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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빼앗긴 카친 주(州)에도 봄은 오고 있는가?
09/17/2015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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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카친 주(州)에도 봄은 오고 있는가? :




무고한  죽음들이 빚은 '침묵의 '


뉴스 & 정보 | News & Info/난민 2012/04/30 14:43 /Blog News 추가게재  2015.08.18


   '생태학 시대의 어머니'라 불리는 레이첼 카슨은 1962년에 출판된 그녀의 기념비 적인 주저 <침묵의 봄>으로 미국인들의 생태주의적 인식을 고취시켰다. 모든 병충 해에 대한 만병통치약이자 문명의 승리로 추앙 받던 DDT의 유해성을 남달리 간파하고 과학적으로 설명한 그녀의 생물학자로서의 수월성도 물론 이 성과를 내는데 주요했으나, 당시 미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 다름 아닌 '침묵의 봄'이라는 짧지만 강한 인상의 어구이였다. DDT가 생물농축을 통해 먹이사슬의 상층부에 있는 새들에게 축적되어, 종국엔 새들의 시체로 덮인 대지 위에서 어떠한 새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침묵의 봄'이 올 것이라는 묵시록적 예언은 언젠가 예레미아가 그랬듯이 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쥐고 뒤흔드 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저희 어필은 언젠가 이 세상에 거대한 충격을 주었던 이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충격마저도 가볍게 뛰어넘는 새로운 '침묵의 봄'과 조우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 각지에서, 비단 비인간 생물종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까닭이다. 그 자리들에는 새 소리를 듣지 못해 당혹스러운 침묵을 느끼는 인간조차도 남아있지 않다. 침묵을 느낄 주체마저도 소거당한 절대침묵의 황량함만이 그 남은 대지를 감싸고 돌고 있을 따름이다.


오늘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 카친주와 그 토착민 카친족() 사람들의 현황이 그와 같다.


(아래에서 이어지는 카친족 소개글은 카친족 난민 출신 한분께서 직접 영문으로 써주신 것을 번역한 것이다.)


아래 글은 2012.04.30 공익법 센타 어필 blog http://www.apil.or.kr/1093에 공개적 으로 올린 것이다.


 

<미얀마 최북쪽 카친(Kachin) 주 위치 지도>


  카친주는 버마(미얀마) 최북단에 있는 주로서, 동쪽으로는 중국과, 북서쪽으로는 인도와 접하고 있고, 북쪽은 티베트, 서쪽으로는 버마의 사가잉(Sagaing)구와, 남쪽으로는 샨(Shan)주와 접하고 있다. 산세가 험준한 지역에 자리잡은 카친주는 귀중한 보석의 원석(특히 세계적으로 제일 유명한 비취옥), , 목재, 광물 등의 자연자원이 풍부합니다. 또 미얀마 젖 줄인 중요한 강들이 이 카친주 지역에서 근원을 이루어 관류하고 있어서, 미얀마 국토 80% 이상의 생계와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


미얀마(버마) 전체의 다수종족은 버마족(Burmese 본래 Bhama) 이지만 미얀마 최 북쪽 카친주 다수종족 곧 주 종족 원주민은 징포족(Jinghpaw People) 이다. 카친이란 용어는 이들 카친 족에서 유래된 것이다. 원래 카친(꺼친)이란 말은 이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고 1830년대에 킨케이드(Rev. Eugeno Kincaid) 선교사가 부른 이름이다. 어느날 선교사가 버마 북쪽지방을 선교 답사차 모공(Mogaung)이라는 지역에 올라 왔을 때 버마 족이 아닌 다른 종족을 만났습니다. 이 때 당신들은 어디에서 살고 있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우리는 까켄에서 왔다고 하니 선교사는 그때 까켄을 Kachin으로 알아듣고 기록한 것이 카친족의 영어식 이름이 되었고 버마어(Burmese)로는 꺼친이 되었다.


카친(Kachin) 이란 말은 현재 카친주에 살고 있는 여러 종족 중 다수종족 곧 주 종족인 징포(Jinghpaw)족을 비롯하여 마루(Maru or Lhao Vo)족, 라왕(Rawang)족, 라칱(Lachit or Lashi) 족, 자이와(Zaiwa or Atsi) 족 그리고 리수(Lisu)족을 합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그래서 카친족은 징포족을 비롯한 6개 종족 연합을 징포어로 Jinghpaw Wunpawng-징포 운뽕(Union, 연합)이라 하고 영어로는 Kachin이라 합니다. 버마어(Burmese) 발음은 꺼친이다. 지금 카친 주(State)는 주로 이들 6개 종족이 많이 살기 때문에 영국 식민지 시대에 이들이 거주하는 땅을 Kachinland, 혹은 Kachin Hills 이라 부르고 문자로 기록했다. 주로 버마 남부와 중부 평원지대에 살면서 거의 대부분 소승불교(Theravada Buddist)를 신봉하는 버마족(Burmese)과는 전혀 다른 종족이다. 카친주에는 카친족 이외 30여개가 넘는 미얀마 소수종족들과 영국 통치 시대와 2차대전 당시 인도와 중국, 네팔등 외부에서 이주 혹은 군인으로 와서 정착한 인도인(주로 힌두족) 네중국인 네팔인 그리고 무슬림등이 거주하고 있다.


