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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남북 지도자의 산실, 한국의 보수와 진보
02/11/2018 08:23
조회  1122   |  추천   5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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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북한과 남한 지도자의 산실


1930년은 경제공황으로 유명 하다. 자본주의(captital)라는 말은 사회주의자인 칼 막스

가 그의 저서 Das Kapital 처음 사용한 말이었다. 자유시장은 결국 상위 소수에게 자본이

몰리게 하여 빈부차이가 극대화 되어 시장이 몰락 한다는 이론이었다. 많은 자본을 가지고

있는 기업가들이 공장을 운영 하여 생산한 물건을 살 돈을 가지고 있는 소비자가 지나치게

모자라는 상황이 온 것이다. 과잉 생산으로 인한 저물가, 실업으로 인해서 돈의 순환이

안되는 경제 공황이 왔다. 칼 막스는 자본주의가 망한다고 예언 했고 사회주의 경제만이

인류가 살 길이라고 주장 했다. 당시에는 그의 예언이 적중 하는 듯 했으나 오늘 날 살아

있는 쪽은 자본주의 이고 죽은 것은 기획경제, 즉 공산주의 이다. 칼 막스는 그의 저서

자본주의 에서 자본주의의 약점을 잘 지적 해 주었고 자유진영의 지도자들은 이것을 잘

보완 했기 때문 이었다. 60년 가량의 주기로 자본주의는 공황을 초래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공황의 물결은 일본을 덥쳤고 식민지 조선 또한 그 영향 권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대미 수출이 30% 이상을 차지 했던 일본은 경제가 크게 침체 했다. 나쁜 경제를

빌미로 군부가 정권을 장악 하고 경제 구제책의 하나로 만주를 침략, 점령 했다.

일본의 부족한 쌀을 채우기 위해서 조선 농민들에게 서 쌀을 수탈 해 갔다. 쌀 값이

급등 했다. 많은 농민들이 자기 손으로 농사 지은 쌀을 다 빼았기고 굶어 야 했다.

돈이 있는 사람도 쌀 구하기가 힘든 지경이었다고 한다. 한편 만주를 손아귀에 넣은

일본은 만주 이주 정책을 강화 했다. 처음에 일본 인들에게 만 적용 되던 만주 이주 정책을

조선 사람에게도 장려 했다. 1930년 한해에 무려 60여만 명의 한인들이 만주로 이주

했다. 1938년 7월 부터는 만주 정부는 이주자 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어서

파산 한 조선 농민들을 만주로 이주 시켰다. 만주에 거주 한  한인들 중에는 항일 투쟁

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상당 수의 조선 인들이 공산당 중심으로 활동 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들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발하여 생계를 유비하게 하고 이들이 일본 정부를

도와 항일 투쟁 하는 사람들, 특히 공산당의 지하 활동을 감시 하도록 했다. 공식 집계에

의하면 약 2백10여만명에 이르는 한인들이 만주에 거주 했다고 한다. 당시 한반도의 인구

가 약 2천여만명이 었으니 약 10%가 만주 에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한일 합방는 나라를 잃었 다는 비극 임과 동시에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의미 했다.

삼강오륜, 장유유서, 백성, 상감마마 등의 유교적인 용어들이 사리지고 민주, 민족, 학교,

교회, 국민등 근대적인 낱말들이 사회 곳곳에 스며 들었다. 고작 세 사람이 나란히 걸을

넓비의 도로가 가장 큰 길이 었던 조선은 네 바뀌 달린 교통 수단이 들어 오면 서 넓은

신작로 를 가지게 되었다. 부산에서 부터 만주로 연결 되는 철도를 건설하여 말 보다

훨신 빠른 기차가 달리게 되었다. 서울에는 전차가 생 겼다. 전기가 밤을 밣겼다. 이와

같이 조선 사람들 에게는 근대 문명의 편리 함을 맞 보게 했으 나, 일본은 역사 적인 숙원

이었던 중국 본토 침략의 발판을 마련 했다. 조선은 그들의 보급 기지와 보급로가 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게 패퇴 한 아픈 기억을 잊지 않고 청일 전쟁에서 이기고 조선을

청나라의 영향 권에서 빼앗고 만주를 점령 하여 중국 대륙 침략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항일 투쟁자 들은 일본의 탄압으로 조선 안에서 활동 하기가 어려워 지자, 만주로 그

근거지를 옮겼다. 한일 합방 무렵 부터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 하던 의병들이 만주로

옮겨서 독립군이 되었다.

당시 중국은 친서방 세력인 장제스 군과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은 마우체뚱 군이 첨예 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대세는 점점 공산군이 유리 한 쪽으로 흘러 같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주의

와 공산주의의 조선 내의 파급 또한 대단 해서 일본이 물러 간 다음에 조선이 택 해야 할

대세 처럼 느껴 질 정도 였다. 사회 바닥 층은 이들을 환영 했고 항일 투쟁 하는 데 결집력이

강력 해서 일본 정부는 이들을 철처히 탄압 했다.

