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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과 콩밭  | 自作隨筆
11/08/201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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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과 콩밭

조사무 


   밤새 내린 가을비에 추색秋色이 칙칙하다. 숲길 따라 장사진長蛇陣을 친 노스캐롤라이나 주목州木 키다리 소나무, 그 대형隊形이 꽤나 엄정하다. 홍관조 한 쌍이 호들갑스레 솔숲을 날아다니며 진형陣形을 어지럽힌다.

가을을 앞서 가는 여인이 간간히 걸음을 멈춘다. 반려견이 열댓 발짝도 채 못 내딛고 나무밑동에다 오줌 지르기를 되풀이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대물림한 야성에서 비롯된 버릇일 게다아니면 주인이 즐겨 찾는 산책로임을 온누리에 공표하는 충정일지도 모른다개가 볼일을 마칠 때까지 곁을 지키며 기다려주는 여인이 한가롭다.


   숲속 깊이 밀영密營처럼 들어선 외딴집에서 수탉 우는 소리가 고요를 찢는다. 날카롭기가 마치 진군나팔 소리 같다.

가을이 물든 도그우드 나뭇잎들이 너울대며 겉뜨인다. 요즈음 다시 펼쳐든 고서古書 책갈피만큼이나 색깔이 누르칙칙하다

열여덟 살 그녀와 첫 데이트를 하던 중, 종로통 어느 서점에서 구입한 죄와 벌’, 반백년 세월과 더불어 누덕누덕 색 바랜 고전古典같다.


   요즘은 옛날과 달리 신문이나 책자가 대개 가로글씨체다. 오래간만에 세로글씨체로 책을 읽자니 무척 낯설고 거북살스럽다. 가뜩이나 시원찮은 시력에다 흩어지는 깨알같이 가물거리는 세로글씨를 내리읽자면 무시로 두 눈을 비벼대지 않을 수 없다.

아내가 책표지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아니, 그 옛날 그 고물이 여태 있네!” 라며 놀라워했다

문득 함께해온 세월만큼이나 노티가 완연한 그녀 또한 어느새 고전이 되었구나싶었다.


   이곳으로 이주한 후 북클럽에 가입했다. 독후감을 발표하기에는 신간보다는 고전이 더 무게감 있을 것 같아 굳이 오랜 세월 처박아두었던 헌책들을 꺼내 다시 읽곤 한다솔직히 요즘은 단행본조차 하루 이틀 만에 완독하기가 쉽잖다

게다가 숱한 신작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 고전은 자칫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기가 십상이다

읽자니 왠지 망설여지고, 멀리하자니 어쩐지 아쉬운 것이 곧 고전 아닌가.


   북클럽에 든 후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등 대문호들이 남긴 대작을 구해 난독亂讀하느라고 애꿎은 노안老眼만 혹사시켰다. 생각 끝에 이제부턴 체력을 감안해 짧고 가벼운 글을 골라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먹고 선택한 단행본이 하필이면 누리끼리 변색하고 너덜너덜해진 죄와 벌이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이번엔 아무래도 생고생을 사서 하게 생겼구나 하는 난감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단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늙을수록 노티가 더해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분수도 모르고 노욕을 부리리다보면 추해지기 마련이다

늘그막에 쉽게 단편, 산문 또는 시를 읽고 독후감을 발표한다고 흉잡힐 일도 아닌데 괜스레 제멋에 겨워 무리수를 두는 게 아닌가싶기도 하다식탐을 참지 못한 노마老馬가 콩밭에 들어 날름날름 날콩을 과식하다보면 배탈 나지 않고 어찌 배길 수 있으랴. 하물며 사람이야.

북클럽은 콩밭이다. 내로라하는 식자識者들 틈에서 현학玄學 분위기에 편승해보겠다고 섣불리 과욕할 일이 아니다

까닥 잘못 판단해 황새를 따라잡겠노라 종종걸음을 놓다가 종래는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고전이 된 마누라 속깨나 썩히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다.


   산책길 날목 어름에서 개가 영역순찰을 마무리 짓듯 느긋이 볼일을 끝내더니 나를 향해 으르렁거린다

여인이 얼른 개 목줄을 잡아채고는 발길을 서두른다

테니스코트 어름 너른 잔디마당에서 모이를 쪼아가며 세상사가 이러쿵, 인간사가 저러쿵, 잔사설을 찧고 빻던 새들이 일제히 푸른 하늘로 날아오른다.

날갯짓에 부서진 가을햇살이 분분히 낙진落塵한다.   

老馬枕松根, 夢行千里路, 秋風落葉聲, 驚起斜陽暮. 崔澱(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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