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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트로이카 '루터, 츠빙글리, 칼빈'
11/25/2019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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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생애와 목회



어거스틴 동상(좌)과 루터, 츠빙글리, 칼빈


존 칼빈




< 보충 설명 > by Peter Hong

"구원받을 택자와 심판 받을 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안에 정해져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안에 인간의 구원 여부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장로교의 예정론을 정립했다.

 

* 종교개혁의 트로이카(troika=삼두마차, 러시아 특유의 교통 기관이며 세 필의 말이 끄는 썰매)

루터, 츠빙글리, 칼빈

 

1.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152113, 독일의 성직자 마르틴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파문 처분을 받는다. 그 당시 성직자에게 파문은 성직이 박탈됨과 동시에 교회에는 출석도 할 수 없고, 교회에서 장례식도 치를 수 없게 되는 것으로 참으로 치명적인 벌이었다. 이 사건은 훗날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를 여는 계기가 된다.

 

마르틴 루터의 성직 박탈이 오늘날 전 세계에 가장 널리 퍼진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탄생을 가져오리라는

것은 당시로서는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세 로마가톨릭 교회의 철옹성 같은 권위를 무너뜨리고,

수많은 개신교 종파의 효시가 되었으며, 로마가톨릭 교회에까지 개혁의 바람을 일으킨 루터의 혁명적인 정신은 르네상스 이상으로 근대를 여는 중요한 열쇠였다. 신대륙의 발견과 산업 발달로 육체가 근대화되었다면, 르네상스로 정신이 새 옷을 입었고 프로테스탄트 탄생으로 영혼이 비로소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 로마가톨릭의 반유대주의로의 회귀로 인하여 마귀에 시달리다가 거의 미치광이가 되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악한 책인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Jews and their lies)’를 저술한 직후 사망하였다.

 

2. 홀드리히 츠빙글리(Huldreich Zwingli, 1484~1531): 스위스의 종교개혁가이자 취리히 대성당의 설교자.

비르트하우스에서 출생하였으며, 바젤(Basel)과 빈(Wien), 베른(Bern) 등에서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았다. 처음에는 취리히 대성당의 사제(司祭)가 되어 설교자로서 일하며 체계적인 성경강해로 명성을 날렸다. 그 후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고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연구하면서 점점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기 시작했다.

 

성찬론(聖餐論)으로 인해 1529년 루터와 충돌하여 마르부르크 회담(Marburger Religionsgesprach)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단결에 실패하였다. 그의 개혁운동은 스위스 각주(各州)로 확대되었지만,

후에 가톨릭군()과의 전투에서 종군목사(從軍牧師)로 활약하다가 카펠(Kappel)에서 전사(戰死)하였다.


3.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프랑스의 종교개혁가이자 장로교회 창시자. 프랑스명은 '장 코뱅'(Jean

Cauvin), 독일명은 요한 칼빈, 라틴어 이름은 칼비누스(Ioanis Calvinus), 장 깔뱅(Jean Calvin), '존 칼빈'은 영어식 이름이다. 루터가 영웅적인 용기를 발휘하여 시작했던 일을 칼빈(칼뱅)은 명석한 지성과 쉼 없는 펜으로 계속하여 완성하였다. 루터는 로마가톨릭 교회에서 신교를 떼어내어 종교개혁을 가져와 개신교 신학의 기틀을 다진 대표적 종교개혁가이다.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켜 장로교회를 창립하였고,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장로교회를 세웠으며, 다른 제자들도 유럽 각지로 흩어져 개혁교회들을 세웠다. 칼빈의 유언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바로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라는 것이었다. 제네바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다. 단지 훗날 그를 추모하는 이들이 그의 무덤 위에 ‘J.C’라는 약자만 새겨놓았다.

 

 

이 셋 중에서 츠빙글리와 칼빈은 아주 많이 닮았다. 츠빙글리와 칼빈의 후계자를 합쳐서 개혁주의 전통(The

Reformed Tradition)’이라 한다. 장로교와 화란계 및 독일 개혁교회들, 많은 침례교와 회중교회들을 포함한다.

 

루터 신학의 핵심이 이신칭의(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였다면, 칼빈 신학의 키워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다.

 

루터의 신학은 용서의 기적이며, 칼빈의 신학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짐이다. 그렇다면 아담과

이브의 죄는 어떻게 해야 하나? 불순종도 하나님의 뜻이였나? 칼빈은 “of course” 그들의 죄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고 믿었다. 모든 악과 선까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칼빈의 예정론이다.

