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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泰俊이 본 日本 (2015.03.05)
12/18/2017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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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에 점령당한 한국이 보기 싫어 두문불출 하듯이 싸릿문 닫아 걸고 있어도 친구들이 좋은 글들을

보내준다. 출처를 찿아보니 2015년의 선우정 칼럼이었다. 모두들 읽었겠지만 거세된 소시민의 

사회에 다시 한번 던져본다. 작은 파문이라도 보일런지... 


국가혼이 쇄미해진 것은 자칭 보수라던 비겁한 정치 모리배들이 탐관오리가 되어 저들만의 배를 

채우고, 한편 명분과 염치가 없어진 사회에선 전 국민이 기회가 닿는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갑질을 하는 

아귀다툼에 지친 사람들이 삶의 끈을 놓고 있을 때, 아무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국가혼을 

죽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좌익이 발호 할 수 있는 최선의 토양을 이 한국의 보수란 자들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좌우 이념대립이 끝나지 않은 땅에서 좌익은 소외계층과 노동자를 포섭하여 그 입지를 넓혀가고 

있는데, 국민 대통합과 상생으로 나눠먹기에 안주한 보수 정상배들은 백간 지옥에 올라 있으면서도 

몇 안되는 우익의 애소를 냉하게 묵살하더니 좌익의 공세에 맥없이 무너지는 비겁한 본성을 보여 주었다. 

이에 좌익의 악이 오른 행패에 놀란 민초들이 태극기와 애국을 들고 나왔어도 국가혼이 없으니 

목표조차 정하지 못한다. 

공산주의를 박멸할 반공의 나라가 될것인가? 

진보로 포장된 공산주의를 포용할 용공의 나라가 될 것인가? 

.....


국민의 혼을 가다듬지 못하고 다음 세대를 이끌고 나갈 후학을 키우지 못한 죄를 함께 지고 간다.




朴泰俊日本 -2015.03.05

 

박태준(朴泰俊, 1927 10 24 ~ 2011 12 13)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이다

포항제철을 설립하고 창업 25년이란 짧은 기간에 세계 제3위 철강업체로 키운 대한민국 철강업계 

명실상부한 대부이자 세계 철강업계 거목으로 꼽히며 철강왕이라거나 대한민국의 카네기라고 불렸다.

자유민주연합의 총재를 지냈고  32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포스코가 위기에 빠졌을 때 그는 일본에 달려갔다. 과거를 잊지 않은 일본인은 아낌없이 한국을 도왔다. '巨人 時代'를 읽으면 지금 · 너무 초라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철강인 박태준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책에 기록했다

수영대회에서 1등을 했지만 조선인이란 이유로 야유를 받고 2등으로 강등당한 일, 그리고 미군의 

폭탄이 쏟아지던 날 방공호에서 겪은 일이다.

"방공호는 질서가 정연하다. 이 일에 노인들, 특히 할머니들이 나선다. '젊은이는 안으로 들어가라

위험한 곳은 우리가 막는다. 왜 책을 들고 오지 않았느냐? 젊은이는 책을 펴고 공부해라. ' 

방공호 입구에 천막이 쳐지고 젊은이가 모인 제일 안쪽엔 두 개의 촛불이 켜진다."

 

박태준은 1등을 빼앗겼을 때 "속이 끓었지만 참고 다스렸다"고 했다. 방공호에서 할머니의 질책을 

들었을 땐 "식민지 대학생의 가슴으로 들어와 고국(故國)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웠다"고 술회했다

일본이 준 분노는 참고, 감동은 받아들여 조국을 위한 동력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박태준이 훗날 포스코를 세울 때 '은인(恩人)'으로 부른 일본인이 몇 명 있다.

