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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노래 (雅歌書: Song of Songs)
12/06/2017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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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중에서 신비적이고 그리고 가장 논난이 많고 또 짧게 쓰여진 經書(경서)가 있다. 모두 117절로 쓰여졌는데, 희랍어와 라틴말로 'Song of Songs' 일명 '솔로몬의 戀歌(연서)'라고도 불려지는 詩(시)의 모둠으로 유태인들에게는 '가장 신성한 것 중에 신성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현재의 구약성경에서 잠언 다음에 전도서가 써있고, 그리고나서 雅歌書(아가서)의 순서로 편집되어 있지만 Rabbi Hiyya란 사람은 '솔로몬'이 잠언을 쓰고 나서 Song of Songs를 두번째로, 그리고 전도서를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솔로몬이 저자가 아닐 것이라고 추측하나, Rabbi Akiba라는 사람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수 없는 가장 거룩한 글귀라고 선언하고 있다. Martin Luther 자신도 Das Hohelied(가장 聖스러운 노래)라고 불렀고 지금도 독일, 스웨던 그리고 홀랜드에서 그렇게 받아진단다. 유태인 구룹중에 Sephadic과 Mizrahi파는 매주 금요일 저녁에 이 노래를 예배 중에 부르고 있다. 또한 신비주의 Kabbalah 구룹도 이 아가서를 가장 중요한 성서라고 믿고 있다. (Wikipedia 백과사전 참고했음)


도대체 뭣을 가지고 이러는가를 다음의 몇 구절을 읽어보고 얘기를 계속하자.


7장 1절에서: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굴어서 공교한 장식의 구슬꿰미 같구나 2.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3.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새끼 같고 4. 목은 象牙望臺(상아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람빔門의 연못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같구나 5.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의 휘장같고 왕이 그 너슬거림에 사로잡히며 6. 오~내 사랑아 네가 어찌 이리 아름다우냐, 어찌 즐겁지 아니할쏘냐 7.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도다 8.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냄세 같으니라 9. 네 입은 가장 훌륭한 포도주 같으니 내 사랑하는 너의 입술과 이빨 사이로 스며흘러 가겠다 10. 너는 나의 것이니 그 욕망이 내게 있도다 11. 내 사랑아, 이리로 오라 들판으로 나가자 그 곳의 촌락에서 오늘 밤을 지새우자 12. 일찍 일어나서 포도의 꽃송이가 맺혔는가, 석류꽃이 피었나를 살펴보자. 거기서 내 사랑을 너에게 주겠노라 13. 합한채 (Madrakes)가 향기를 진동하니 우리들 문앞에 모든 진묘한 것들의 새것이나 오래된 것이나 너를 위하여 쌓아 놓아왔었다. 내 사랑아.


무슨 의미의 암시냐? 상상에 맡겨서 가장 '에로틱'하게 음미해 보시기 바란다. '아가서'의 앞 장에서도 이런 여러 재미있는 구절들이 가득하게 기술되어 있다.


유태인들은 선택된 민족이라고 스스로 여겨서 자기들 하나님을 남성으로, 자기네들을 여성으로 비유했다. 그런 뜻에서 이런 Sexy한 황홀경을 每週(매주) 맛보며 살겠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共觀福音(공관복음: 마태, 마가, 누가가 예수의 행적을 같이 봤다고 해서)과 요한복음에서도 이 雅歌書를 인용하면서 하늘나라에 사는 영혼의 극치를 암시한다. 그러나 원래 中世時代(중세시대)에 지나친 Allegory性<譬喩(비유): 지나친 확대왜곡>이 근래에 와서 문젯거리가 됨을 볼때, 또 예전에 에집트에서 불려진 詩들을 한데 모았다는 일부의 說도 있고 해서, 과연 이 '사랑의 노래'를 유태인들의 我田引水(아전인수)로만 해석할 수가 있겠나 하는 견해도 있다.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에로틱'한 성경구절을 꺼집어내서 왈가왈부하는가? 전도서(Ecclesiastes)가 인생은 허무한 것을 노래한 반면에, Song of Songs가 한번 뿐인 생애를 재미있게 살아야 하겠다고 읊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온 젊은 유태인 여자와 내가 잠간 교제한 일이 있었는데, 이 여자 말이 "자기는 매일 性交(성교)를 하고 산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한국 친구인 내가 질겁을 하지 않았겠나? 그런 이후로 어떻게 유태여자는 그런 강한 性慾(성욕)이 있는가를 궁금하게 여겨왔다.


