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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涅槃(선열반)(zenilv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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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
06/09/2019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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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윤할머니는  손주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교회를 나오셨다.  얼마 전 까지도 어떤 장로님이 데려오고 데려가고...그런 수고를 했다.  그렇게 하기를 벌써 몇년이나 되었을까, 아마도 25년은 조히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손주가 이제는 23살의 젊은이로 미국에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요새는 '메릴린치'라는 세계적 증권투자기관의 이곳 지사에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87세의 할머니가 수척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아주 잘 생긴 젊은 사람과 교회를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며 드디어 뭔가 제대로 돼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우리 같이 이곳에 오래 살아오면서 서로의 사정을 짐작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게 보여 왔었다.  하지만 새로 이사온 교인들에게는 이색적으로 보이는 광경이라고 여겨지리라.  할머니와 손주가 같이 교회를 다니는 경우가 그렇게 희귀한 것은 아니겠지만, 뭔가 알고 싶은 그런 사연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궁금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어느날 어떤 분이 드디어 이 사람들의 배경에 대하여 알고 싶어하였다.  그런데 들려오는 얘기가 평범하지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산다는 또 다른 일면을 보게 되며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윤할머니는 '뉴저지' 중부에 있는 어느 조그만 동네에 60세 갓 넘은 아들과 이 젊은 손주와 셋이서 살고 있다. 그 늙은 아들은 '허드슨'강의 '뉴저지'쪽 건너에 위치한 옛 도시에서 여자 옷 가개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  '타운' 에는 저소득층의 사람들이 집 값이 싼 이유로 이런 곳에 몰려 살게 되는데, 이민 온 한국 사람들이 이런 도시에서 장사를 하며 생활의 터전에 발을 붙이려 해왔듯이 이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개인 집은 침실 3개와 응접실 식당 부엌 그리고 작은 거실을 갖추고 있는 조그만 독채로써 4분의 1 '에이커' 땅에 지어져 있었다.  지은지 한 40년은 되지 않았나 짐작되는 그런 동네다.


내가 그 친구를 만나 본지도 꽤 오래된다.   그 때 이후로 지금 까지 그는 홀애비로 살아왔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두번 결혼했었다고 한다.  지금의 23살의 손주의 어머니되는 여자가 두번째 여자로서, 이 젊은이가 두살 때 그 어린 것을 버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고 들었다.  이 두 부인들에게서 모두 4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이 달아나고 난 후에  윤할머니가 이 아이들을 키워왔다고 한다.  큰 손자는  '캘리포니아'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고 하며, 딸 하나는 출가를 하고 있는데 또 다른 한 아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왜 이 사람의 부인들이 번번히 가출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사람들 간에 억측이 구구하여 왔었다.  하지만 남의 불행한 부부 관계를 꼬집어 캐어 묻는 것도 점잖은 짓이 아닌 이상, 그냥 소문으로만 쉬쉬하여 왔던 것이다.


그는 아주 예의 바르고 착한 사람인 것 같이 보였다.  재주도 있어서 시도 쓰고 글도 신문사에 발표하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교회 생활은 멀리하고 매우 비판적인 언사를 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할머니 말은 아들이 일요일에 가개 문을 열고 일해야 하기 때문이라 하였지만, 꼭 일요일에 일하면서 먹고 살아야 하는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가끔 그가 술을 즐겨 마신다는 그런 소문이 들려 왔었다.  한번은 우리 교회에 어떤 신자의 딸 에게 전화를 걸어서 무슨 수작을 했다고 해서 이 여자의 어머니가 매우 화를 내면서 윤 할머니를 닥아세웠다는 사건이 있었다.  


이 이혼녀는 아버지가 한국의 어느 재벌의 한 가까운 친척으로서, 평생에 원양 어업에 종사하던 사람이었다.결혼 정년기에 한국의 어느 일류 대학 출신과 결혼했었으나, 소위 '돈을 보고 결혼한 불행한 결혼에 해당한다고 할까, 결국 이혼하고 아이 하나를 데리고 혼자 사는 여자였다.  당시에 아버지는 미국에서도 부자들만 산다는 L. A.의 '베벌리힐'에 집이 있었다고 그 권사가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어머니는 교회를 오래 다닌 독실한 신자였고, 공중 기도를 청산유수로 잘하는 그런 고참 기독인이었다.   L.A. 지역의 어느 교회에서는 성경 공부도 10여년 지도했다는 실력가였지만, 겉으로는 보기에는 어딘가 거만한 인상을 풍기는 그런 흠이 있었다.  그녀가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은 고급 중에도 고급으로써, 그녀의 재력을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그런 것들이었다.


윤 할머니의 홀애비가 이런 분의 딸을 넘봤다는 사실에 왜 권사가 질색을 했는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도 했다.  교회를 안다니는 50대 중반의 늙은이가 30대 중반의 젊은 이혼녀에게 전화로 횡설 수설했다는 사실은, 그것도 술에 취해서,  권사님은 가문의 수치로 받아들였다.  자기 딸에게 마음이 있으면 올바른 경로를 밟아서 혼사를 타진할 것이지, "누구를 어떻게 알고 누구를 희롱하는" 그런 짓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그런 것이었다. 


