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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사진 - '그 불빛'(김신용)
12/10/2017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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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VELAND LAKE IN NIGHT SNOW, Loveland Colorado



'그 불빛'


김신용 (1945 ~ )


그 불빛

회현동 굴다리 밑에서 새어나오던 그 불빛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진열대 위에 책 몇 권 올려놓고

내 늦은 귀가 길을 멈추게 하던,

흐린 진열장에 비쳐진 그 책들을 보며, 들어갈까? 말까?

호주머니 속의 그날 벌이를 가늠하며, 내 발걸음을 망설이게 하던 그 불빛

유리문을 들어서면, 졸리운 듯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던 여자

언제나 내가 보고 싶던 그 달의 문예지 같은 얼굴로, 나를 맞아주곤 했었다

그 문예지를 손에 들고,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망설이다가

기어코 책을 사, 그날 지불해야 할 양동의 방세와 밥값 걱정 때문에

더 무거워진 등에, 다시 지게를 얹고 저만큼 걸어가면

그런 내 뒷모습을 무슨 희귀동물처럼 바라보던 그 불빛!

언젠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혹시 글을 쓰세요? 작가 지망생이에요? 하고 물어와

나를 당황하게 했던 -, 그리고 그날은 눈이 내렸던가?

거리마다 송년의 불빛들로 반짝이던 그날

청계천 노점에서 막걸리 몇 잔에 얼큰해져 돌아오는 길

꼭 거쳐야 할 경유지인 것처럼 그 불빛을 찾아들어,

글만 쓰면 배가 고파진다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주제에 글을 써야 하느냐고 -, 술주정 같은 푸념을 했을 때

그 서점의 여자는 묵은 책의 먼지들 털 듯 말했었다.

쓰고 싶은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세요 -, 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 속은 하얗게 비어 왔었고

눈앞이 아득히 흐려졌었다

그 불빛,

아무리 배가 고파도 쓰고 싶은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라는 -, 그 傳言.   

마치 죽비처럼 내 등짝을 후려쳐, 부끄럼으로 눈 내린 밤길을

더 비틀거리게 했던 -,

지금도 글을 쓰다가 문득 눈앞이 아득히 흐려질 때, 꺼내보곤 하는

회현동 굴다리 밑의

그 불빛 


일용직 잡부로 나날의 연명에만도 힘에 부쳤을 그에게 시를 쓰게 했던 그 서점의 여자가 왜 나는 까닭도 없이 보고 싶은 것일까?

은유의 달팽이로 세상의 배춧잎을 기어오르며 살아야 했던 한국의 랭보 시인.

물컹, 슬픔의 덩어리가 마음의 손 가득 안겨오는 그의 시편들에는

우리가 애써 지운 아픈 근대의 시간들이 들어있다.

시인이여, 아프지 마라,

부디 더 오래 살아남아 모래알 서걱이는 시안(詩眼)을 자극해다오. 

                                                              <이재무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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