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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義로 인해서 핍박받는 자는 福이 있다
01/11/2018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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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者는 福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라. - 11절에서, 다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가 복이 있나니, -12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앞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을 당하였느니라.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2017년 초에 '福을 많이 받으라'로 인사를 나누다가, 무었이길래 새해맞이에 이런 말이 필요한 가를 살펴온지 1이 다 돼가고 있다. 이쯤 되면 벌써 복을 받았다는 것인지, 그 八福(팔복)의 의미가 시들해져감을 어쩔 수가 없다. 사실 따져오다가 보니 그렇게 쉽게 주고 받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 정도로 하고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이 彼此(피차)에 좋지 않을까? 그러나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감만 못하니라” 하니, 무슨 수를 쓰던 간에 有終의美(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마지막 여덟번째의 福은 왜 이리도 길고 말이 많은가?


지난번 4번째의 복을 살펴보면서, 누가복음 6장 21절에서 義 (righteousness)가 무었인가를 알아봤었다. 그 때는 “義에 굶주리고 갈급하게 찾는者”였으나, 이번의 것은 “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者”에게 天國 (kingdom of heaven)이 주어진다고 했다. 그 말이 그 말 같고......? 八福의 제일 처음에 이미 “심령이 가난한 자는 天國(kingdom of heaven)이 저희의 것임이요”라고 한 말과 重複(중복)되는 것이나 아니냐?


첫번의 天國은 '자신의 마음이 가난하냐’의 문제였었다. 지금 여덟번째는 남이란 상대자가 조건부로 등장한다. 그가 나를 해코자 하는 경우를 말한다. 7번째에 화평케 하는 경우에도 내가 아닌 남과 화평케하는 경우를 말했다. 8번째도 배우자, 친구, 동네, 교회, 사회 및 나라가 나의 信仰 또는 信念을 문제삼아서 거짓의 허물로 욕하고, 그로써 멀리하고, 공동체에서 버림을 당할 때에는 어떻게 하라고 하신다.


남한테 당했을때 뭐~ 어떻게 하라고요? “뛸듯이 기뻐하라”는 거다. (마태5:12 참조) 첫번에서 여섯번 까지의 정신수양들을 거친 사람은 자기 혼자의 福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남과의 문제를 해결하야 한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어떻든 간에 화평케 하고 살던지, 아니면 그 와중에 휘말려 핍박을 받던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여야 한다는 얘기다. 정~ 天國엘 가고 싶으면 말이다.


결국 천국을 나 혼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 八福의 마지막의 결론이다. 그래서 山上修訓이 끝나고 나서, 바로 그 다음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었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가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 6장13절> 


그런데 문제가 있다. 福의 마지막 숙제을 위하여는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소금의 역활을 하여야 한다는거다. 그래서 내가 뿌렸다고 하자. 모두들 소금이 짜다고 펄펄 뛰면서“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惡(악)하다 하여 너를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福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누가복음 22-23> 도대체 말이 않된다.


그리고 어려운 주문이다. 남들이 나를 미워하는데 기뻐서 뛰놀라------? 성경의 다른 곳에서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소금을 뿌려서 욕을 먹는 것이 나의 십자가란 말이 아니던가? 우선 내가 소금이라고 믿는 것이 과연 짠가를 확인하여야 하겠다. 그 짠 맛이란 것이 八福의 중에 앞의 여섯가지들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이 확실해지고 나서 내 공동체가 과연 그 짠 맛을 잃었는가를 살펴야 할 것 같다. 왜냐? 나는 이미 소금이니까, 소금독에 담긴 소금들은 서로 자기들이 짠지를 알 수가 없다. 모두가 다 짜다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마치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義로운지가 문제가 않되는 것 처럼.... 다~ 義롭기 때문이다. 짠 맛을 잃은 데에 가봐야 비로서 자기의 짠 맛을 사람들이 문제 삼아서 찧고빻고 하지 않겠나?


그들이 펄쩍펄쩍 뛰면 내 소금에 짠氣가 살아있다고 하겠고, 아무 반응이 없으면 별로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소금이 필요한 지를 아는 방법이 있다. 성경에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 나무를 살펴야 한다. 시들시들해져 있는가, 아니면 살아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확인한다. 그 곳에 새들이 둥지를 틀고 깃들어 있으면 그 나무는 틀림없이 살아 있는 짠 소금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짠 맛이 전혀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자. 짠 사람이 큰 소리로 동네방네에 외쳐봤다고 해서 그 외침으로 나무가 다시 살아날수가 있겠는가?