카친족이 예전에는 조상신을 믿는 정령신앙 곧 미신의 한 종류인 낫(Nats) 종교를 신봉하다가 1877년 미국 침례교 선교사의 예수 그리스도 복음 전파로 인해 지금은 크리스챤은 대부분 침례교인이다. 또 이들중 징포족은 주몽을 조상으로 섬기는 고구려 민족의 후손 곧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핏줄이다. 유달리 징포-가오리(Jinghpaw-Gauli)족은 주몽이 저들의 조상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운영자 주).


   *카친족을 주종족으로 이루고 사는 카친주는 영국 식민 통치 이전부터 버마(원 명칭 Bhama 혹은 Burman) 족 꼰바웅 왕조의 관할에서 벗어난 별개 자치 독립지역이었다. 1885년 꼰바웅 왕조는 영국과 3차 전쟁에서 완전히 폐망하고 버마 족 마지막 왕 티보(Thibo)는 인도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버마(빠마) 족 관활 지역만 영국 식민지로서 인도India의 한 주로 편입시켜 버마 주로 통치 하다가, 그 후 1937년 영국령 버마 (British Burma)란 이름으로 영국 인도(British India)에서 분활시켜 직활 식민지로 통치했다. 이 당시에도 카친 주는 영국 관활의 완전 자치 지역으로서 Kachin Hills 이라 불렸다. 그후 1942년-45년까지 일본의 점령기를 거처 다시 영국 통치하에 들어갔다가 1948년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버마 족 지역 British Burmar가 버마(Burma)라는 이름으로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고 카친 족 거주 지역 카친 힐스 (Kachin Hills) 는 완전 독립 자치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 이전 1947 2월12일에 아웅 산(Aung San) 장군의 주도 하에 샨(Shan) 족 지역 빵롱(Pang Long)에서 영국에서 독립하게 되면 버마(Bhama) 족을 비롯하여 카친(Kachin) 족, 샨(Shan) 족, 친(Chin) 족이 완전 자치주로 운영키로 다.


    그후 서로 연합하여 민주 공화국 형태의 연방 국가를 만들자고 사전 의논 한후 문서에 합의 서명하고 1948년 1월 4일 독립하여 버마 연방(The Union of Burma, 일명 버마)을 탄생시켰다. 단 조건은 자치주가 자주 독립할 경우 언제든지 탈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1962년 네 윈(Ne Win) 장군의 군사 구테타로 버마의 7개 소수민족 자치주의 모든 자치권을 박탈하고 군부가 일당 독재로 통치하기 시작 하면서 카친 족 독립군(KIA) 등 소수민족 무장단체가 형성되어 차치권을 회복하기 위해 버마족 정부군과 소수민족 20개 이상의 무장단체와 지금까지 55년간 종족 전쟁(내전)을 하고 있다. 1988년 부터는 신 군부가 재 집권하면서 행정 구역을 개편하고 버마 족(Burmese) 불교도 중심으로 소수민족 차별 정책을 만들어 모든 분야에서 버마족 우선주의로 통치하고 있다. 그 중 기독교가 다수인 소수민족 카친(Kachin)족, 카렌(Karen)족, 친(Chin)족에 대한 핍팍과 탄압은 도를 넘어서 지금은 이들 종족 기독교 말살 정책을 펴고있다(편집자 주).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카친주 지도


현재 미얀마 지도와 카친주 위치(한글)



2008년도 미얀마 군사정부 인구조사 행정지도




 

