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ndrive
누리(barndrive)
기타 블로거

Blog Open 05.25.2017

전체     36105
오늘방문     61
오늘댓글     0
오늘 스크랩     0
친구     0 명
  친구 새글
등록된 친구가 없습니다.
  달력
 
중국과 미국; 임진왜란을 떠올리게 하는 한국전쟁, 선조, 이승만, 김일성의 도주행각
07/11/2019 16:01
조회  385   |  추천   6   |  스크랩   0
IP 73.xx.xx.10

막다른 골목에 몰린 김일성 중국에 원조 요청


6.25사변이 일어나기 358년전 선조는 일본군에게 쫒겨서 한양을 버리고 개성, 평양을 거처

 의주로 도망쳤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신을 보내서 명에게 원군을 청했다. 물론 자신의 생명을

 보장 받기 위해서 호시탐탐 명으로 도망갈 기회를 노리기도 했다. 350여년 후인 1950년 

10월1일 박헌영은 김일성의 서신을 가지고 베이징으로 가서 모택통과 주을레에게 중공군을 

보내 줄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주장대로 해방군이 남쪽으로 처들어 가면 

빨치산이 합류하고 민중이 봉기하여 단2-3개월만에 조국통일을 완수 할것이라고 장담했다. 

부산주위의 낙동강유역 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 갔으나 의외로 조속하고 강력한 미군과 

유엔군의 지원으로 그의 꿈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미공군의 철도, 도로, 교량과 군수공장의 

철저한 폭격은 북한의 보급을 완전히 차단 했다. 사상자를 매꾸는 보충병도 보낼 수가 없었다. 

인천상륙 작전으로 보급은 물론 퇴로 까지 차단 되었다. 9.28일에 서울이 수복되고 10월1일 

국군을 선봉으로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김일성은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이승만이 자신은 서울을 빠저나오면서, 국군이 서울을 방어하는 데 문제가 없으니 안심하라고 

하고 한강다리를 폭파한것과 같이 김일성은 평양을 탈출하여 생명을 부지하면서 영토사수 명령

을 내렸다.  10월12일 김일성은 평양을 떠나서 평남덕천 산속에 은신했다. 곧 평북 동창군으로 

옮긴다. 10월18일 중공군 야전사령관 팽덕회가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왔다. 



펑더화이의 초상화

19, 20일에 김일성과 팽덕회는 서로 마주 앉자서 전쟁에 대한 회담을 했다. 속수무책이 된 

김일성은 쏘련에게 원병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미국과의 정면충돌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중국에게 미루었다. 중국 공산당은 쏘련의 도움이 없었으면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 천하를 통치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편전쟁이후 19세기 중반부터 

계속된 전쟁으로 인민의 생활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다. 쏘련의 도움이 절실한 마당에 

스탈린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국공내전이 끝난지 겨우 일년이 지났는 데 또다시 

전쟁을 치룬다는 것은 무리였다. 자연히 많은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모택통과 팽덕회의 

주장으로 파병이 결정되었다. 물론 김일성은 국공내전 동안 군수와 병력을 동원하여 모택통

성심껏 도왔기 때문에 위태로운 시기에 도와달라고 할만했다.  중국은 만약에 북한이 미군

에게 넘어가면 자국의 안보가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을 대외적인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와 같

은 생각은 임진왜란 때나 한국전쟁 때나 다름이 없다. 명은 만약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게 그냥 

두면 일본이 명을 침략할 것이기 때문에 조선에 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북한이 중국과 

미국이 직접 충돌하는 것을 막는 완충작용을 하듯이 당시에도 명은 조선을 일본과의 직접 

충돌을 방지하는 조공국가로 보았다.  중국은 변함 없이 그대로 있고 일본이 미국으로 바뀐 

것이다. 왜냐면 일본이 미국에게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했고 미국은 승전의 전리품으로 일본의 

영토였던 한반도의 반을 지배하게 되었기때문이다. 북한은 대륙세력의 완충작용을 해주고 있

고 남한은 대륙세력이 태평양세력인 일본을 넘볼 수 없게하는 태평양세력에 대한 왼충작용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트루만은 한국파병을 천명하면서 남한은  일본방위에 중요한 지역

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분단은 양 세력의 안보에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다. 

