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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K는 언제 박정희 틀에서 벗어날까?
05/12/2018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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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박정희를 등에 업지 못하면 안 될 자유한국당

 

색마이자 독재자인 박정희가 정말 대한민국 경제성장에 기여했다는 말인가?

이철우 자유한국당 경북도지사 후보는 12

박정희대통령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기아에 허덕이던 우리 국민을 배고픔에서 구해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말을 했단다.

정말 국민들의 삶을 위해 색마 중의 색마 박정희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거머쥐었으나 나라를 운영할 수 있는 資金(자금)

국민의 마음을 끌어낼 수 있는 명분의 資金(자금)도 필요하지 않았나?

쿠데타로 나라 권력을 쥘 때는 곧 정권을 민간인에게 이양하겠다는 공약까지 해놓고 색마인 박정희는 어기고 말았다.

쿠데타 당시에는 이마에 별 두 개를 달고 있었는데 스스로 쾌속 진급을 하여 별 네 개(육군대장)로 전역을 했으니 스스로 민간인이 됐다는 것이다.

결국 부정선거를 통해 대통령 권자에 착석하고 말았다.

독재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장면 민주당 정부를 붕괴시킬 때 찾아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서를 보고 있노라니 입맛이 당긴 것일 게다.

미국을 찾았으나 누가 반겨했을 것인가?

결국 독일로 향해 아우토반(Autobahn)이란 독일 고속도로에 반한 나머지 경부고속도로 기획에 들어간 것까진 좋으나 자금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급한 김에 성사시킨 것이,

미국이 자국 청년들 목숨 대신 박정희를 이용해서 월남파병으로 이어졌고 결국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라는 불명예까지 얻게 된 한국군의 역사를 창조하신 독재 중의 독재자 박정희!

그 피의 대가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을 울렸을지 의문이 되곤 한다.

항간에는 200여 여성이라고 하지만 그 숫자를 하늘이나 알고 박정희 영혼이나 알 것이다.

그 여성들은 Me too 운동에도 참가할 수 없을 만큼 연로하던지 저 세상 영혼이 됐으니 하늘이나 슬퍼하시지 않겠는가!

 


<민중언론 참세상>에서 쓴 글,

박정희 경제 신화의 허와 실이란 제목에서 얻어 본다.

이식된 산업화 전략과 군사 정권의 더러운 돈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을 당시 남한과 북한의 경제적 차이는 얼마나 됐을까? 1961년 한국의 1인당 GNP는 북한과 필리핀의 40%에 불과했다당시 한국은 전후 미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원조를 받는 나라였다그에 비해 경제적 발전은 매우 더뎠다일각에선 그 이유가 이승만 전 대통령이 경제 개발 계획이라는 것 자체를 혐오했기 때문이라 평가하기도 한다공산주의 국가에서나 하는 계획 경제를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1950년대 중공업 중심의 계획 경제로 크게 성공한 북한의 경제력은 남한보다 2.5배나 됐다.

 

그래서일까북한의 중공업 중심의 발전을 흠모했던 박정희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중공업 중심의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했다박정희는 이승만과 달리 계획 없이 부패만이 횡행하는 시장주의를 싫어했다그래서 집권 초기엔 1950년대 원조 경제의 단물만을 족족 빼먹었던 부패한 관료와 재벌을 단죄하려 했다또한 총을 들고 쌀가게의 쌀을 강제로 압수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 공급 하기도 했다당시 박정희 정권이 보여 준 이런 통치 행태는 당시 사회적 혼란과 갈등에 염증을 느꼈던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러나 의욕만 있고 구체적인 전략은 마련하지 못했던 초기 쿠데타 세력은 경제 정책에 대해 매우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이전 장면 정권의 경제 개발 정책을 모방하기도 했다당시 원조 경제의 한계를 알고 있었던 미국은 4.19 혁명으로 등장한 장면 정권에 자신이 제시하는 경제 개발 전략을 이식하려 했다그러던 와중에 5.16 군사 쿠데타가 벌어져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미국은 우유부단했던 장면 정권보다는 사회적 혼란을 진정시키고 경제 개발 계획을 강하게 밀어붙일 군사 정부를 선호했다.

 

그런데 미국이 이식하려 했던 한국의 경제 전략은 경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 산업화 전략이었다원조의 조건도 이러한 전략 수용과 결부되었다특히 미국은 한국에 일본과의 수교를 요구했다미국은 한국이 일본과 경제적 분업 관계를 형성해한국의 경제 발전과 함께 동북아 안보 협력을 이루는 배경을 만들고자 했다이런 전략적 인식 때문에 5.16 쿠데타 묵인한일 협정 강요수출 드라이브 주입으로 이어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중공업 자립화 노선은 미국의 경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 산업화와 충돌했다미국은 한국이 무리하게 중공업을 일으키기보다는 경공업 중심의 수출 경제를 통해 대만처럼 일본의 하청 기지로 기능하길 원했다그러나 당시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열위에 놓였던 박정희 정권은 중공업 육성 정책을 밀어붙였다박정희 정권은 이를 반대했던 미국과의 마찰 때문에 중공업에 필요한 상업 차관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그래서 국내 자본을 동원하기 위해 직접적인 시장 개입을 하게 된다.