 

구원론은 구원받기 위해 선택된 자와 멸망하기 위해 선택된 자는 이미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선택으로 바꿀 수 없는 정해진 운명, 즉 하나님의 선택이 마지막 결정을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을 택자(擇者, the elect)’라고 불렀다.

 

칼빈은 성령에 대해 매우 많이 언급했던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택자들 안에 계시는 성령을 통해서 그들에게 전해진다고 믿었다. 성령님의 주된 의무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역사'라고 했다. 믿음은 지성으로 깨닫고, 동시에 성령이 주시는 마음으로 구원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게시일: 2019. 7. 2.

 

< 바른 요약해설 > by Peter Hong

... (생략)

제네바에서 성경교사로 사역을 시작한 칼빈은 153610, 로잔에서 열린 성찬 문제로 신·구교파 사이의

토론회가 열렸는데,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품의 칼빈은 로마교회의 한 수도사와 논쟁을 하게 되었다. 그 신부는 교구들의 저서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며 로마교구에서 하고 있는 성찬론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묵묵히 듣고 있던 칼빈은 터툴리안, 크리스 스톰, 어거스틴을 비롯한 여러 교구들의 서적을 원고 없이 자유롭게 인용하며 로마가톨릭의 성찬론인 사체설(성찬식의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 설)’을 반박했다. 당시 로마가톨릭의 성찬론을 반박한 중도적 입장의 칼빈의 성찬론은 그 시대 종교개혁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 성찬식 때 실제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다는 부분은 인정하지만, 물질적으로 임하는 것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됨)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다양한 이해 가운데 핵심을 끌어안으면서 외연을 넓히는 노선으로 갔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15381, 칼빈은 제네바 의회의 성찬식 참여 자격문제(수찬 금지: 자격심사의 주체가 국가냐 교회냐의 문제)’로 대립을 하다가 추방명령을 받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로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자유롭게 목회다운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여기서 칼빈은 '로마서 주석'을 썼다. 그리고 거기서 교회의 '직분론'을 깨달았고,

시편 찬송과 사도신경 곡조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여기서 기독교강요 2판이 나온다. 여기서의 칼빈은 목회뿐만 아니라 개인적 삶도 변화되는 시간이었다. 그는 이델렛 드 뷔르라는 아름답고 내성적이고 순종적인 과부와 결혼을 한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마칠 때까지 칼빈에게 봉사했다.

 

당시 제네바 의회는 칼빈의 추방을 취소하고 개신교 교회에는 사랑이 없다라고 하며 다시 로마가톨릭으로의 회귀를 요청하였다. 이때 칼빈은 사랑과 믿음은 함께 있다. 내가 제네바에 있을 때 얼마나 불행했는지 제네바로 다시 오라는 요청을 받을 때마다 몸서리치게 된다.“라는 유명한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후 칼빈은 제네바 시민들의 뜨겁고 간절한 요청으로 2차 귀환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당시의 제네바는 프랑스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스케일이 큰 주요 도시이며 복음전파의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칼빈의 담대함을 볼 수 있다.

 

3년 후, 시의회와 여러 동역자들과 수많은 시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아주 성숙한 목회자가 되어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초대교회의 조직을 따라 목사와 장로, 집사, 교사의 4직분으로 나누고, 문답식 2

신앙교육서를 만들어 성경의 원리와 교육에 힘썼다.

 

이때부터 정부는 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합치된 방향으로 정책을 펴나갈 것을 합의했다. 그 후, 제네바에는 사치와 방탕한 생활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이것이 칼빈과 루터와의 큰 차이점이다. ,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고 35년간 목회를 하여 루터의 도시로 불린 비텐베르크 시는 루터의 이신칭의에 대한 그릇된 해석으로 사치와 방탕의 도시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칼빈의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와 성베드로 교회는 항상 가득차게 되었다.

    

그 후, 칼빈은 정경 66권을 부정하고, 아가서를 음란하고 추잡스런 시로 주장하던 인문주의 자유주의자들과

칼빈의 예정론을 비방하는 칼빈파들과의 대립이 더 심화되어 갔다. 이때 칼빈의 아내 이델렛이 세상을 떠났다. 당시 칼빈의 생애에서 가장 큰 타격을 주었던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스페인 사람인 의사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Miguel Serveto)와의 논쟁이었다.

 

(제2부 개봉박두!)



<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죽인 루터 (1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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