더구나 중국과 미국이 점점 적대관계로 발전하고 있는 요지음의 대륙-태평양세력구도는 한반

도의 분단이 완전에 가까운 발란스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미국과 중국이 한국통일을 원치않는 

이유


              (시사저널 2019.6.27; 김일성의 패주행각 "인민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한다")

이기도 하다

1950년10월20일 김일성과 팽덕회의 회담에서 사실상 전쟁작전권이 주을레-팽덕회로 넘어간 셈이었다

. 공식적으로는 12월에 중공군이 완전한 작적권을 가지게 된다. 그동안에 김일성은 10월25일 창성, 

11웡8일 고산진 산골로 옮겨 다니며 은신 행각을 하게 된다. 그는 압록강 유역을 따라 고산진-강계-만포

를 오가며 부분적인 통치 기능을 유지하고 작전을 지시했다. 북한내의 배반자가 미군에게 김일성의 

은신처를 암호로 알려주고있었다고한다.  


1592년 12월25일 , 김일성이 중공군에게 전시작정권을 넘기기 442년전 일이다. 선조는 의주 

용만관 에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멀고 고난스러운 피난길에 지칠대

로 지처있었다. 나라의 존망과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마당에 상국 장군의 출현은 구세주와 같

은 것이었다. 한양을 떠나면서 백성의 안위는 안중에 없이 죽지안으려고 도망가는 꼴은 이승만, 

김일성과 대동소이 했다.

 그리고 국가의 안보를 외국에게 맏기는 것 또한  닮음꼴이다.  거만하기 짝이없는 이여송은 속국을 

구하기위해서 왔다고 아뢰었다. 그리고 자신이 조선군과 명군을 모두 지휘할것을 선조에게 요구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은 환도 한쌍을 내주었다. 이 칼은 

조선군사지휘권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은 명과 일본의 전쟁이 되었다. 1950년6월27일 

이승만은 한강을 무사히 건너면서 극동군 사령관 맥아터에게 한국군 작전권을 넘겨 주었다. 남한 

국군의 전시작전권은 지금도 미군이 가지고 있다.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중국이 작전권을 가지게 

되어 남, 북한의 전쟁이라기 보다는 중국과 미국의 전쟁이 되었다.  그래서 한국전쟁을 대리전쟁

이라고 한다. 


중공군의 출현과 청천강전투


10월19일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은이 10월25일에서 11월4일 까지 미 8군 오른쪽에 진치

고 있는 한국군 6사단 2연대와 미군 1st Cavalry Division을 온종과 운산에서 공격을받아 미

8군의 오른쪽 허리가 뚤리자 아군은 청천강으로 퇴각했다. 중공군은 곧바로 유엔군을 추격

하지 않고 11월5일에 일단 원위치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중국군이 대규모의 군대를 파병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있던 미군은 유엔군의 방위선을 돌파하고도 한발 물러서는 것을 보

고 더욱 중국군의 규모를 과소평가 했다. 맥아터 사령부는 중공군이 겨우 3만정도라고 판단

하고 모든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중공군 증원을 방지하기위해서 앞록강다리를 폭파했다.

 사실은 무려 18만 대군이 이미 앞록강을 건너서 북한에 들어와 있었다. 동부전선 장진호 쪽

으로 15만명이 진군하고 있었다. 팽두희가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은 아직 5만명이 더 남아있

었다. 팽두희는 11월22일 총공격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한편 맥아터는

만약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오면 미항공기가 발견하여 폭격할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

나 중공군은 낮에는 절대 행군을 하지않고 어두운 밤에만 움직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전까

지 북한전역을 점령하여 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병사들이 집에돌아가 크리스마스 명절을 

보낼 것이라고 장담했다. 11월24일 그 유명한 크리스마스 공격(the Home-by-Christmas 

Offensive)를 명했다. 이 전투의 총지휘관은 Walton Walker 장군이었다.

Image result for 워커장군

병사들은 11월24일 총공격 전날 추수 감사절에 먹는 터키로 저녁을 배불리 먹었다. 그들은 크

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낼수 있고 늦어도 내년봄에는 독일 미군부대로 돌아 간다는 희망에 부풀

어 있었다. 이러한 들뜬 분위기는 병사들의 군기를 문란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투

에 필요한 장비와 무기들을 지참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전투모를 쓰지않고 총검을 장착하지 않은

 체 진격하는 병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겨우 수류탄 한개와 50라운드 이하의 무기를 소지하고 

출발했다. 그리고 전쟁이 오랜동안 계속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한복준비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 


중공군의 전투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일개 부대가 제 빨리 적군을 우회하여 후방을 공격하라. 

도로와 평지를 통해서 공격하지 말라. 그러면 탱크와 대포의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산속의 야간

전투는 정확한 작전계획이있어야하고 각부대간의 연락망이 확실해야한다. 적은 선발대의 공격

후에 피리를 불어라. 그리고 대량의 군대가 줄을 서서 공격하라. 