<카친의 6개 종족<6 tribes> Jinghpaw, Maru, Rawang, Lisu, Lachid, Zaiwa의 전통 의상>


  카친족은 몽골-티벳 혈통으로 분류되며, 카친족 대부분은 미얀마 카친주와 미얀마 북부의 샨 주(Shan State)에 거주하고 있다. 카친족은 여섯 갈래의 종족 연합(Jinghpaw Wunpawng)으로 징포 Jinghpaw, 마루Maru 혹은 라워[Lhao Vo], 라왕 Rawang, 리수 Lisu, 라칟 Lachid 혹은 라쉬 Lashi, 앝시 Atsi 혹은 자이와 Zaiwa족들이 있다. 오늘날 카친족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국내.외 총 숫자는 약 138-1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카친족은 인종적으로는 몽골-티벹 혈통이라 하고, 언어학적으로는 Sino-Tibet어 계라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정확한 사료는 카친족 중 징포-가우리 Jinghpaw-Gauri or Cowrie)족은 우리 고구려가 AD 668년 당나라에 패하고 포로(유민)로 끌러간 주몽의 후손인 고구려인이다. 이 징포 카친족 Jinghpaw-Kachin 족 중 징포-가우리 Jinghpaw-Gauri or Cowrie 부족은 옛적 고구려 풍습과 전통, 관습, 음식, 복장을 그대로 간직하고면서 고구려의 기상과 얼을 이어가고 있다. 카친주에는 곳곳에 고구려촌 Gauri Village 가 산재하고 이름도 가오리 성을 사용하는 씨족이 있고 이씨는 Marip, 김씨는 Chyin Yu, 양씨는 Maran 등으로 개명하여 사용하고 있다. 곳곳에 고인돌이 산재해 있고 여인네들이 사용하는 농사 장비나 생활 소품들은 우리 한국 농촌 할머니나 아낙네가 사용하는 도구와 거의 같다. 예를 들면 소쿠리, 바구니, 절구, 맷돌, 들채, 멍석 등이다. 이들은 고구려가 668년 보장왕 때 대당大唐 전쟁에 패한 후 고구려가 멸망하고 전쟁으로 패한 전리품으로 수십만 가호의 고구려 사람들을 당나라에 노예로 끌고 갔다.이 때 끌러간 노예(일명 유민)로 끌려간 고구려 장수 중 한사람인 고사계란 인물이 있었다. 이 고사계의 한 아들이 장성하여 당나라의 장수가 되었는데 그 이름이 고선지 장군이다. 이 고선지가 당나라 장수로서 토번(티벹)을 정벌할 당시 오늘날 사천성 성도 서북쪽 청해성 가까운 하서, 농우지역에 강제로 소개시킨 고구려 유민의 모아 다시 고구려 부대를 만들었다. 고선지가 7차에 걸쳐 토번(티벹)을 정벌하고, 8차 오늘날 중앙 아시아를 정벌하러 가서 파미르 전투에서 패한 후 고선지 장군은 다시 당나라 수도 장안(오늘날 시안)으로 소환 당해 얼마 후 참수를 당했다. 그후 고구려 군사들은 당나라 한족들의 보복을 피하여 개별적으로 큰 강줄기 (오늘날 중국의 금사 Jinsha강-양자 Yangtze강 혹은 장강Jangjiang, 중국 노 Nu 강 - 미얀마 샬윈 Shalwin 강, 중국 란찬 Lanchang 강- 동남아 메콩Mekong강 또는 인도 부라흐마뿌드라 Burahmaputra강) 그리고 미얀마 최북쪽 상류 이라워띠 강을 타고 기후 좋고 따뜻한 남쪽지방으로 내려오면서 흩어져서 생명을 건진후 다시 곳에서 무리를 지어 종족을 이루었는데 바로 그들중 한 종족이 우리 한민족 韓民族의 핏줄 카친족이다. 그리고 미얀마 카친주에 사는 원주민을 카친족이라 부르는데 카친족으로 숫자가 가장 많은 징포족을 중심으로한 6개 종족의 연합 종족을 일컫는 종족이름이다. 카친주의 6개 종족은 가각 자기 고유언어를 사용하면서 카친주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징포어 (일명 카친어)이다. 그래서 징포어는 일명 가우리어 곧 고구려어라 부른다(편집자 주).


 


 


< 카친 족의  Manaw (Ma-Nau) Dane 전통 축제 사진들>


미얀마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다민족 국가들 가운데 하나이다. 6,000만 명의 사람들이 미얀마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135개 민족들 가운데 하나의 구성원이며, 버마어를 사용하는 소승불교도 버마 족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버마 족으로 분류되지 않는 소수민족들은 대개 산악지대에 살며, 전통적으로 저지대 및 버마 본토 중심부에 살아온 버마 족과는 문화적, 언어적으로 뚜렷이 구별된다. 버마족이 아닌 소수민족들이 인구 전체의 약 40%를 차지하며, 전 국토의 56%에 거주하고 있다. 카친족의 주된 종교는 기독교인들로 대부분 침례교인이다. 2017년 6월 현재까지도 미얀마 버마족 불교도 정부군과 카친족 독립군(Kachin Independent Army-KIA)과 전쟁(내전)을 하고있다. 이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버마족 정부군과 계속적인 평화회담을 가지나 별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미얀마는 지금 20개 이상의 크고 작은 소수민족 무장단체 독립군(Minority Armed Group)이 형성되어 미얀마 버마족 정부군과 대치면서 전쟁(내전)을 하고 있다.


 *1988년에 버마 불교공화국으로 선포할려다가 198888일 8시 기점으로 항쟁(일명 8888 민주항쟁)하여 수많은 백성과 학생들과 외국인 기자들까지도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었다. 그후 수많은 민주인사와 학생들은 세계적으로 가혹하기로 유명한 인센Insen 감옥에 투옥되었다. 모든 대학은 폐쇠되고 분해되고 또 아시아인으로 UN 최초의 사무총장을 지낸 U Thant(우 탄트)의 랑군대학교 (현재 양곤대학교) 내 묘지는 파 해쳐저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 후 1992년에 군부가 이런 오명을 지우기 위해 하루 아침에 나라 이름(국명)을 버마Burmar에서 미얀마Myanmar란 이름으로 바꾸었다. 미얀마Myanmar는 나라 이름이고, 지금은 버마어Burmese를 사용하는 버마족 불교도가 통치하는 군사독재 사회주의 국가이다.


 미얀마에는 미얀마어와 미얀마족은 없다. 미얀마는 무늬만 연방 공화국 (The 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이고 7개 소수민족 자치주 차치권은 군부가 박탈해 버렸다. 미얀마 종교는 오직 버마족만 거의 99% 불교도라고 할 수 있지만 미얀마는 불교국교가 아니다. 불교는 다수종족인 버마족(버마어로 Bamar족) 종교이다. 135개 소수종족들은 각각 다른 종교인 불교, 기독교, 천주교, 마호멭교(이슬람), 힌두교와 정령신앙(미신), 조상신앙등 오랜 전통종교를 신봉한다. 그리고 122개의 각각 소수종족 고유 언어를 사용하면서 미얀마 전국 공용어는 버마어Burmese를 사용하는 다 민족, 다 언어, 다 종교 국가이다. 그리나 미얀마는 전국적으로 사유재산 제도를 실시하지만, 외국인에게는 버마족 연방 관활지역을 제외한 7개 소수종족 자치주(현재 명목적) 지역은 원칙적으로 정부의 허가를 받아 여행하고 정부지정 숙소에 유숙할 수 있기 때문에 여행의 자유와 거주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편집자 주).


