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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왜제차 사고 타는 얼빠진 한국인들이 꼭 보알아야할 윤봉길의사의 살신성인
11/06/2018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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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청년 윤봉길의 마지막 발자취

홋코쿠신문 윤 의사의 순국사실을 보도한 홋코쿠신문(북국신문).1932.12.19
▲ 홋코쿠신문 윤 의사의 순국사실을 보도한 홋코쿠신문(북국신문).1932.12.19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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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람들이 윤봉길 의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虹口公園)공원에서 열렸던 일본의 전승축하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진 분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윤 의사는 상해 거사를 하시기 전에도 고향인 덕산에서 월진회(月進會)를 만들어 애국 계몽운동과 민족교육을 실천했던 분입니다. 윤 의사의 이러한 업적도 꼭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사)매헌윤봉길월진회 인완진 부회장의 말이다. 지난 4일 오전 10시, 청명한 가을 날씨 속에 기자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윤봉길의사기념관' 취재에 나섰다. 가까이에 천년고찰 수덕사와 덕산 온천이 있어 기념관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하고 있었다.윤봉길의사기념관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시량리 119-1)에 자리하고 있는데 경내에는 윤 의사의 영정을 모신 충의사와 기념관, 윤 의사 부인 배용순 여사 무덤 등이 있다. 그날따라 유난히도 푸르던 하늘!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걸음, 걸음 내내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 의사의 짧은 삶을


 떠올리니 가슴이 저렸다.

자주색 넥타이에 짙푸른 양복 차림의 영정 사진 속에서 윤 의사는 편안한 모습으로 참배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윤 의사 영정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빛 찾은 조국에서 영면하시길 향 한 줌을 사루며 빌었다.

스스로 조국 독립을 위해 나선 윤봉길 
 
윤봉길 영정 윤봉길 의사 사당인 충의사에 모셔진 영정
▲ 윤봉길 영정 윤봉길 의사 사당인 충의사에 모셔진 영정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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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계단을 내려와 오른편에 자리한 '윤봉길의사기념관'으로 향했다. 기념관 입구에는 "독립과 자유를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겠다"는 굳은 결의에 찬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이 큰 글씨로 적혀 있었다. 기념관은 윤 의사의 유품을 비롯하여 탄생과 성장, 농민운동, 나라밖 독립운동, 상하이 의거, 순국 등을 이해하기 쉽게 꾸며놓았다.

"이 지도는 윤봉길 의사의 행적을 알기 쉽게 그린 것입니다. 윤 의사는 1930년 3월 6일,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라는 글을 남기고 고향 덕산을 떠나 신의주를 거쳐 단둥으로 그리고 다시 칭다오를 거쳐 상하이로 가셨지요. 노란색으로 표시 된 부분이 윤 의사의 이동 경로입니다."

(사)매헌윤봉길월진회 팀장인 이선연씨는 '님의 발자취' 마당에서 기자에게 윤 의사가 중국으로 건너간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이선연씨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러나 윤 의사는 선천에서 미행하던 일경에 잡혀 45일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지요. 이후 만주로 갔다가 다시 다롄을 거쳐 칭다오에서 이듬해(1931) 여름까지 세탁소의 점원으로 일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모색을 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떠나셨습니다."

상하이로 진출한 윤 의사의 마지막 행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국무령을 만나 조국 독립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었다. "스스로 조국 독립을 위한 일에 목숨을 바치겠다"라는 대목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 일부 사전이나 기록물에 "김구의 지시 아래"라고 적힌 표현은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윤 의사의 친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라는 굳은 각오가 엿보이는 윤 의사의 친필
▲ 윤 의사의 친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라는 굳은 각오가 엿보이는 윤 의사의 친필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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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6일, 윤 의사는 한인애국단에 입단해 김구 국무령과 함께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일본 천황의 생일)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던지기로 뜻을 모았다. 거사 직후 윤 의사는 현장에서 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된 뒤 가나자와(金澤) 노다산에서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의 길을 걸었다.

25살의 나이로 적국 땅에서 원통한 죽임을 당한 윤 의사를 두고 <아사히신문 동경판(朝日新聞,東京版)> 1932년 12월 20일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앞줄임) 마침내 사형이 집행된 상해 폭탄범인 윤봉길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1에 사는 농업인 윤황(尹璜, 42세)의 장남으로 현재 본가에는 양친과 남동생 4명, 여동생 1명의 형제 5명과 윤봉길의 처 배씨(26세) 및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6세와 4세의 아들이 살고 있다. 일가는 그 지방에서는 중류의 농가로, 윤은 12세 때 그곳 덕산보통학교에 입학, 2학년 때 퇴학하였다. 그 후 근검절약, 생활개량을 목적으로 하는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스스로 지도자가 되어 3, 40명의 회원을 모은 적도 있다. 성질이 온순하여 당시에는 향당의 모범청년이라고까지 일컬어졌다. (뒷줄임)

? 기사는 일본어로 되어있으며 번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1권 158. 상해 폭탄사건 범인 조선 출생 윤봉길, 오늘 아침 사형 집행>을 인용
 