최근에 솔로몬의 Song of Songs에 관해서 이것저것을 살피다가, 유태인의 남자는 적어도 한 주에 한번은 여자를 즐겁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문론 한번 이상이 서로에게 더 좋겠다 마는... 혹시, 이 雅歌書(Song of Songs) 때문이 아닐까? 이 사람들은 이처럼 現生(현생:present life)에서 최대한 즐기다가 죽겠다는데, 우리들은 以生(이생)에서는 점잖을 빼다가 죽어서 천당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거기서 어떻게 잘 해보겠다는 의도가 은연중에 숨어있다고 하겠다. 천당에서도 그런 게 가능한가? Who knows.


종교와 철학이 왜 필요하냐고 따지는 분들이 많은데, 사람이 사는데에는 이같이 까리까리 한데가 있다. Sex에 관한 한 매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삶이 있는가 하면, 궂이 손을 내젓는 뒷구멍의 호박씨들도 많다 보니, 뭐가 옳아야 하는지 내게 혼동을 가져온다. 


"호걸은 여자를 좋아한다.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 그럼으로 나는 호걸이다. 이런 三段論法(삼단논법)이 성립하는가? 男兒(남아)가 세상에 철이 들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말이 되겠나? 여자도 남자를 좋아하는데... 


실은 " 여자도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하다가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었다. 일찌기 알았다면 내가 원하는 여자를 골라가면서 아주 신나게 재미랄까, 아니면 훗날의 처를 꿰찼을 텐데... 그 20代 청년시절에는 왜 그렇게 수줍어 했었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가 않된다. 그래서 지금 무슨 '액숀'이고 뭐고를 들먹이는 거다.


오래 전이다. 내 사업체 몇집 건너에 잡화가개가 있었다. 어느날 어떤 예쁘장한 여자 종업원이 새로 와서 캐쉬어' (Cashier)를 하고 있었다. 내가 호걸의 기질을 발휘해서 그 상점을 들락거리며 군것질을 사먹기 시작했다. 서양여자들은 저희들이 먼저 남자에게 미소를 보내는 습성이 있다. 초심자는 그 눈웃음이 진짜인지 아닌지 얼뜻 분간하지를 못한다. 나도 그 정체를 파악하는데 여러날이 걸렸었으니까.


'초크레트' 하나를 사들고 시간을 끌면서 추근거렸다고 하면, 점잖지 않은 표현이 되겠지...? 하여간에 내가 괜찮은 남자라는 것을 과시했다고 하자. "나는 너를 좋아 한다"는 눈치로 뜸을 들이며 기회를 노렸다. 과연!...... 그 여자도 형식적 웃음을 집어치우는 것 같았다. 내가 그런 걸로 알았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더 열을 냈지 않았겠나!


쌍팔년도에 멕시코로 축구구경을 간적이 있었다. 실은 1986년이었지만 서리. 멕시코 사람들도 대단한 문화민족이라는 듯, 그들 토백이 "아즈텍 문화"를 자랑한다면서 큰 박물관을 세워놓고 사람들을 끌고 있었다. 우리 여행객들이 그 곳에 몰려갔었는데, 그 정문을 들어서자 돌로 깔아놓은 넒은 광장(Plaza)이 앞에 펼쳐지는 그 가운데에 어떤 멕시코 아가씨가 어른거렸다. 내가 접근하며, 영어를 하십니까를 물었다. 이 여성이 반기면서 영어로 yes라고 대답했다. 얼시구... 잘하면 알까지 먹겠구나!" 나는 한국의 남자인데 멕시코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공부하고 싶다. 좀 도와줄 수가 없겠냐"하며 은근히 따리를 붙였다.


이 멕시코 여성이 기꺼이 여기저기로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나는, "아! 그러냐? 대단하다"... 뭐 어쩌구 했지만, 내 속셈은 딴 데를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 녀의 몸둥이도 위-아래로 줄곧 살피면서 말이다. 육체미는 별것 아니어서 좀 실망했지만서도..., 이 여자는 아주 유식했다. 자기가 대학교수라고 신분을 밝혔다. 내가 움찔하면서 흘리던 침을 거두어 들이고, 다시 교수직이 얼마나 훌륭한 직업인가로 방향을 돌려서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 분이 하는 말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 처럼 대단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놀래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가를 물었다. "멕시코는 스페인 군인들이 정복한 나라로써 현재에 이르는데, 무식한 군인들은 학문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해서 무력을 우선으로 했고 학문을 멸시하는 전통을 남겼단다. 그래서 멕시코의 스페인 말 자체도 교수를 '너'라고 부른단다. 이 '너'란 칭호는 아주 낮은 호칭으로 친구나 혹은 장바닥의 돌팔이들이 쓰는 그런 말투라는 것이다. 