 

주식 시장 개입과 통화 개혁의 실패그리고 수출 주도 경제 등장

 

집권 초기 중앙정보부는 한국전력의 주식을 고의적으로 올리는 작전을 폈는데, 1년 정부 예산의 10%에 가까운 20억 환을 취했다. 1963년 3월 미 안보회의 보고서에 따르면중앙정보부가 증권 조작으로 2~3천만 달러(현재 가치 1억 7500만 달러대략 2000억 원)를 취했다고도 나온다또한 박정희 정권은 1962년 6월 10환을 1원으로 바꾸는 통화 개혁을 극비리에 단행했다당시 통화 개혁의 목적은 장롱 속에 있는 돈을 끄집어내 은행 금고 속으로 넣는 것이었다그렇게 늘어난 예금을 경제 개발 자금으로 활용하려고 했다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기대했던 것만큼 돈이 나오지 않았다오히려 예금했던 돈을 자유롭게 인출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돈의 융통이 멈춰 경제 전체가 대혼란에 빠졌다당시 전체 공장의 45%가 가동 중지 상황을 맞는다결국 미국이 개입해 7월 13일 예금 인출이 재개된다이 사건은 미국과 마찰 속에서 중공업을 일으키려고 했던 박정희 정권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경제 개발 계획을 수정해 중공업 자립화 노선을 포기하고 경공업 중심의 수출 산업으로 전환했다1960년대 세계 경제는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선진국들의 수요가 많았다신발의류가발인형 등 후진국들의 값싼 상품들이 많이 팔리던 시기였다뜻밖에 수출이 매우 잘되자 실리에 눈이 밝던 박정희 정권은 재빨리 수출 주도 성장을 자신의 업적으로 이미지 마케팅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1961년 당시 저축률은 3.9%로 매우 낮은 상태였다정기 예금 금리가 15%였지만 물가 상승률은 20%나 됐기 때문이다. 1962~1971년 평균 물가 상승률은 한국 12.4%, 대만 2.9%, 일본 5.7%였다낮은 저축률로 국내 자본 동원이 어렵자 외자 도입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한일 협정으로 인해 들어올 6억 달러(3억 달러 무상, 3억 달러 차관)는 매우 탐나는 돈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각에선 당시 굴욕적인 한일 협정에 대해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인 양 포장하기도 한다그러나 사실 박정희 정권에게는 미국이 요구한 한일 관계 개선이 별 문제될 게 없는 사안이었다심지어 이들은 집권 시작 단계부터 일본계 자금을 서슴없이 가져다 썼다당시 박정희 정권은 일본과 국교 수립 이전인 1961~1965년 사이에 6개의 일본 기업들로부터 6600만 달러를 제공받았는데이는 훗날 기밀 해제된 미 중앙정보국 특별 보고서를 통해 드러났다이것으로 볼 때 1965년 한일 협정은 이미 짜 놓은 각본에 마침표를 찍는 것에 불과했다북한과의 체제 경쟁만이 중요했던 박정희 정권에게 다른 정치적 외교적 사안은 부차적이었던 것이다이런 기회주의적이고 실리적인 태도는 이후 베트남 참전으로도 이어지는데당시 전쟁 특수로 실제 수입만 10억 달러나 됐다.

 

결국 더러운 돈과 피묻은 돈이 박정희 경제 신화의 종자돈이었던 셈이다이를 바탕으로 1962~1971년 동안 경제 성장률 9.3%(세계 평균 5.3%)라는 고도성장을 경험하게 된다특히 제조업의 경우 연 15~20%씩 성장했다그러나 이것은 높은 물가 상승률 속에서 외자 도입에 기댄 기형적인 고도성장이었다.

<중략>


 


박정희 경제 신화에 대한 평가

 

만약 우리가 1960년대 말에 살고 있다면박정희를 1950년대의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민생 문제를 해결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만약 우리가 1970년대 말에 살고 있다면 그에 대해 혹평할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박정희의 무리한 중화학 공업 추진은 재벌 중심의 자원 배분 왜곡과 비효율을 낳았고물가 불안으로 민생고를 격화시켰다이런 경제를 진정시키고 물가를 안정시킨 건 그 다음 정권인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이다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중화학 공업 육성은 1980년대 ‘3저 호황을 맞아 그 결실을 맺게 된다한편 우리는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박정희 정권부터 내려온 관치 금융정경 유착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의 폐해에 대해 수많은 지적을 들었다. 아마도 우리가 1990년대 말 박정희 경제 신화를 평가한다면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경제 전략으로 치부할 것이다외환 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은 그의 이런 유산들을 청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박정희 경제 신화가 신자유주의가 한창 확대되던 노무현 정권 중후반부터 급격히 재생산되고 있다당시 한나라당의 두 대선 후보였던 이명박과 박근혜는 박정희 후계자 코스프레에 몰입했고이후 차례대로 대통령이 되었다그런데 실제 그 두 대통령은 각각 비즈니스 프렌들리와 규제 완화로 표상되는 열렬한 신자유주의자들이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박정희 경제 신화는 서사만이 남아 있는 신화이다신화는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믿음의 대상일 뿐이다그래서 우리가 다시금 박정희 경제 신화에 대해 평가하고자 하다면 신화 뒤에 가려져 있던 역사적 사실과 정세의 인과적 관계를 먼저 들춰 내야 할 것이다미국의 동아시아 안보 전략에 종속된 경제 개발 계획산업화 종자돈을 얻기 위한 일본과의 굴욕적인 거래베트남 전쟁으로 얻은 피 묻은 돈일본을 모방하고 재벌에 집중한 불균형 성장 전략심각한 빈부 격차와 노동 빈곤층의 고된 삶중동 모래 사막에서 살인적인 철야 노동으로 긁어모은 오일 달러부동산 불패 신화라는 고질병이 시작된 시대이처럼 박정희 경제 신화에 가려진 진실은 너무나 많다.(참세상;2016.6.3.)