버마 내의 정치적, 민족적 분쟁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946년에 버마의 정치 지도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3년간 점령했던 잠시를 제외하고는 1924 년부터 줄곧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버마(미얀마)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였던 아웅 산(Aung San, 민족민주동맹NLD 지도자 아웅 산 수찌 Aung San Suu Kyi의 부친)은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소수민족 집단들을 미래로 향하는 정치과정에 포함시키려 노력했다. 카친족은 친(Chin), (Shan)족과 함께 아웅 산이 기획한 빵롱회담 (Panglong Conference)에 참여하여, 1947 2 12일에 빵롱 협약Panglong Agreement에 서명 하는데에 동의했다. 이 협약은 소수민족 주(State)의 국가연합을 설립하여 해당 주에 대한 해당 소수민족들의 자치권을 부여할 것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47 9월에 빵롱 협약이 공포된 이후 이 민주적인 지적 흐름을 이어 받아 초안이 작성된 바 있는 1947년의 헌법 또한 소수 민족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였다. 그러나 빵롱 협약의 정신과 내용은 전혀 현실화 되지 못했다. 이상의 공적 차원 에서의 협약, 입법 노력들의 실패, 그리고 1947 7 19일에 아웅 산과 그의 여섯 각료들이 암살된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민간 차원에서의 원초적 무력 분쟁이 촉발되었다.


    버마는 1948 1월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독립하자마자 무장한 소수민족 집단과 독립 미얀마 버마족 군사 정부군 간의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소수민족 반군의 목적은 자치권, 분리 독립, 연방 민주주의 실현, 미얀마 내에서의 권리 증진 등으로 매우 다양했다. 1962년의 군사정권 쿠데타 이후 약 55년간 이어진 무력 군사 통치에 의해 탈진하여 굴한 국내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이 휴전 협약에 서명하여 지금까지 휴전 이 유지되어 오고 있지만, 일부 분쟁들은 되살아나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되고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카친주에서 벌어지는 카친족의 처절한 독립 투쟁입니다.


카친주 내 무력 분쟁과 미얀마 정부군의 잔학한 박해: 1961-1994


   카친족은 지난 반세기 동안 최소 34년 이상을 무력 분쟁과 함께 보냈다(약 17년간은 휴전시대). 1961년 부터 카친 독립주의자들은 버마(미얀마) 정계의 지배 야욕이 심화되는 것에 대응하여 버마 군사정부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카친 독립군(KIA, Kachin Independent Army)은 현재 미얀마 전체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소수민족 군사집단이다. 카친 독립군의 정당인 카친 독립기구(KIO, Kachin Independent Organization)는 민간 행정부를 설치하여 넓은 지역을 통치하고 있으며, 보건부, 교육부, 사법부, 문화부, 구호 개발부 및 기타 도시개발 프로그램들을 통해 완벽한 주 정부State Government나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1994 2 24, 카친 독립 자치정부KIO와 미얀마 불교도 군사정부는 카친주 주도(州都)인 미찌나(Myitkyina)에서 휴전 협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협약은 KIO에게 카친주 내 특별 구역에서의 정치적 자치권을 허용하였다. 이 협약은 미얀마 버마족 정부군과 카친족 자치 정부 당국이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법률적 유대 관계를 가지고 나아갈 것도 요구했다. 천연자원 개발의 극적인 증가, 지역 내 인도적 지원과 개발 확대 등도 포함되었다. KIO와 미얀마 버마족 군사정부는 카친족 자치정부KIO 만이 다스리는 지역과 미얀마 군부 만이 다스리는 지역을 설치하는데에 협의하였고, 분배하고 남은 지역들은 공동구역으로 두었다.


1994년의 휴전 협약은 공식적인 전투상황을 종결짓는데엔 나름 효과적이었으나, 쌍방의 자발적 평화 협약은 결코 아니었던 까닭에, 미얀마 버마족 군사정부군의 인권 침해, 강제 노역 부과, 여성 성폭행, 강간, 살인, 토지 몰수, 재산 약탈 등의 폭압을 막아주진 못했다.