여하튼 이 사람도 한 남자니 자기 어머니와 그 때 까지 혼자 살면서 계속 홀아비로 살아야 하는 신세를 술로 달래다가 드디어 한번 크게 용기를 내어 봤던 것인데, 그 접근 방법이 '시로도'라 할까 아니면 교양없는 짓이었다는 비판으로 끝나고 말았었다.  하지만 그 사람 자신은 그 재벌에 꿀리지 않는다는 그런 어떤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만은 분명하다.  우선 전주 이씨 가문에 한 큰아들로서 한국의 어느 대학을 나와서 '현대 건설'에 취직하고서는 중동으로 파견되어 그곳의 공사 책임자로 여러 해 일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가산을 다시 일으키는 능력을 보였었던 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흑인 동네에서 '슈퍼 마켙'을 시도했다가 완전히 망하는 실패를 치루기는 했지만, 자기 아버지 같이 조상이 물려준 많은 재산을 술과 계집으로 날리면서 허송 세월하지는 않았다.


윤 할머니는 이런 시골 부잣집에 시집을 갔었다.  당시에는 부모들이 혼사를 정하던 시절이라, 외척으로 유명한 윤씨네 딸이 이씨 왕조의 후예와 연분을 맺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또 바람직한 결혼이었다. 시골 부자집의 딸과 아들이 결혼한다 하여 온 동네가 떠들석한 가운데서 윤 신부가 신랑과 맛절을 하는 순간윤 신부는 어떤 신랑과 지금 결혼하는가를 알고 싶어서 들어 올린 두팔 사이로 그의 얼굴을 살짝 건너다 보았단다.  그녀는 거기 마주 서있는 신랑의 얼굴을 보는 순간 너무나 실망하고 말았다.  자기는 우락부락하게 생기고 힘쎄 보이는 남자를 남편으로 삼기를 염원해 왔는데, 거기 넘겨다 본 그 사람은 색시 처럼 예쁘게 생긴 남자가 아닌가?......


마침내 신방을 꾸며 놓은 신혼방에 안내되어 드디어 두 사람만의 시간이 됨에 이르자, 윤 할머니는 상상하지 못할 일을 저지리게 되었다.  신부가 신랑을 남자로서 받아드리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기를 5년 동안 버티다가 드디어 어떤 계기에 결국 자기 몸을 허락하게 되었고, 이로써 이 옷장사 하는 아들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얘기는 본인의 입에서 밖에 나올 수 없는 것으로써, 윤 할머니는 언젠가 우리 모두가 뫃여 있는 자리에서 자기의 이런 기괴한 과거 역사를 우리들에게 털어 놓았었다.


신랑되는 사람은 그 가문의 장손으로 꽤 큰 재산을 부모로 부터 물려받아서 평생을 일하지 않고 밖으로 나돌면서 가산을 탕진하는 인생을 살았단다.  결국 그 아들이 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경지에 까지 가산이 기울었다.  있을 수 있는 우리 나라의 흔한 한 사회상이라 하더라도, 왜 이 아들이 한 명도 아닌 두 부인이 자식들을 버리고 달아나야 하는 그런 비운을 맞이해야 하는 의문은 그냥 남아있다.


윤 할머니가 우리들 모임에 참가할 적에는 반드시 자기의 한 몫의 발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교회에서 발간하는 교회지에도 자기의 글을 발표한 적도 있었고, 교회 운영에 관하여서도 할 말이 많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견해가 교리상으로나 신학적으로 이치가 맞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어느 자리에서든지 어떻던 간에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어떤 때는 나한테도 인신 공격 같은 언사를 서슴치 않았기 때문에, 기분을 매우 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노인이 "뭐를 잘못 보고 그러는데 내가 타내서 되겠는가"하고 무시하고 지내왔지만, 그렇다고 혼자 교회에 다니는 할머니를 너무 모르는 척 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일부러 반기려고 노력해 왔었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문론 아니다.   단지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 뿐이었다.


이런 할머니가 자기 고집을 위하여 남편과 자식들의 삶을 희생시킨 인과 응보의 업보 즉  '칼마' 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세히 살피다 보면 숙연해 지지 않을 수 없다.  윤 할머니는 어떤 환경에서 만들어진 사람인지를 모르나, 그녀가 시집올때 가지고 온 어떤 업보는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었다.  


무슨 이유인지 결국 할아버지는 선친의 재산을 탕진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미국까지 와서 홀어미를 모셔야 했었고,  그리고 그 어머니는 며누리를 용납하지 못했다.  그것도 두번이나 시어머니를 견디다 못해 자식들을 놔두고 며누리들이 달아나야 했다.  이런 와중에서 아들이 한갑이 넘도록 술로써 불행한 자신을 달래야 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할머니로서는 손주들을 자식 처럼 키우는 재미로 살았다고는 하더라도, 그 애비는 무슨 죄가 있는가?   


나는 묻는다.  신부가 5년 동안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데도, 그런 여자를 자기 부인이라고 놔두고  밖으로 돌면서 계집질과 술타령으로 한 인생을 사는 삶은 무었이며,  첫 부인을 구박하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아들 녀석이 자기 여편네를 두둔하여 어머니의 횡포를 막지 못했던 이유는 무었이며,  어머니의 문제라면 재혼할 때는 같은 불행한 일이 재현되지 않도록 왜 손을 쓰지 않았는가 말이다.   젊은 여성이 둘이나 자식을 놓고 달아 나는 정도라면, 아들이란 녀석이 효도만 중요하고 자기와 일생을 같이 하겠다고 생판 모르는 남자집에 시집을 온 여자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인생의 문제에 관한한  도를 통한 양 멋대로 살면서 팔자 소관이니 하나님의 장난이니, 짓굿은 운명이니 속절없이 말한다.   그것이 반듯이 숙명적 인생인 삶이라야 하는가, 아니면 개선의 여지가 있는 어떤 철학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묻는다.  이런 점에서 나는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이며 교수였던 '죠셉 캠불'이란 분이 남긴 "사람은 어떤 종교에서든지 그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상기하고 있다.


禪涅槃

6/9/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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