중공군의 공격은 서에서 동으로 길게 늘어서있는 유엔군 전전선을 동시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름

하여 "인해전술" 그대로 였다. 전전선을 방어하기에 부족한 인원으로 끝없이 공격해 들어오는 

중공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견디기 어려운 겨울 추위는 미군병사들를 더욱 괴롭게 했

다. 당시에 전투에 참가했던 윌리암 켈러 중령은 당시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내가 갈려는 

길 약500야드는 도저히 통과할 수가 없다. 수많은 불에 타고 있는 자동차들, 쌓인 시체들, 부상병

들이 몰려오고, 이들은 뭐든지 바뀌달린 것에 올라 탈려고 하고, 한국군부상병을 내 트레일러에 

싫고 갈려고 하면, 또 부상병이 달려와서 트레일어에 몸을 던지고, 내가 지프차를 움직여 볼라고 

하지만 너무 무거워서 꼼짝도, 하지 않고 .. 할 수 없이 억지로 부상병을 트레일러에서 꺼내 놓고 

출발할 수 밖에 없었다. 


12월2일에 유엔군은 중공군에게 완전히 패배하여 38선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미8군의 

사상자는 만천명이 넘었다. 12월3일, 워커장군은 북한을 포기하고 38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

 했다. 주을레와 맥아터의 싸움은 주을레의 승리로 끝난 셈이다. 낙동강 전선에서 김일성의 적화 

통일 꿈이 깨졌듯이 청천강 전투에서 남한주도의 통일의 기회가 물거품이 되었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장진호전투(The Battle of Chosin Reservoir)는 살인적인 추위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미국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서부전선에서 청천강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중공군 9사단은 

동부전선으로 슬그머니 처들어 갔다. 장진호 근처에 진을치고 있던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Image result for edward almond

휘하의 US X Corps는 갑작스런 중공군의 습격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약3만명의 미군은 살인적

인 추위와 12만명의 중공군을 상대로 11월27일 부터12월13일 까지 필사적인 전투를 벌렸다. 

그들은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고 전투의 목적은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무사히 후퇴하는 것이

었다.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대부분의 부대병력을 보존하고 흥남으로 할 수 있었다.

 


미군은 흥남항 주위에 한국군과 미군으로 방위망을 구축하고 항구밖에서 포격을 감행하여 중공군

의 공격을 맊았다. 항구에는 무려 193척의 배를 동원하여 군대, 장비, 무기와 피난민을 실었다. 

그중에 한척이 유명한 the SS Meredith Victory 호이다. 이 배는 화물선이이어서 12명이상은 

배에 탈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많은 무기와 군수물자가 적제 되어있어서 사람을 태울 수가 없었다. 

밀려오는 피난민을 보고 선장 Leonard LaRueImage result for leonard Larue

는 용단을 내려 실어놓은 화물을 내리게하고 사람을 실었다. 무려 만사천명의 피난민을 승선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12월25일에 부산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 배의 별명은 Ship of Miracle 

이다. 가장 많은 인원을 운반한 배로 기록되고 있다. 이배를 탄 피난민 중에는 문재인 대통령 의 

부모도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함흥 철수 작전을 "the greatest evacuation movement by sea 

in US military history"로 기록하고 있다. 12월24일14:36, 철수작전이 끝난 다음 유엔군은 함흥

 항구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 다음날 중공군이 함흥에 들어 왔다. 


청천강전투와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 지휘하의 유엔군이 패퇴하여 38선 지역으로 이동함으로 서  

북한은 종래의 영토를 회복했고 미국은 한국통일이라는 목표를 포기했다. 살인적인 추위에 떨면서

 이억만리 타향에서 싸우고 있는  모습이 미국내 언론에 의해서 적나나하게 보도되었다.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장병들이 돌아올 것으로 기대했던 미국민들은 패전소식에 크게 실망했

다. 그리고 반전 여론이 비등하게 된다. 지도상에 어디있는 지도 모르는 나라에 가서 싸우다가 다치

고 죽을 이유가 없었다. 집에 갈것으로 잔뜩 부풀었던 장병들은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

과 자신들의 패배에 사기가 땅에 떨어저 전의를 상실했다. 


참고: 시사저널 2019.6.27; 김일성의 패주행각 "인민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겠다"

         매일경제 2013.7.13; (역사의 향기) 임진왜란의 전시작전권  

         위키피디아: 청천강전투, 장진호 전투







이 블로그의 인기글
1 ㆍ 2 ㆍ 3 ㆍ 4 ㆍ 5

중국과 미국; 임진왜란을 떠올리게 하는 한국전쟁, 선조, 이승만, 김일성의 도주행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