 카친족들은 1994년 휴전 이전에도, 이후에도, 미얀마 버마족 정부군에 의해 폭력적 강제 노동, 고문, 살인, 성폭행, 재산 파괴, 토지 몰수 등을 당해온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카친 족들은 미얀마 정부군의 직접적 박해에도 노출되어 있지만 미얀마 국가 전반에 널리 퍼진 인종적 차별과 종교적 차별에도 취약하다. 많은 카친족 마을들이 1970-80년대, 90년대 초에 미얀마 정부군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1991년에 미얀마 버마족 정부군은 카친 독립군(KIA)에 맞서는 캠페인을 더욱 강화하였다. 미얀마 정부군은 KIA와 연관된 것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많은 카친 족 민간인들을 집도, 식량도 없이 미얀마 정부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통에 많은 어린아이들이 제대로 식품과 의복을 공급받거나 수면을 취하지 못해 사망하였다. 즉결 처형, 강간, 고문, 강제노동, 재산 파괴 등의 폭력도 당연하다는 듯이 강제이주에 수반 되었다. 1994년까지 약 6만 명의 카친 족 사람들이 본래 살고 있던 카친 주와 북부 샨 주의 삶의 터전으로부터 쫓겨났다. 2만 명은 중국으로, 4천 명은 인도로 피난 하였습니다. UN난민기구, 국제 적십자위원회 등 국제 구호 기구들의 도움이 절실하였으나, 미얀마 정부는 당시 카친 주의 국경 어디에서도 국제 구호기구와 NGO들이 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러한 폭력들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상의 비극적 사례들은 우리 앞에 놓여있는 민족적 화합과 인권의 진전을 추구하기 위한 새로운 세대의 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미얀마 정부군의 고질적인 폭력 병폐는 왜 충돌발생지역 부근의 카친족 마을 사람들이 즉각 카친 독립 정부(KIO) 산하의 지역들과 중국으로 피난하였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그들은 미얀마 정부군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2011년 미얀마 군사 정부군의 휴전협정 파기 및 무력침탈 재개에 대한 저항의 직접적 계기


2008년에 미얀마 군사정부는 휴전 협약을 체결한 모든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이 2008년 헌법에 명시된 바에 따라 미얀마 정부군 직할통제 하의 국경수비대(BGF)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공포했다. KIO는 민족간 긴장 및 분쟁의 원인에 대한 제대로 된 정치적 해결없이는 그들의 독립군 조직을 미얀마 정부군 산하 국경수비대로 편제할 수 없다며 이 공포 내용을 이행할 것을 거부하였다.


긴장감이 계속된 지 몇 달이 지난 2010 10, 미얀마 당국은 카친 주 모닌 (Mohnyin) 군구 내 KIA 연락사무소를 급습하여 두 명의 KIA 고위관리를 체포 및 구금하였고, 카친 족은 이를 도발행위로 받아들였습니다. 며칠 후, 1994년 이후로는 처음으로 미얀마 국영 언론들이 KIA를 휴전 중인 무장단체라 칭하지 않고 군사정부에 대한 반란군(일명 반군)이라 규정지었다.


카친족도 2010 11월로 계획된 총선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정부는 카친 족의 정당 등록이나 무소속 입후보 등록을 막았다. 그리고 투표용지에서 친 KIO 후보들을 삭제하였습니다. 사실상 KIO 집권 지역에 거주하는 수많은 카친 족 사람들의 투표권을 박탈한 셈이다.


이 총선은 미얀마에서는 20년 만에 처음 있었던 것으로, 2008년의 헌법 총선거 규정을 따랐다. 헌법은 전체의석의 25%를 군대에 할당하여 군사정권의 통치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 2010 11 7일에 치러진 총선은 선전과 달리, 자유롭지도, 공평하지도 않았으며, , 현직 군 인사들이 지배하는 정부의 저열하면서도 세련된 시작을 알렸다. 신 정부는 2011 3월에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재개된 무력분쟁: 2011 6월에서 현재까지


버마정부는 2011 6 9일에 카친주에 대한 군사작전을 시작함으로써 17년간 지속되어 온 휴전협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2011 6 8, KIA는 휴전 협약에 반하여 무장한 채 사전 통보 없이 KIO의 구역에 들어온 세 명의 미얀마 군인들을 구금하였다. 다음 날 새벽 3, 미얀마 정부군 제437 대대와 제438대대가 상강(Sang Gang) 부근에 자리잡고 있던 소규모 KIA 파견대를 공격 하였다. KIA 군인 창 잉(Chang Ying, 31)에게 발포하고 그를 포로로 잡았다.


6 10일에는 KIA와 미얀마 정부군 북부 사령부가 포로교환 협약을 맺었다.


구금되었던 미얀마 군인들은 창 잉과 교환되기로 되어 있었다. KIA는 일전에 휴전협정 위반 혐의로 구금해두었던 두 명의 미얀마 정부군 군인을 미얀마 정부군 부대에 넘겨주었으나, 미얀마 정부군은 창 잉의 무기와 소지품들만 돌려주고 창 잉은 돌려주지 않았다. 6 11일에야 창 잉의 시신을 KIA에 넘겨준 미얀마 정부군은 그가 전투에서 생긴 상처로 인해 죽었다고 주장했다.


KIA는 창잉의 시신에 고문의 흔적이 있었음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고문 의혹 일 수밖에 없는 사진들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와 카친 주 내에 널리 퍼졌다. 이 초기 사건 이후 무력충돌은 급격하게 격앙되었다. KIA는 적군의 보급 로를 막기 위해 몇몇 교량들을 파괴하였고, 또 그들의 구역 주변에 살상용 지뢰를 심으며 방어태세를 갖췄다미얀마 정부군은 마침내 대공세를 취했다. KIA 군부대가 순찰하는 지역에 지뢰를 심고, 그 지역에 몇몇 대대를 추가로 파병하였다. 카친 독립군은 미얀마 정부군에게 매복 공격을 가했다. 미얀마 정부군은 오랫 동안 카친 독립군이 통치해온 북부 샨 Shan 주 카친족 거주지역 내 KIA 근거지 포위를 시도하였다.