내가 뉴욕근처에 오래 살면서 '푸에르토리칸'의 스페인 후예들이 얼마나 가정에 충실치 못하며 지적수준이 낮은 사람들인가를 자주 보아왔었던 바라, 이 여교수의 말에 상당한 수긍이 갔었다. 옛날에 스페인의 하층 젊은이들이 신세계에서 군인으로서 행운을 잡으려 했었던 그 역사적 흔적을 이렇게 남겼음을 상기했다.


그런데, 그 예쁘장한 유태여자는 미혼이었고, '이스라엘'의 항구도시인 '하이파'에 자기 아파트도 있는 여자로서, 무슨 연유로 미국에 와서 남의 상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느날 남자의류 홰숀쇼의 볼일로 뉴욕에 갈 일이 있는데, 뉴욕에서 만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 녀가 쾌히 승락했다. 그리고 맨하탄의 'Penn Station의 8街쪽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가 그 시간에 거기를 가서 기웃거리니까 그 녀가 약속한 시간에 정확히 나타났다. 그 곳의 많은 인파를 발견하고 속으로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건가로 걱정했었다. 만날 장소를 잘못 잡은 것을 뉘우쳤다. 그러나 탓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코리안 타임'과 '유태인의 시간관념'이 이처럼 달랐다.


하여간에, 홰숀쇼를 반나절에 끝내고 내 車로 뉴저지 쪽으로 건너가서 '팔리세이드-팍웨이' 옆 '허드슨'강이 내려다 보이는 관망소로 들어섰다. 햇볕이 따겁게 내려 쪼이는 거기 잔디밭에 우리 둘이 나란히 앉았다. 그 절벽아래로 펼쳐진 넓은 강물 위로 각종 선박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한가하고 평화스러운 광경 넘어로 맨하탄의 '스카이 라인'이 한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여러가지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 여자는 솔직했다. 자기가 처녀였을때 부모가 처녀성을 중시하라 해서 오랬동안 간직했었는데, 막상 그것을 버리는 순간 '그것이 왜 그리 소중해야 했는가'를 의아해 했다는 거다. 거듭해서, 지금의 '보이 후렌드'와도 거의 매일 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런 얘기까지 했다. 한국남성으로는 비밀스러워 보이는 이런 신변의 얘기를 서슴치 않는 그 녀를 바라보면서 내 속에서 뭣을 느꼈겠는가? 손을 뻗치면 닿을 것 같은 그런 환상이 떠올랐었다. 


그런데 겁이 덜컹났다. "매일이란 말"... 괜히 건드렸다가 어떻게 내가 뒷감당을 할 건가? 김치국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내밀려던 손을 점잖게 거두어 들이고 말았다. 


이런 대화를 하던 중에 내가 깊이 감동한 것이 실은 딴데 있었다. 뭐를 지껄였는지 지금 기억에 없으나, 무슨 특별히 할 말도 없었던 차여서 자연히 최근에 읽은 책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놀란 것은 그 녀가 그런 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는 나를 그럴듯 하게 올려다 보는 것이 아닌가!


자~, 이스라엘의 평범한 한 여자가 학문과 지식을 대하던 태도와 멕시코의 지성인 교수가 한 말에 이처럼의 큰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유태인은 기원후 AD70 년에 예루살렘에서 추방되고 나서 2천년이 넘게 전 세계를 유랑하면서 삶의 지혜를 흠모하며 정진해온 민족이다. 그들이 지금 과학계와 세계경제 및 정치, 심지어 무기의 최첨단을 달리는 아주 현실적이고 또 그런 여호와의 영특한 후예들이 되어있다 


그런데 멕시코는 뭐냐? 군인들의 자손들이 아직도 원주민들을 이렇게 저렇게 착취하면서 질서 없이 혼란한 정치와 부패한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 결과, 대중은 무식하고 가난해서 미국으로 살길을 찾아 1,000 mile의 철조망을 넘고 있다. 각박한 현실에서 유린 당하는 힘없는 자들의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어떤 한 민족은 지식과 학문을 숭상하여 세계사람들 위에 설 수가 있었으나, 자기 만의 욕심과 남을 등쳐먹는 사회는 배운자를 경멸하다가 국민의 다수를 도탄에 빠뜨렸다. 


'솔로몬'의 “노래 중의 노래”를 보는 이에 따라 관능적인 서사시로 읽을 수도 있고, 또 한편 하나님의 축복을 남녀의 사랑으로 비화시켜서 행복한 삶을 염원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려는 정신적 지주로도 볼수 있다는 것...... 이것으로 세속적인 삶(Worldly life)을 내가 사느냐, 아니면 靈的(영적:Spiritual Life)인 인생을 영위할 건가를 가름하는 하나의 거울이 될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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