더 알고 싶은 분은 다음 URL을 참고하시고,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1038


독재자 박정희가 회전하던 시대 대한민국 국민은,

참지 않고 살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처해있는 지금의 북한 주민들과 다르지 않았었다.

우리에게도 북한 주민들처럼 인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1960~70년대에는 12월 10일의 '세계인권선언일'만 되면 인권을 찾자고 사회적으로 웅변대회도 하고 기념을 했지만 우리의 인권은 세계적으로 그림의 떡이 되고 있었다.

헌법 제1조에 있는 민주주의’ 단어만 외치면

허구한 날 청년 학생들은 군화 발밑에 머리가 처박혀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으며 경찰 철창 속에 가쳐야 했고 중앙정보부에 처박혀 물통 속에 머리를 박지 않으면 통닭구이와 전기 찜질 고문에 시달린 나머지 거짓을 진실인양 만들지 않으면 안 됐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인권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던 시절 색마 박정희는 국민을 옥죄어 억압하면서 그 위에 가소롭다는 듯 웃어가며 군림하고 있었다.

그 여파의 결론이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2014년 4.16참사 당일 했던 방식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박근혜의 세월호 7시간이란 단어가 왜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근혜 정권 4년 동안 문교부 국장급인 나향욱은 민중은 개돼지 발언을 하여 국민들은 울분을 토했고 국민들은 그를 파면시키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그는 강등이라는 죄목을 얻어 복귀했다.

국민을 무시해도 괜찮았다는 박정희 독재자 시대의 산물이 박근혜 4년에서 만들어 내 논 것을 문재인 정부 시대에서 강등으로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 최고지도자 한 사람만 잘 들어오면 사회질서도 바르게 급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열심히 배우면서 살고 있다.

 


박정희를 업고 끼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자유한국당(자한당사람들을 보면 슬펐고 암담했던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저들이 없어진다면 그 슬픈 과거로 생각을 되돌릴 일도 없지 않을까?

언제까지 우린 색마 중의 색마이고 독재자였던 박정희의 슬픈 세상에서 헤매야 한다는 말인가?

선거철만 되면 이런 짓을 보고 또 봐야 한다는 말인가?

저런 정치꾼(정치에는 무관심이고 선거철만 되면 왕성해지는 인물)들만 없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사라지지 않고 사람을 괴롭힌다.

TK[대구 경북]만 물위에 기름 뜨는 것 같다.

일요신문은

이철우 경북지사 후보, “박정희국민 배고픔 구해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이란 제목을 걸고 다음과 같은 글을 적고 있다.

이 후보의 이날 행보에는 구미를 비롯해 김천칠곡성주지역 자유한국당 공천을 받은 시장·군수후보와 광역의원 후보들과 함께했다.

 

 


이 후보는 자리를 함께 한 시장군수 및 광역의원 후보들에게 당선이 되면 지자체 조례를 개정해서라도 새마을운동 관련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으자고 당부했다.

 

이 후보는 평소 박정희대통령을 복무 귀감을 가르쳐 주는 공직 이정표(里程標)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때문에 그는 국회의원 시절에도 틈틈이 박 대통령 생가를 찾았으며정부 세종로 청사에 있는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를 공직생활의 사표(師表)로 삼고 있을 정도인 것.(일요신문;2018.5.12.)

 


언젠가는 TK지역도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때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30대 청년들이 세상을 바꿔보자고 한다니까 개선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돼선 안 될 것이다.

세계는 색마 박정희가 별을 따다 달던 방식처럼 급변하고 있지만,

독재와 색마는 되지 않고 있다.

그 별이 온전히 붙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그 별은 가짜별이라는 것을 알아낼 때가 반드시 찾아 올 것이다.

TK도 언젠가는 새로운 세상이 이렇게 좋다는 것도 곧 알게 될 날이 있으리라!

 


원문 보기;

http://sports.khan.co.kr/bizlife/sk_index.html?art_id=201805030925003&sec_id=560101&pt=nv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0571

http://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297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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