"성질이 온순한 모범청년으로 월진회를 조직하여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라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온순한 모범청년'의 행동은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한 정당한 자기주장이었지만 일제는 끝내 윤 의사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하늘도 땅도 통곡할 노릇이었다. 불과 25살 청년의 죽음은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당시 일본 신문에서도 밝힌 것처럼 윤 의사는 상하이로 떠나기 전, 1929년 4월 23일 월진회라는 조직을 손수 만들었다. 월진회(月進會)는 '날로 앞으로 나아가고 달마다 전진한다'는 뜻이다. 이 조직은 자활적인 농촌 진흥을 목표로 회원은 마을 청년 남녀 40여 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달마다 회비 10전씩을 내되 그 돈은 본인이 직접 벌은 돈으로 한정했다. 그만큼 '자립과 자활'을 강조했던 것이다. 윤 의사는 '월진회 취지서'와 '월진회금언' '월진회사' 등을 스스로 지어 회원들에게 외우게 하였다고 한다.

월진회가 벌인 사업으로는 농가 부업 장려, 산림녹화와 유실수 재배, 학예회나 토론회 등을 통한 교양을 높이는 일과 정서 함양 등이었다. 또한 월진회 사업을 가속도로 발전시키고 영구히 지속, 향상시키기 위하여 해마다 월진회 창립일을 기념일로 삼아 마을 전체가 이를 기념했다.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할 일" 하던 모범청년의 죽음
 
월진회 창립 회원 명부 1929년 4월 23일, 월진회 창립 회원 명부
▲ 월진회 창립 회원 명부 1929년 4월 23일, 월진회 창립 회원 명부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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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가 만든 월진회는 올해로 창립 88주년을 맞이하였으며 현재는 (사)매헌윤봉길월진회(회장 이태복)로 거듭나 윤봉길 의사의 유훈을 기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창립 당시인 1929년 4월 23일, 회원 명부를 보면 회장 윤봉길(尹奉吉), 이사 정종갑(鄭鍾甲), 정종호(鄭鍾浩), 고문 윤순의(尹舜儀), 김홍기(金弘基), 이성래(李成來) 간사 이태경(李泰敬) 등이었다.

임은 가고 없지만 윤 의사의 애향, 애국정신이 오롯이 남아 그 유지를 받들고 있는 (사)매헌윤봉길월진회 활동에 옷깃을 여며본다. 특히 인완진 부회장은 직접 '윤봉길의사기념관'에 나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 윤봉길이 해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장개석(장제스)의 찬사를 들려주면서, 윤 의사가 훙커우공원 거사와 함께 고향에서 애국 계몽운동과 민족교육을 위해 월진회 등을 만들어 헌신했다는 일을 다시 환기시켜 주었다. 
 
장개석 총통 장렬한 빛이 오랜 세월 남으리라는 장개석 총통의 친필과 사진. 1968년 윤 의사 전집을 만들 때 장개석 총통은 친필을 써서 윤 의사 동생 윤남의 선생에게 보내왔다.
▲ 장개석 총통 장렬한 빛이 오랜 세월 남으리라는 장개석 총통의 친필과 사진. 1968년 윤 의사 전집을 만들 때 장개석 총통은 친필을 써서 윤 의사 동생 윤남의 선생에게 보내왔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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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완진 부회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간 '윤봉길 의사 =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에서 한 발짝 나아가 월진회와 윤 의사의 속 깊은 애향 정신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편, (사)매헌윤봉길월진회 팀장 이선연씨는 "월진회에서는 윤봉길 의사가 순국하여 묻혔던 일본 가나자와시 노다산 공동묘지에 해마다 6월 초 백만석축제에 맞추어 방문하고 있으며 일본 쪽에서는 윤봉길 의사 공의회(도모노카이, 共の?)가 4월 29일 예산지역을 상호방문하고 있다"고 전했다.
 
매헌윤봉길월진회  (사)매헌윤봉길월진회 인완진 부회장, 기자, 이선연 팀장, 이무희 예산군 행정복지국 주민복지과장. 이들은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로 가기 전 고향에서 월진회를 만들어 애국 계몽활동과 농촌부흥, 민족정신 교육을 실천했던 일도 꼭 기억해달라고 전했다.
▲ 매헌윤봉길월진회  (사)매헌윤봉길월진회 인완진 부회장, 기자, 이선연 팀장, 이무희 예산군 행정복지국 주민복지과장. 이들은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로 가기 전 고향에서 월진회를 만들어 애국 계몽활동과 농촌부흥, 민족정신 교육을 실천했던 일도 꼭 기억해달라고 전했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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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가오는 12월 19일이면 윤봉길 의사 순국 86년을 맞는다. 윤 의사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이어가는 길은 그의 삶을 낱낱이 아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우린 그동안 윤 의사의 길지 않은 너무도 짧았던 스물다섯 해 삶의 면면을 들여다볼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쩜 그것은 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고향 덕산에 자리한 '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새삼 민족혼을 일깨운 청년 윤봉길의 삶을 되돌아본 시간은 매우 뜻깊은 시간이었다. 기념관 주변에 심은 단풍이 청년 윤 의사의 끓는 피처럼 활활 불붙어 있었다.

* 윤봉길의사기념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
041-339-8232

* (사)매헌윤봉길월진회
충청남도 예산군 적산면 덕산온천로 182-10. 충의사 저한당 내
041-338-9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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