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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6월(영화)과 1980년5월 광주 그리고 미국
01/17/2018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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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When the day comes)


Back in Washington, the events in Kwangju were viewed with fear and loathing. The United States had nearly 40,000 combat troops in South Korea, and these forward-based, nuclear-armed troops were key to the US Cold War strategy of encircling the Soviet Union and China with military bases.

Indeed, just months before, Carter had agreed to reverse his 1976 campaign promise to withdraw US troops from Korea after enormous pressure from conservative lawmakers and the Pentagon concerned about upsetting the US military posture towards North Korea and East Asia. Moreover, South Korea was a symbol to US policy makers of a ideal ally that supported the US in unpopular wars like Vietnam; unlike in many countries, anti-Americanism was virtually unknown. In this context, the armed uprising by ordinary citizens with an unknown agenda was a frightening prospect.

There was another specter haunting US policy: Iran. In the Middle East, just a few days after Park’s Chung Hee’s assassination in Seoul (the event in October 1979 that set off the Korea crisis), radical Islamists loyal to the revolutionary, anti-US government of Ayotollah Khomeni had seized the US Embassy in Teheran. With US policy in the Middle East already in shambles because of the 1978 revolution that toppled the Shah of Iran, the Carter administration was reeling from a crisis of confidence.

Since almost the moment that the dictator Park was felled by a gun wielded by the head of his own CIA, Carter’s aides had been desperately trying to keep the lid on in Korea to prevent it from becoming “another Iran” and creating a truly global crisis for US hegemony.

Yet as Holbrooke and the rest of Carter’s national security team gathered at the White House that day, they knew much of the details of what had happened in Kwangju. The few foreign media in the city had managed to transmit stories of the savage brutality inflicted by the Special Forces on the city’s population, especially its youth.

But none of that seemed to matter: what was important to Carter’s White House was the preservation of US national security interests ? not the democratic impulses of a Korean population sick from 18 years of dictatorship. As the citizens of Kwangju waited for a sign of hope, Carter’s team made a fateful decision: to support Chun’s plan to put down the rebellion by force.

The participants in the May 22 meeting, according to the declassified minutes I later obtained from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included the Deputy Secretary of State, Warren Christopher; Holbrook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East Asia and the Pacific; Brzezinski, national security

advisor; CIA director Admiral Stansfield Turner; Donald Gregg, the NSC’s top intelligence official for Asia and a former CIA Station Chief in Seoul; and U.S. Defense Secretary Harold Brown.

This crack foreign policy team quickly came to a consensus. “The first priority is the restoration of order in Kwangju by the Korean authorities with the minimum use of force necessary without laying the seeds for wide disorders later,” the minutes stated. “Once order is restored, it was agreed we must press the Korean government, and the military in particular, to allow a greater degree of political freedom to evolve.” (scroll down to the bottom of this article to view the declassified minutes of this meeting).

The U.S. position was summed up by Brzezinski: “in the short term support, in the longer term pressure for political evolution.” As for the situation in Kwangju, the group decided that “we have counseled moderation, but have not ruled out the use of force, should the Koreans need to employ it to restore order.” If there was “little loss of life” in the recapture of the city, “we can move quietly to apply pressure for more political evolution,” the officials decided. Once the situation was cleared up, the war cabinet agreed, normal economic ties could move forward ? including an important $600 million Export-Import Bank loan to South Korea to buy American nuclear power equipment and engineering services.

- Tim Shorrock


영화에서 보듯이 1987년6월 항쟁은 박종철군과 이한열군의 희생으로 민주화 운동이 크게

확산 되어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뽑는 헌법을 직접선거를 골자로 하는 헌법으로 개정 하여

제6공화국이 탄생 하였다. 5년 단임 제의 제 6 공화국은 지금 까지 계속 되고 있다.


1980년5월, 광주에서 잔인 무도하게  시민을 학살 한 전두환은 왜 1987년6월 에는 무력을

동원 하여 대모 대를 진압 하지 않 았을 까? 한 마디로 말 하면 미국이 민주 세력을 지지 하느 냐

아니 면 군부에게 힘을 실어 주느 냐에 그 향배가 달려 있었기 때문 이다.


미국은 양자 택일을 하는 데, 안보민주 화의 두 정책을 기준으로 한다. 광주 민주 항쟁 때에는

안보를 6월 항쟁 때에는 민주화에 중점을 두어 서 군부와 민주 세력을 각각 선택 한 것이다.