공동체의 누군가가 물을 주고 때 맞추어 비료를 깔아야 죽어 보이던 나무도 생기를 찾는다. 그 물주는 사람이 과연 누구냐? 모두들 내가 아니라고 다른이의 얼굴을 돌아본다면 그 나무는 살아날 가망이 없을 것이다. 구경꾼은 수두룩한데 정작 물주는 사람이 없다고------? 문제가 심각해 질 것이다. 그 사람이 그 나무의 관리자라고 하자. 보통 목사나 장로의 직책을 상기할 수가 있다. “나 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사도바울이 “우리는 모두가 다 한 몸의 支體(지체)이니”라는 말은 하면서도 자신이 솔선수범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책임자에게 누가 소금을 뿌렸다고 하자. 


그 해당자가 흥분하여 소금 뿌린이에게 “비판하지 말라’라는 성경구절을 들이대고 “시들던 말던 당신이 왜 상관하는가”하며 도리어 소금자루를 던젔다고 하자. 그가 “아예 꺼져버려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다시 말해서 교회에 나오지 말아라는 얘기다. 결국 이 소금뿌리는 者는 어리뻥뻥해져서, “나로 인하여 너희가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라”는 성경구절을 상기하겠지… 그래서 소금기운이 충만한 사람들이 그 공동체를 하나 둘씩 떠나 버린다면 그 나무는 언제 다시 소생할 건고? 


온갓 중상모략을 끝까지 감내하며 짠 맛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하자. 소금뿌리는 짓이 그 모임을 화평케 하는 말이 될까? 아니면 이런 경우에 요긴하게 써먹히는 ‘소금의 십자가'가 되다는 건가? 누가복음 6장 23절에 “저들의 조상들이 예언자(혹은 先知者)들에게 그렇게 하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도 그런 길을 걸어 가라는 거다. 이로써 소금끼 없는 이들에게서 계속 핍박을 받으면서도 소금노래로 초지일관해야 한다는 얘기다. 왜냐? 천국을 내 것으로 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Very controversial, it is indeed…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소금의 역활을 해내는 것은 자기에게 엄청난 희생를 요구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소금의 역활을 하시다가 십자가에 돌아 가셨다.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져라.”--- “넓은 문은 들어가기 쉬워서 찾는 자가 많으나, 좁은 문은 들어가기가 힘들어 통행하는 자가 드물다.” 바로 이런 경우를 놓고 하신 말씀인 걸로 짐작된다. 


과일나무가 죽어가는 것을 알면서 구경만 한다면 그 나무는 결국 죽고 말 것이다. 누구의 나무며, 그 관리의 책임은 누구의 것이냐? 그 소재를 밝히고자 나선 사람은 결국 핍박을 받게 될 것이고, 이 세상에서 온갓 욕과 비난을 받게됨은 자명하다고 하겠다. 그런데도 소금을 뿌려서 그 공동체를 살려야 한다는 교훈이 八福의 마지막 요청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하여야만 결국 우리에게 福이 내린다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물결치는 대로 살면 됐지, 뭣 때문에 시끄럽게 구는냐”는 거다. 한번 장로는 평생 장로라면서.... 


하나님이 주신 성스러운 직분---, 심령이 가난하고 길 잃은 羊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기름부움 받은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공동체의 영혼을 시들게 한다면 “영혼의 관리자”는 소금의 맛이 무었인가를 우선 알아야 하겠고, 설혹 소금을 뒤집어 쓰더라도 다 하지 못했음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고맙게 받아야 할것 같다. 마치 '데비드'왕이 그의 선지자였던 '나단'의 충고를 받고 회계했듯이--- 


그래야 하나님 보시기에 “너는 참 내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실족케 하면 어떻게 하라구요? “연자맷돌을 달아서 바다에 던져짐을 당하리라.”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행동이 따르지 않는 설교는 듣는 이의 귀고막을 아프게 할 뿐이다. 자신이 떠드는 말이 자기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는 無知(무지)와 傲慢(오만)..., 그리고 책임감이 전혀 없이 다 남의 일이고,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살아주지 않는다고 청중에게 고추가루를 뿌린다면, 도대체 이런 목사들을 무슨 방도로 어떻게 깨닫게 해야 한다는 말이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없다. 너나 나나 할것 없이---!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러나 내가 기름부움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차라리 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려고 '소금의 소리'를 질러대야 할것이 아니런가! 福을 듬뿍이 받어야 할 터인데--- 아직 덜 받았다는 건지, 아니면 지금 福이 부족해서 신소리를 해대고 있는 것인지 까리까리 해진다.


聖靈(성령)을 받으라고 강대상에서 외쳐대서 성령이 저절로 떨어지나? 누군가가 성령을 받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할 것이 아닌가베? 지금 하고 있는 짓이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내 공동체를 위해서 나를 버리는 건가. 하나님의 福을 위하여 교회 안에서 자신의 소금을 뿌려대던가, 아니면 바깥에 나가 선무당의 굿판이나 구경하던지... 그런 세상적 쾌락을 혼자서 즐기던가--- 두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여야 할것이다. 福받기가 이처럼 어려울 줄이야 예전엔 미쳐 몰랐네... 아이구 맙소사!


禪涅槃


2018-01-11 07:4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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