때 그 당황했던 순간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바로 눈앞에서 차에 흠집을 내고는 엉뚱한 전화번호를 주고 사라져 버린 사람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왠지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바로 딸이 조금 전에 말했던 어디에서건 비슷한 흠집을 보면 자기가 

만들었던 그 흠집이 생각날 것 같다.’는 그것이 목구멍에 가시가 걸려있듯 내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는 마치 내가 받은 상처야 어떻게 하든 치유해서 잊어버릴 수 있겠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남긴 

상처는 그 비슷한 여건이 되면 언제든지 다시 생각날 것 같다는 말처럼 생각됐다.

그래 내가 남에게 준 상처는 그 흔적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나고, 그때마다 마음이 불편하지.’

 

네 말대로 메모를 남기는 게 좋겠다.”

생전 처음 만든 자동차 사고에 당황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늦은 밤임에도 전화를 했으리라

그래도 이것저것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어 힘을 얻었는지, 딸아이는 가벼운 음성으로 

얼른 다녀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영하 15, 6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거리로 나갔다.

 

딸에게서 다시 전화가 온 것은 한 10여 분이 지나서였다.

메모를 남기고 오니, 너무 마음이 편해.”

그래 나도 마음이 참 편하다.”   


                                                                                                                                     사진 - 김봉선 포토 갤러리

눈, 자동차, 눈길, 눈 폭풍,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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