아이로니칼 하게도 인권을 지나 치리 만큼 앞 세웠던 카터 행정부는 1980년에 안보를 앞 세워

신 군부를 지지 했고 1987년 6월에는 안보를 중요 시 하는 공화당의 레이간 행정부 시절 이었으나

민주 세력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미국의 대외 정책이 대통령의 색갈에 따라 변하지 않고 미 국무부,

펜타곤 등 군부, CIA 등의 관료 들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 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1979년10월,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이 일어 난지 며칠이 안되어 이란 의 미국 대사관이

폭도들에게 점령 되어 미 대사관 인질 사태가 터졌다. 남한은 18년 동안의 박정희 독제에서

벗어나서 민주화를 염원 하는 데모가 전국 적으로 연일 계속 되었다. 12.12 사태로 점철 되는

신군부와 민주 세력의 권력 쟁탈 전은 치열 했다. 이란 사태로 혼이 빠진 카터 정부는 북한의

위협을 받고 있는 남한의 불안한 정국을 하루 빨리 안정 시켜서, 이란 문제에 총력을 기울 일

려고 했다. 미국은 이일을 맏 길 적절 한 인물을 전두환 이라고 믿고 그에게 남한 정국 안정의

임무를 맏 긴 것이다. 그는 미국의 보호 아래 광주 항쟁을 비교적 자유 스럽게 진압 할 수 있었다.


1980년5월22일, 브레진스키를 비롯 한 카터 정부 안보 관계자들의 남한 사태에 대한 회의

의 합의 사항은 향후 7년 동안의 전두환 정부에 대한 미 정부의 태도,  특히 1987년6월의

레이간 행정부의 민주 세력 지지 정책에 대한 원칙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단기 적인 진압과

장기적인 정치적인 진화(민주화)"라고 하는 정책 기조 였다.


레이간은 당선 첯 외국 수반  손님으로 전 두환을 초청 하여,  김대중의 사면을 성사 시키고

그가 미국으로 망명 하게 했다.  와인버거 국방 장관과 전 주한 미대사(CIA지부장) 그레그

가 그일을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기 까지 했다.1987년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한달 후인

1987년2월 Assistant Secretary Gaston Sigur는 영구 적으로 민간 정부에게 이양 할 것을

정식으로 전두환 군사 정권에게 요구 했다. 그리고 만약 이에 저항 하면 미국은 한국을

지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리고 야당을 비롯한 민주 세력과 대화를

할 것을 요구 했다.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여러 가지

공적인 통로 를 통 해서 종용 했다. 전 두환이 데모 대를 진압 할 목적으로 계엄령을

선포 할 려고 하자 미 국무성은 이를 강력히 반대 하는 성명을 발표 했다. 전두환은 계엄령

에 대해서 여러 군 장성들과 상의 했으나 대 다수의 장성 들이 이에 반대 했다. 이들이

미국의 향배를 알 았는 지 의심 스럽다. 손발이 묶인 전두환은 국민들이 원 하는 헌법

개정을 허락 할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이한렬 군이 여자 친구를 초대 하여 동료 들과 같이 외국 기자가 제작 한

광주 항쟁  다큐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미국의 정책 방향을 오해하고 있던 광주 시민

대표들은 사태 수습 중재를 위해서 미국 대사에게 만나자는 서한 을 보 냈다. 그러나

이미 그들 편이 아닌 글라이스틴이 만나 줄리가 없었다. 이러한 미국의 배신(?) 행위는

1987년 6월 학생들 간에 반미 감정을 부추 겼을 것으로 추측 된다. 당시에 성조기를

불 살르는 행위나, 그들이 외친 반미 구호는 이러한 분위기를 잘 말 해 주고 있다.


신군부는1980년에도 광주 시민을 모두 빨갱이 라고 하여, 공수 부대가 데모대는

물론 무고한 시민 들에게도 무차별 사격을 하는 것을 정당화 했다. 1987년에도 군사

독제 정권에 반대 하는 사람들은 모두 빨갱 이라는 프레임에 넣어서 탄압 했다. 보안법

상 공산주의 자는 남한에서 모든 권리를 박탈 당 하는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나

마찬 가지 이다. 박종철은 민주 세력을 공산주의 자로 몰려는 사건을 조작 할려고 억지

자백을 받으려는 경찰 대공 수사반의 고문에 의해서 살해 되었다. 이에 격분한 이한열

군은 데모 하던 중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망 했다.


Reference: The United States and South Korean Democratization; James Fowler

Political Science Quaterly Volume 114 Number 2 1999


반대편을 안보라는 미명 아래 공산주의 자로 몰아서 탄압 하여 권력을 잡는 악날 한

방법은 6월 항쟁 이후 살 아 지는 듯 했으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종북"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서 다시 등장 했었다. 촟불 혁명으로 집권 한 문제인 정권은 "적폐

청산"을 최상의 정책 목표로 정 하고 있다. "빨갱이 프레임"은 적폐중에 적폐라고

생각 한다. 이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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