   독립 시키기엔 너무 중요한 '미얀마의 심장' - 북부 미얀마의 주요 에너지 인프라  프로젝트들


카친주는 수익성 있는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미얀마와 중국의 민간 및 국영기업들이 옥, 구리, 철광석, 석탄 및 수목 등 각종 천연자원들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카친 주 내에는 중국측의 대규모 농업자본투자도 유입되어있다. 이렇듯 많은 북부 미얀마 내 자본 투자 프로젝트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이슈가 되는 건 바로 카친주 내 분쟁 지역과 샨 주 북부에 입지할 수력발전용 댐들과 추후 설비될 석유-가스(shwe-gas) 이중 파이프라인 등의 에너지 기반시설들이다.


타핑(Taping) 수력발전 댐 1


완전히 작동하는 타핑(Taping) 1호 수력발전 댐과 그 인근에 입지하기로 계획된 제2호 수력발전 댐은 카친  주를 관류하는 타핑 강에 자리잡고 댐 건설은 2007년에 시작되었다. 타핑 1호는 2011 2월에 전력 생산을 시작했지만, 2011 6월에 미얀마 정부군이 댐 부지 근처의 상 강(Sang Gang)과 붐 센(Bum Sen) 마을의 KIA 점령구역을 공격한 이후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미얀마 정부 통제 하의 국영 언론은 미얀마 정부군의 2011년 공격이 해당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수력발전 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함이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응하여 KIO는 수력발전용 댐은 단 한 번도 위험에 처한 적이 없었다고 밝혔으며, 카친 족은 [카친 족의 사전 동의나 협력 없이 진행되어 온] 일련 댐 건설 프로젝트들의 진전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도 밝혔다. 2009 2, 미얀마 정부군은 댐 근처 구역에 자리 잡은 KIA의 지역 기지들을 파괴했고, KIA는 이를 재빨리 재건하였다. 또한 KIO는 에너지운영다국적기업과 미얀마 정부로 하여금 사전에 KIO나 지역 사회의 승인을 얻어야만 KIO의 구역에 댐을 건설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방침을 정했다.


밋손(Myitsone) 수력 발전용 댐


  밋손(Myitsone) 댐은 중국 주동의 카친주 내 3개 강에 걸쳐 설치되도록 설계된 몇 십 억 달러 규모의 7대 수력 발전용 댐들 중 가장 큰 규모의 댐이다, 이 프로젝트 때문에 본래 살던 지역에서 쫓겨나 미얀마 정부에 의해 강제 이주하게 된 지역 주민들의 댐에 대한 증오와 반대를 한몸에 담는 상징적 존재로 자리 매김 하였다. 해당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은 환경 훼손 및 사회적 악영향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제시되었던 댐 건설 계획안엔 자신들의 자리가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댐 건설 취소를 주장했었다.


기만적인 민주화 Idol 아웅 산 수찌 Daw Aung San Suu Kyi


 

         <카친 전통 복식을 갖춘 아웅 수찌(Aung San Suu Kyi) 여사>

          Aung San Suu Kyi 어머니는 카렌족 기독교 아버지는 버마족 불교이다.

             그리고 그녀의 조부는 친(Chin) 족, 조모는 버마 족이다


아웅 산 수찌와 그녀의 전국민주연맹NLD측 인사들이 의석을 얻은 최근의 미얀마 총선거는 서방국가들의 군사정권에 대한 제재 완화 및 지지 재개로 이어졌다. 이것은 큰 실수였다. 이 총 선거는 실권 없는 정부 내의, 그것도 몇 안 되는 의석들이 걸린 선거에 불과했다. 미얀마 군사정부가 반대측과 국제사회에 협조하는 시늉을 낸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국가들은 군사정권이 국가 전체에 대해 계속 자행해오던 '비즈니스'를 이어가도록 용인하고 있다.


최근, '비즈니스'에는 미얀마의 최북단의 카친 소수민족 구성원들에게 재차 폭력을 가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2011 6 9, 미얀마 정부군은 지난 50년간 대부분의 카친 주 지역을 통치해온 KIO에 군사공격을 시작하였다. 수적으로 매우 열세인 KIO 군대는 카친 족의 최중심지역으로 후퇴해야만 했고, 이에 따라 많은 카친족 마을들이 미얀마 버마족 정부군의 위협에 노출되고 말았다.


최근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와치(Human Rights Watch)가 발행한 83장 분량에 달하는 대형 보고서는 미얀마 정부군이 카친족 민간인들을 조직적으로 죽이고 고문했으며, 여성들을 강간하고 집들을 불태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권을 위한 의사회(Physicians for Human Rights)2011 6월과 9월 사이에 미얀마 정부군이 민간인들로부터 식량을 약탈하고, 무차별적으로 마을에 발포했으며, [착탄] 공격을 하겠다며 마을들을 위협했고, 민간인을 짐꾼 및 인간 지뢰제거기로 이용했음을 밝혔다. 7 5천명에 달하는 난민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현재 주로 KIO 통치 하에 있는 구역의 난민 수용소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2018년 현재가 7년간의 전쟁(내전)으로 인해 17만여명의 전쟁(내전) 난민과 170여개의 난민촌 IDP/ Refugee Camp 에 살고 있는 카친족은 전쟁(내전) 속히 끝나고 평화가 깃들어 하루속히 자기들의 삶의 터전이 있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날마다 카친 족의 하늘은 포격 소리와 타오르는 가옥들의 연기로 얼룩졌다. 카친 족의 땅은 부상당한 카친 족 군인들과 난민들로 넘쳐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과 오바마 대통령의 상찬을 위한 방문으로 야기한 미얀마의 소위 '정치적 자유로의 변화'에 대한 대화들이 끊임없이 오고 간 와중에도 카친주 내에서 자행되어 온 미얀마 정부의 조직적 폭력은 별 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 원인의 일부는 바로 적합하지 못한 용어 사용에 있다고 생각한다. [편자 주: 스탈린도 일찍이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고 혁명을 완수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용어를 장악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 세계 대부분의 미디어 매체들이 미얀마 정부가 카친족 사람들의 대표기구인 KIA/KIO반군, 반정부적 무장단체라 규정짓는 작태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