자연히 만주에서 활동 하던 독립운동 세력은 사회주의 경향이 강 했고 마우체뚱 세력과

협조 했다.


1930년 대에 들어 오자 1919년 3.1 운동에서 보여 주었던 조선 독립의 열기는 점점 식어

가고 있었다. 만주가 일본에 넘어 가는 등 일본의 세력이 점점 강성 해 지자,  일본에 항거

하여 조선 독립을 위해서 싸우 기 보다는 일본에 협조 할려는 인사 들이 많이 생겨 났다.

아마도 조선의 독립은 가능 하지 않다고 판단 했는 지도 모른다.


삼일운동 때 낭독 했던 기미 독립 선언 서를 작성 하여 본인이 직접 낭독 한 사람이 최남선

이다. 그일로 투옥 되었 다가 출소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협조 하기 시작 했다. 1928년

일본의 어용 단체인 조선사편수 위원회에 참여 하고 조선 총독부 충의원 참의직을 역임 했

다. 만주 건국 대학에서 교수 직을 맏았다. 1940년 대에는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학병에 나가 일본에 충성 할 것을 권고 했다. 광복 후에 반민특위의 소환을 받아 투옥 되었다.


백선엽 장군은 6.25 사변 때 혁혁 한 전공을 세운 것으로 유명 하다. 그러나 그는 만주 군관

학교 제9기 졸업 생이었다. 그후 만주국 장교로 간도 특설 대에서 근무 했다. 이 부대는 간도,

길림, 통화에 출몰 하는 만만항일 세력 토벌에 투입 되었다. 무려 108차례에 걸처 동북 항일

연군팔로군을 공격 했다. 동북 항일 연군은 중국 공산당이 중국인과 조선인을 통합하여

일본군과 싸우려고 만든 연합 전선 이었다. 김일성, 김책, 최현, 최용건등이 동북 항일 연군

에 참여 했다. 이들은 북한의 권력의 핵심이 된다.


정일권은 인천 상륙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육군 참모 총장, 국무 총리등을 역임 한 인물

이다. 그는 1937년 봉천 군관 학교 5기,  일본 육사 55기 졸업 생이다. 일본 만주군 장교

로 임관 되어 헌병 중령 이 되었을 때 해방을 맞 이 했다.  이한림, 원희룡, 최주종, 김동하,

윤태일 등도 만주군 출신 이다. 이들은 해방 후 정일권과 잠시 행동을 같이 했다.


박정희는 5.16 쿠테타를 일으키고 남한의 경제를 살린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대구 사범 졸업 후 교사 노릇을 잠시 했으나, 군인이 되고자 1940년 에 만주 신경 군관 학교

에 입학 하여 1942년에 졸업 했다. 그리고 1944년에 일본 육사를 졸업 했다. 육군 소위로

임관 되어 일본 관동군보병8사단에 배속 되었다. 8 사단은 중국 공산당 팔로 군 토벌이 주

업무 였다. 이 팔로군 가운 데 조선 독립군이 얼마나 있었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박정희가 직접 조선인 토벌에 참여 했다는 증거는 희박 하다.


<결론>

시카고 대학 역사과 과장인 Bruce Cummings는 그의 저서 Korean War에서 만주에서 서로

싸우 던 장군들이 다시 한국 전쟁에서 싸우게 되었다고 주장 했다. 북한측은 동북 항일 연군

과 팔로군에 참여 했던 인물 들이 군 지도자들이 었고 남한 측은 이들을 토벌 하던 일본 군

출신이 군을 이끌 었다. 19세기 세계사의 변동기에 제대로 대처 하지 못한 우리 조상 들의

실책으로 나라를 잃어 버린 민족의 비극은 해방 후에도 계속 되었 던 것이다.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불리워 지는 James Hausman 이 한국군을 만들 때 인사 원칙은 일본군

출신 장교를 선호 하는 것이 었다. 그들은 누구 보다도 군사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인재 였다.

친일 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충성 심이 강 했다. 중국 공산당 군을 상대로 싸웠고

일본이 조선 안의 공산 당 토벌을 철저 이 했기 때문에 반공 정신 또한 강 했을 것으로 짐작 된다.


반면에 독립군 출신의 군인들은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 지식

이 약 했고, 국수주의 자들이 많아 서 미군 말을 잘 듣지 않 았다. 또한 그들은 사상에 개의 치

않 았다. 2차 대전 후 쇠잔 한 영국 으로 부터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 하기 시작 한 미국은

국수주의와 공산주의는 절대로 용납 하지 않 았다.


해방 후 미군정 시기에 소위 친일 인사들이 다수 등용 되었다. 하지 중장은 남한에 진주 하자

마자 전혀 준비 되지 않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무를 수행 해야 했다. 그야 말로 어쩔줄을

모르는 지경 이었다. 빈번 하게 본국에 "통치 병력"을 보내 달라고 S.O.S.를 보냈다. 자기

지휘하에 있는 부대는 전투 병력이지 통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토로 했다. 급기야는 당시

아베 조선 총독을 주저 않지고 일부 일본 병력의 본국 소환을 연기 하며 순사등 친일 인사들이

요직에 등용 되었다.