당대 일본 최고의 사상가(思想家)로 불리던 양명학자 야스오카 마사히로가 그 중 한 명이다

종합 제철소 프로젝트가 미국·독일·영국·이탈리아에 퇴짜를 맞았을 때 한국은 일본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모든 책임을 어깨에 지고 도쿄로 간 박태준은 야스오카를 가장 먼저 만났다

일본 정·재계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통하는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야스오카는 '과거를 반성하고 한국을 돕는 것이 일본의 국익(國益)'이라는 한국관()을 갖고 있었다

그는 먼저 기술 협력의 열쇠를 쥐고 있던 이나야마 요시히로 일본 철강연맹 회장에게 박태준을 보냈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등 정계 거물과의 연쇄 만남도 주선했다. 박태준의 열정에 야스오카의 성의가 

더해져 미온적이던 일본 정부와 기업은 열정적 지지자로 변했다. 다른 선진국처럼 일본도 한국을 

외면했다면 포스코는 그런 위용(威容)으로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박태준과 비슷한 기록을 삼성 창업자 이병철도 남겼다. 유학을 위해 탄 연락선에서 1등 선실 근처로 

갈 때였다. 일본 형사가 가로막고 막말을 던졌다.

"조선인이 무슨 돈으로 1등 선실을 기웃거리느냐. 건방지게." 그는 "후일 사업에만 몰두하게 된 것은 

민족의 분노를 가슴 깊이 새겨두게 한 그 조그마한 사건 때문"이라고 자서전에 썼다.

 

이병철은 패전으로 폐허가 된 전쟁 직후 도쿄의 허름한 이발소 이야기도 함께 기록에 남겼다

주인에게 "이발 일은 언제부터 했느냐"고 물었다. "제가 3대째니까 가업(家業)이 된 지 이럭저럭 

60년쯤 되나 봅니다. 자식놈도 이어주었으면 합니다만…."

그는 "일본은 절대 망하지 않고 재기(再起)할 것이라고 그때 생각했다"고 썼다.

 

1983 8월 이병철이 후배 박태준을 일본 휴양지로 불렀다. '부메랑 효과'를 내세운 일본 철강업계가 

광양제철소 건설에 협력을 거부할 때였다. 휴양지에는 당시 일본 정·재계의 막후(幕後) 거물 세지마 류조, 그리고 10여년 전 포항제철소 건설을 지원한 일본 철강업계의 대부(代父) 이나야마가 함께 있었다

이들에게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둔 이병철은 "다른 말은 말고,고맙단 인사만 드리라"고 박태준에게 말했다박태준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고 술회했다.

 

이병철도 비슷한 고비를 넘겼다. 5개월 전 발표한 삼성의 역사적 반도체 투자는 핵심 기술을 제공한 

일본 반도체 업체 샤프의 역할이 컸다. 일본이 처음 해외에 반도체 기술을 제공한 사례였다

이병철은 "샤프의 각별한 호의(好意)였다"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 

"샤프를 국적(國賊)이라고 혹평하는 업자도 있었다"고 했다.

 

·일의 가교 역할을 한 세지마 류조는 회상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은 통일된다. 일본은 (과거사를) 반성하고 한국의 감정(感情)을 포용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기둥으로 하는 통일 한국이 탄생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박태준은 일본에서 노동을 하며 자식을 키운 아버지의 임종(臨終)을 지키지 못했다.

일본 총리 후보였던 유력 정치인과의 저녁 약속을 깰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성장에 허덕이던 1980년 한국은 일본의 도움이 그만큼 절실했다.

그날 박태준이 국익을 위해 약속을 취소하지 못한 일본 정치인은 아베 신타로,

()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아버지다. 그는 평생 한국과의 우호에 힘을 쏟았다.

 

다음 날 박태준은 아버지의 이런 유언을 전해 들었다.

"울지 마라. 열심히 살고 간다."

 

거인(巨人)들의 시대였다. 물론 그때도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큰 흐름은 거인들이 가슴에 품은 '대의(大義)'에 따라 움직였다.

풍요를 얻어 절실함이 사라진 탓일까나라가 늙어 포용력이 사라진 탓일까.

그 시대를 읽으면 지금 한·일 관계는 작고 얄팍하다유치하고 졸렬하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은 소설가 이대환님의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2005년 개정 12)'입니다. 이 칼럼에 나오는 박태준 전 회장의 이야기는 대부분 이 책을 인용했고, 송복 선생님 외 '태준이즘'을 참고했습니다.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의 이야기는 자서전 '호암자전(2014 2)'을 인용했습니다. 세지마 류조 전 이토추상사 고문의 회상록은 '이쿠야마카와(幾山河·1995 2)'에서 발췌 정리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 [선우정 칼럼]
朴泰俊(박태준)이 본 日本 2015.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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