카친족은 그들의 땅을 뺏고, 그들의 가족을 강간하고 죽이려 하는 미얀마 버마족 정부군에 맞서 싸우고 있다. 그러한 위해들에 대해 목숨바쳐 저항하지 않을 이가 세상 천지의 어디에 있겠습니까? 게다가 카친 족 사람들은 많은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투쟁 해서 얻으려는 더 나은 조건은 그저 미얀마 정부군이 1994년의 휴전 협약에서 동의했던 선으로 다시 물러나주는 것에 지나지 않다.


지난 50년간, KIA/KIO 1962년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과 미얀마 정부군으로부터 카친 주 일부 지역을 보호해왔다. 그러나 미얀마 현 버마족 불교도 정부는 카친주의 수익성 높은 광물들과 활엽수림, 잠재적인 수력발전 및 파이프라인 부지들, 그리고 중국과의 자유로운 왕래를 얻어낼 야욕으로 가득 차 있다.


세계인들의 미얀마 카친주 내부 사정에 대한 무지와 그로 인한 용어 사용의 부적실성, 그리고 카친주에 걸려있는 근대화 이후 미얀마의 미래와 엄청난 이권이 미얀마 정권으로 하여금 그토록 잔학한 억압 조치들마저도 지속적으로 감수하도록 만들어 왔던 것이다. 이제 전 세계의 국제 커뮤니티가 미얀마 카친주와 카친족에 대해 올바르게 알아야만 한다. 카친 족의 KIA/KIO는 반란군이 아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성공적으로 자치를 실현해 온, 물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자치 독립집단이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미얀마의 정치 외교적 성취와 미얀마가 민주화로 나아가는 도정 상에서 처한 위치를 작디 작은 일회성 선거와 전적으로 연결시켜서 이해하는 우를 범해선 아니될 것이다. 진정으로 인권과 민주주의, 인류애와 보다 나은 국제사회를 실현코자 한다면, 미얀마 군사정권이 즉시 그들의 군대를 카친 족의 관습적 주권이 존재하는 카친 주에서 물러나게 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민간 국제지원 단체들의 구호와 지원이 절망적인 현실에 처한 난민 수용소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Insurgencies come and insurgencies go. But ethnic cleansing lasts forever. 국내 반란은 이따금 일어나고, 또 잠잠해 진다, 하지만 민족 청소, 대량학살의 상흔은 영원히 남는다.


  카친족이 처한 비극은 명백히 반란 정도에 그치지 않는 후자, 민족 청소(ethnic cleansing) 이. 그 상흔이 이미 너무도 많이 축적되었다. 인간의 죄라는 이름의 상흔이, 언젠가 레이첼 카슨이 생물학적으로 분석했던 DDT처럼 누적되다가, 이번엔 새 소리 대신 인간 양심의 소리가 멎을까봐 두렵다. 더 이상은 상흔이 쌓이지 않고, 늦어도 내년 봄엔, 카친주에도 재가 눈처럼 내리고 불길이 벚꽃처럼 흐드러지는 전화(戰火) '침묵의 봄' 대신, 아이들의 웃음 소리와 아름다운 새 소리가 피어나는 진정한 봄이 찾아올 수 있기를 소망한다.


(3기 인턴 강태승 편집 및 작성)


