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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사랑에서 진정한 사랑으로
06/16/2018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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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모가 의붓 자식을 학대하여 죽인 사건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였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어린 아이를 그렇게 모질게 대할 수 있는지 의아하게 느껴진다. 콩쥐 팥쥐의 이야기나 신데렐라의 이야기는 단순히 소설이라기보다 계모에 얽힌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계모는 남편이 데리고 온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콩쥐 팥쥐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기 자식에 대한 애정이 강할수록 남의 자식에 대한 미움도 강한 것 같다. 내 것에 대한 사랑은 남의 것에 대한 증오로 나타나는 것일까? 독일의 나치는 게르만 민족에 대한 우월감으로 유대인이나 집시와 같은 소수민족을 차별하고 학대하고 잔인하게 죽였다. 오늘날도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다른 인종을 비하하거나 비인간적으로 대한다. 자기가 속한 단체에 대한 애정이 다른 단체에 대한 비하 내지는 미움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종교기관에서도 보인다. 내 가정, 내 자식, 내 부모, 내 교회. 내 나라 등등 자기의 것에 대한 애정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애정이 남의 자식, 남의 부모, 남의 교회에 대해서 백안시하거나 차별로 나타난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자기 것에 대한 편향적인 사랑은 집착이 되고 그 집착은 남의 것에 대한 차별과 미움으로 나타난다. 연인관계에 있을 때는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 같았는데 애인이 변심해서 떠나가면 찾아가서 괴롭히고 죽이는 것은 그 애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었음을 보여준다. 내 것이었을 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대하지만 남의 것이 되는 순간부터 미움으로 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이웃 교회에 문제가 생겨서 그 교회 교인들이 내 교회에 오면 자기 교회가 부훙하게 되었다고 내심 기뻐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교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내 것에 대한 집착일 뿐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이유가 내 자식이기 때문이다내 자식이기 때문에 잘 키우려고 노력하는 밑바닥에는 자기 것에 대한 소유의식이 자라잡고 있다. 그런 사람은 자식이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자라도록 얼르고 억압하고 폭력을 행하기도한다. 잘 키우겠다는 열정이 사랑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식에게 상처를 주고 비뚤어지게 만든다. 때로는 자기 자식에 대한 집착은 과잉보호로 나타나기도 한다. 과잉보호 역시 자녀의 영혼을 병들게 만든다. 이러한 집착은 그 영혼에 무관심보다 더 큰 해를 끼친다.

 

14:26에서 주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셨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아내를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한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 말씀은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과 모순되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모순이 아니라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기존에 행하던 사랑의 방식을 버려야한다는 뜻이다. 팥쥐 어머니에게 자기 자식을 미워하라는 말은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 팥쥐를 콩쥐 대하듯 하면 팥쥐를 미워하는 것이다. 팥쥐 어머니가 콩쥐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다. 팥쥐 어머니가 콩쥐에 대한 미움을 극복하고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된다. 사실 우리 모두는 내 것이라는 굴레에 같혀서 사랑한다. 내 것이라는 굴레 안에서 사랑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다다를 수 없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사랑을 배우려면 자기라는 굴레서 벗어나 주님의 마음으로 인간을 대하는 법부터 배워야한다. 

 

자기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주님께 사랑을 배우는 첫걸음이다. 자식을 바라볼 때 자기 자식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보아야 사랑할 수 있다. 자기라는 굴레서 벗어날 때 비로소 남의 자식도 인간으로 보인다. 자기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야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의 아픔을 공감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계모가 인간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아파하는 어린 아이를 학대할 수 있었을까? 부모가 자녀를 한 인간으로 보고 그 마음을 이해한다면 자기 마음대로 강요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가능할까? 집착에서 벗어나 인간을 제대로 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주님의 마음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주님은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실 때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사마리아인이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만났다. 그가 누구인지, 자기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몰랐지만 다가가서 도와주었다. 사실 강도 만난 사람을 먼저 본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 그곳을 피해 갈 길을 재촉하였다. 그들에게는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는 자기에 대한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을 때 다가가서 돌보아 주었을까?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로 하여금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인간의 아픔을 바라보고 공감하고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께 사랑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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