일제 강점시기 초기에 독립을 위해서 노력 하던 많은 인사들이 말기로 접어 들면 서 일본 정부에

협조 했다. 만주 사변(1931), 중일전쟁 이후 일본 군사 독재 정부는 조선인 일본 동화 정책을

강화 했다. 항일 인사들은 이에 저항 하기가 점차 힘들어 져 갔다. 그리고 일본이 승승 장구 하는

과장 된 보도 만 접 했던 그들은 아마도 조선이 독립 국가가 될 가능성이 희박 하다고 생각 했다.


시대에 따라서 자신이 살길을 찾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조선말기, 일제 강점기, 냉전시대, 남북

분단, 한국전쟁은 어마어마 한 민족의 비극이었다. 하나의 촌부가 처신 하기에 무척 어려운

시기 였다. 오늘의 옳은 길이 내일에는 잘못으로 변 하여 망신 하는 일이 비일 비제 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우등생이 되려고 노력 하여 성공 하면 높은 자리에 오르 게

된다. 시대가 지나서 다른 세상이 되면 새로운 잣대는 과거의 경력을 범죄라고 판정 해왔다.


공산주의 자들은 그 일차 적인 목표가 군주와 귀족 들이 었다. 프로레타리아(평민, 노동자

농민) 혁명을 주장 하는 이들은 입헌군주제인 일본 정부를 위협 했고 많은 조선 인 항일

인사들이 중국 공산당과 코민테른에 연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사회주의 인사

들을 철저히 탄압 했다.


1917년 이후 미국에서는 공산주의는 절대로 용납 할 수 없는 사상 이었다. 아직 노동 자

들에 대한 권리 보장 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 적으로 퍼져 나가는 공산주의 물결은

미국도 예외는 아니 었다.


1949년 장제스가 대만으로 패퇴 하고 중국 대륙이 머우 체퉁에 의해서 공산 화 되었다. 이후

미국은 일본 키우기에 나선다. 패전국인 일본을 억 누르는 정책 에서 일본을 중국에 대적 할

만한 나라로 만들어 서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으려는 정책으로 전환 했다.


친일 인사들은 자연이 반공 의식이 강 했을 것이고 항일 인사들은 반공 의식이 약 했을 것이다.

양 측이 다 그렇다고 는 할 수 없으 나 대체 적인 경향 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정황에 미국이

뛰어 들 게 된다.  물론 항일 보다는 반공이 우선인 미국은 친일 인사를 선호 했다. 더구나

그들은 교육이나 경험이 항일 인사들 보다 대체적으로 높았다고 볼 수 있다.


미군정이 끝난 이후에도 이와 같은 경향은 중국 공산화로 계속 되었다. 그리고 5.16 주체

세력에 많은 만주 군관학교 출신들이 참여 했다.


미군정, 이승만 정권, 군사 정권으로 이어 지는 지속적인 친일 인사 등용은 이들을 중심으로

한 소위 기득권 층이 형성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남한의 보수파 중심 세력을 이루 었다.

보수파는 안보와 반공으로 그 정체성을  확보 했다. 그리고 친일 경력을 대부분 숨겨

왔다.


한국 민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치를 떤다. 친일은 반 애국적인 행위이고 그들이 지도자

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다. 이러한 국민 감정을 십분 이용 한 것이 진보파의 "친일파

논쟁"이다. 정권을 보수 세력으로 부터 빼았는 데는 그들의 친일 경력을 만 천하에 들어 내

놓는 것 보다 효과 적인 것이 없었을 것이다. 친일파 인명 사전 등 그들의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 는 듯 했다. 정조 시대를 제외 한 조선-한국 역사상 아주 보기 드문 진보파가 집권 하

는 데 성공 했다. 그러나 이 또한 겨우 십년 밖에 권력이 지속 되 지 않 았다.


보수파는 진보파의 약점인 "공산주의에 대한 유화 정책"을 공격 하기 시작 했다. 일제시대,

6.25 그리고 해방후의 언행 에서 용공 색체를 발굴 하여 "종북"이라는 굴레를 씨워서

진보파를 격파하는 오묘 한 계략으로 재 집권하게 되었다.


제집권 한 보수파는 최순실 사태 라는 어마아마 한 실수로 진보 파에게 정권을 빼았 긴 것이

지금의 문 제인 정권이라고 볼 수 있다.


민족의 비극 적인 역사는 정치인 들에게 까지 도 전수 되어 그들의 집권 수단으로 이용 되어

왔다. 조선의 멸망, 일제, 분단, 공산주의와 민주의의로 이어 지는 시대의 변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처신을 우왕 좌왕 하게 만 든다. 이러한 과거 경력을 일일이 따지는 일은 그만

하고 사람들의 능력을 중시 해서 사회에 공헌할 기회를 주는 것이 나라의 장래를 위 해서

바람 직 하다고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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