    *또한 최근 2018년도 8월 부터는 미얀마 서남부쪽 벵갈만 Gulf of Bengal 을 앞바다로 끼고 있는 라카인주 Rakhine State 와 방글라데시 Bangladesh 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해변가 지역은 거의 대부분 무슬림을 신봉하는 로힝자(야) Rohingya 족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곳에서 인종학살 Genocide 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본래는 미얀마 버마족 정부군 군사작전 계획은 최북쪽 카친족을 말살하기 위해 중국 서남부 운남성과 카친주 국경지역을 시작하여 카친족 거주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전면 대공세 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미얀마 정부군은 전면 대공세 작전을 변경하여 인도양 벵갈만 The Gulf of Bengal 을 끼고 있는 라카인주와 방글라데시 국경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로힝자(야) 대상으로 대 공세를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또 언제 화살이 카친족 쪽으로 날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금년 여름에도 버마족 정부군이 러시아제 미그기로 카친족 마을을 무차별 폭격하였다 (지난날은 중국제 아파치 무장 헬기로 폭격했는데 불발탄 폭탄으로 미그 폭격기로 대체함). 로힝자(야)의 인종학살은 바로 카친족의 인종학살인 동시 미얀마 소수민족을 겨냥한 인종학살이기 때문이다. 지난 57년간의 카친족을 비롯한 미얀마 내 소수민족 탄압과 핍박 그리고 강간 학살등으로 저질은 죄악은 그동안 외부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잘 모른다. 이와같은 사실이 미얀마의 비극이다. 같은 나라 자기 백성을 힘이 나약하고 권력이 없는 소수민족들을 총 칼로 죽이고 강간하고 가옥을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하고 버마족은 1등 국민이고 소수민족은 2등 국민으로 인종차별 것이 오늘날 미얀마 현실이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로힝자(야) 족 인구는 대략 80만-90만명 정도가 되는데 먼저 이곳 인종학살의 시초는 로힝자(야) 족으로 구성된 로힝자 救援軍이 마웅도 마을 Maungdaw Village에서 버마족 정부군인이로힝자 족을 탄압하고 강간한데 대한 원한으로 파출소를 습격한 사건을 빌미로 삼아 구원군을 수색한다는 목적으로 동네 가옥을 불을 지르면서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3개월 동안에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쳐서 최근에 UN 조사결과 민간인을 무려 3만여명 이상 학살하고, 70여만명 이상은 국경선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피난을 가서 지금까지 정든 땅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벵골만 치타공 Chittagong 하구河口 삼각주三角洲 지역에 UN과 전 세계 각국 국제난민 구호기관에서 임시 거주지로 천막 Tent 을 지어준 난민촌 Refugee Camp을 이루어 살고 있다. 그러나 미얀마 군부와  민간 정부 실질적인 지도자격인 아웅 산 수찌 Aung San Suu Kyi 도 이 모든 사건은 정당 방위이며 아무런 잘못이 없고 UN 인권위원회에서 조사 작성한 보고서 내용은 모두 진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래서 UN 인권위원회는 군부 최고위지도자들과 해당 지역 정부군 책임자들을 국제형사재판소 ICC에 제소하여 인종학살 범죄자로 제소하는데 UN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와 중국의 계속적인 반대에 부닥치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미얀마 정부는 국경을 넘어간 난민들에게 미얀마 국적 신분이 확인된 자에게 고국으로 돌아와서 거주할 수 있는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고 있으니 신청하라고 안내하지만 아직까지 한 가족도 신청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왜냐하면 로힝자(야) 족들이 거주했던 정든 고향 땅은 이미 미얀마 군부가 부르도자로 흔적도 없이 다 밀어버리고 (없애버리고) 거대한 주택단지가 아니라 사방으로 철책을 처놓고 군 부대가 아닌 거대한 군사 기지인 비행장을 만들고 있는 것이 인공 위성으로 촬영되어 전 세계에 공개되었다. 그래서 그들도 이 소식을 들어서 다시 정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뿐 아니라, 돌아간다고 해도 새로운 정착촌은 또 다른 인종 범죄 집단으로 취급하는 감옥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두 거절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면에는 전 세계를 재패하고자 하는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미얀마 버마족 군부와 정부를 이용하여 인도양을 헤험쳐서 바다를 육지같이 다니고 중동과 아프리카 대륙을 저들의 손아귀에 넣고자 인도와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공중 제공권을 확보하기 위한 치밀하게 계획한 작전이었다.


   이제 그들은 이미 바로 이 지역 바로 앞바다 시트웨 Sittwe 항구를 몇 년전에 99년간 조차하였고, 조금더 아래 남쪽 라카인주의 제일 큰 섬의 짜욱뿌 Kyaukpyu 지역을 조차하여 일반 상선 항구를 건설하여 중국 운남성 성도 쿤밍에서 장장 2,500km 이상되는 송유관을 건설하여 작년 2017년에 중동에서 유조선으로 운반한 원유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또 미얀마 앞바다 안다만 해 Andaman Sea 에 무진장하게 매장된 가스를 채굴하여(한국 대우 중공업이 오래전 부터 독점채굴 공급) 중국으로 공급하기 위해 가스관도 건설 중에 있다. 그 외에 오래전 부터 미얀마 군부와 계약하여 (2016년 민간 정부 출범 이전부터) 중국 운남성 쿤밍에서 미얀마 만달라이-양곤을 거처 라카인주 해변까지 연결되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를 건설 진행하였다. 이 계획은 이미 오래전 군사 정부때 부터 송유관과 가스관이 통과하는 같은 지역에 부지를 확장하여 건설할려고 도로와 철로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민간 정부 출범 이후  지금은 잠시 중단된 상태에 있다. 이것이 미얀마 군부와 정부 그리고 중국 공산당 정부가 맡물려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중국과 원수 아닌 원수같은 관계에 있는 인도와 지금 중국 공산당 정부는 공정한 무역을 거래하자고 강하게 주장하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와 줄달리기 하는 형편에 미얀마가 처해 있는 현실이다. 중국 주머니가 두둑해 지면 이웃나라 변방들이 괴롭고 가난에 찌들게 된다. 그래사 미얀마도 1962년도 군사 구데타 이후 지금까지 57년간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총 칼로 백성들을 짖누려고 죽이고 쥐어짜는 권세자나 이들을 조종하는 거대한 검은 손들은 빨리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평화가 오고 기쁨이 있고 밥 숱갈을 맛있게 편안하게 뜨 먹을 수 있다 (편집자 주).


(2012.04.30 공익법 센타 어필 APIL blog에서 번역 게제

(2015.09.17 카친의 세계 Kachin World blog 편집 수정 게제)

(2018.10.04 카친의 세계 Kachin World blog 편집 추가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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