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inonia
pilgrim(koinonia)
New Jersey 블로거

Blog Open 02.08.2017

전체     18878
오늘방문     38
오늘댓글     0
오늘 스크랩     0
친구     0 명
  친구 새글
등록된 친구가 없습니다.
  달력
 
살인하지말라, 마5:21-26
10/12/2018 02:52
조회  199   |  추천   0   |  스크랩   0
IP 68.xx.xx.165

<style> </style>

       동일한 율법인데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보는 관점과 주님이 보시는 관점은 다르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은 율법이 정하는 행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나 마음에 대한 관심보다는 율법이 정한 규칙에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고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율법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주님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안에서 사는 길로 인도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달리 주님은 율법을 가르치실 때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와 사랑에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하신다.

  

주님은 많은 율법 가운데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먼저 설명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 이 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율법을 지키는 의로움이다. 그러나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하신다.

 

다윗은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부하 장수들은 압살롬이 이끄는 군대를 맞아 싸우기 위해 출정하였다. 그 때 다윗은 출정하는 부하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다윗의 부탁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간절하게 부탁하였다. 전투에서 패한 압살롬이 도망을 가다 머리가 나무에 걸려 매달려 있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죽이기를 망서렸다. 그들은 다윗의 부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압이 가서 압살롬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요압도 다윗의 부탁을 알았지만 압살롬은 당연히 죽어야 마땅한 반란의 수괴라고 생각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에 기뻐하기 보다는 죽은 압살롬을 인하여 슬퍼하며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너를 대신하여 내가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 “ 하면서 통곡하였다. 다윗의 통곡속에는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깨닫게 한다.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죽이지 말라는 명령 이상의 뜻을 품고 있다. 이 율법은 인간을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마음을 담고 있다. 주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에서 율법을 보게 하신다.

 

21-22절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고 하신다. 여기서 라가는 그 당시에 정말 못된 사람을 향한 증오를 표현하는 욕이다. 사람들은 악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욕을 한다. 화가 나는 행동을 볼 때 화를 낸다. 미련한 짓을 하기 때문에 미련한 놈이라고 한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은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욕을 하며 증오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은 살인하지말라는 율법과 상관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단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 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람을 대하는 바른 태도를 가르치신다.  

      

       화를 내거나 증오하거나 멸시하는 말은 사람들의 영혼에 상처를 준다. 비록 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일지라도 분노와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순간 상처와 아픔을 경험한다. 이러한 상처와 아픔은 그 영혼을 굽어지게 만들고 우울증과 반항과 자기학대로 이어지게한다. 주님은 형제를 향하여 화를 내거나 증오하는 말을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을 금하는 또 하나의 율법을 더하신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에 다른 영혼이 상처받고 굽어지고 괴로운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배려의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그러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에 합한 태도이다.

 

       나는 딸이 많은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랐다. 하지만 나의 어렸을 적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화를 내시고 야단을 치시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아마 8남매를 키우느라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통제가 안되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작은 실수나 혹은 별로 잘못한 것 같지 않은 일에 화를 내시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하실 때는 마음에 상처가 되고 집을 뛰처나가고 싶은 충동을 많이 느꼈다. 지금은 주님의 은혜로 많이 고쳐졌지만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분노와 쓴뿌리가 남아서 조그만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여 아내를 힘들게 하였다. 유별난 사랑을 받으며 자란 나였지만 부모님의 짜증이나 비하하는 말이 상처가 되어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비아냥거리는 말이나 분노의 말을 던짐으로 상처를 준다. 특히 자녀를 훈육한다는 명목으로 상처를 주는 경우를 많이 본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분노의 고성, 미련한 놈이라는 말 한마디가 영혼에 주는 상처가 심각한 것을 주님은 아시고 이렇게 경고를 하시는 것이다.

 

이어서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신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은 무엇일까? 화가 나서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롱섞인 말로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당시에는 무심히 넘어갔는데 예물을 제단에 드릴 때 문득 생각이 났다. 혹시 이 말에 형제가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혹시 나의 행동이 형제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화목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예물을 드리는 일을 마치고 가서 화해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굳이 예물 드리는 일을 멈추고 갈 필요가 있을까? 하나님께 예물드리는 일이 화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제단에서 예물 드리는 중에도 상처받아 괴로와하고 있을 형제에게 마음이 쓰여서 예물드리는 일에 집중할 수 없다. 그래서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먼저 화해하고 나서 기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을 가진다. 이와같이 형제를 상처와 아픔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전에는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진정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어서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말씀하신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송사는 어떤 다툼이나 문제가 있을 때 대화를 통해서 해결이 되지 않아서 법정에 가는 것을 말한다. 상대방이 섭섭해하거나 원망할 만한 일이 생각났을 때 달려가 화해를 한다면 송사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거나 나름대로 자기가 옳다고 느껴서 화해를 시도하지 않을 경우에 상대방이 법정으로 끌고 갈 수 있다. 주님은 법정에 가기 전에 아직 고소하는 사람과 화해할 기회가 있을 때 화해를 시도하라고 하신다.

 

화해란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받아주고 상처를 어루만져줌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법정은 화해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해서 다투는 곳이다. 주님은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해 다투기 보다는 송사하는 사람이 갖고 있을 상처와 아픔을 헤아리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라고 하신다. 법정 다툼으로 상처가 더욱 깊어지고 관계가 망가지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상대방을 인도할 기회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은 일단 법정에 서게되면 감옥에 들어가 모든 것을 다 갚기 전에는 나올 수 없다고 경고하신다. 주님은 송사당하는 자가 법정에서 질 것을 알고 예단하신 것일까? 아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송사에서 이긴다고 해도 다투고 관계가 망가지는 것 자체가 이미 송사에서 진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관계를 회복하기 까지 치러야 할 모든 비용은 차라리 다투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들어주고 화해하는 것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의 인기글
1 ㆍ 2 ㆍ 3 ㆍ 4 ㆍ 5

살인하지말라, 마5:2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