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nilvana
禪涅槃(선열반)(zenilvana)
California 블로거

Blog Open 09.25.2015

전체     65843
오늘방문     128
오늘댓글     0
오늘 스크랩     0
친구     0 명
  친구 새글
등록된 친구가 없습니다.
  달력
 
우리에게 미국은 과연 무엇인가?
03/03/2016 09:34
조회  394   |  추천   12   |  스크랩   0
IP 76.xx.xx.81

세계2차대전의 막바지, 일본의 패망이 거의 확실시되던 1945년 2월, 미국대통령 루즈벨트, 영국수상 처칠,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은 프랑스와 중국을 배제한채 우크라이나의 얄타에 모여 전후의 유럽과 극동의 분할점령문제에 관한 6개항의 비밀문서에 서명했다. 이 6개항에는 일본점령문제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루즈벨트로서는 6개항의 협상으로 쏘련을 대일전쟁에 끌어들여 만주지역에 주둔해 있던 일본의 정예부대인 ‘관동군병력’ 이 태평양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참고: 이 관동군의 괴멸은 고미카와 준페이가 쓴 소설 ‘인간의 조건’ 에 자세히 묘사돼 있다. 일독을 권한다.

1945년 8월8일.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기 직전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 한 후 만주를 거쳐 함경도 지역을 통해 빠른속도로 남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주력부대는 1945년 9월7일에 인천에 상륙, 한반도의 북부지역을 완전히 점령한 소련군과 대치, 남한지역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그 경계가 38선 이었다. 얄타협정이 없었다면, 그래서 스탈린이 단독으로 참전을 결정했다면, 일본에 선전포고한 소련군이 만주를 거쳐 남한전역을 점령했다면, 지금 우리들은 김정은의 학정 아래에서 강냉이도 배불리 먹을수 없는 지옥을 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가정이 아니라 충분히 현실이 될 수있었던 역사적인 정황이다. 남쪽에 두준한 미군, 미국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공산불럭에 편입되지 않았으며 미국이 주도한, UN에 의한 합법적인 민주정부를 수립할수 있었다. 얄타협정에서 보았듯이, 국제정치는 열강들의 힘에의한 각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의 통일문제도 결국은 같다고 봐야한다. 미국, 일본,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힘의 균형과 이해타산에 의해 작은 나라 한국의 운명이 결정될수 있는게 현실이고 세상이다. 미군의 남한진주는 그런 의미에서 2차대전후 시작된 냉전의 서막이라고 할수 있으며 남쪽지역의 행운이기도 하다.

8.15광복때, 우리 가족은 본가가 있는 평안북도 강계에 있었다. 1년을 지켜본 엄친께서는 앞으로 북쪽은 사람이 살수 없는 곳이 될것으로 판단, 월남을 결심했다. 해주까지 내려온후 야밤에 안내인을 고용, 인민군의 감시를 피해 38선을 넘었다. 영등포 새말 기와집 문간방에 세든 우리는 거지나 다름없는 ‘월남피란민’ 이었다. 하루세끼 통강냉이를 삶아먹고 살았다. 그때 남한지역은 미군정하에 있었으며 말단 행정부서인 ‘동회’ 가 기능하고 있었다. 가호적을 하기위해 엄친께서는 동회에 가서 우리가족을 등록했고, 우리는 월남피난민 으로 등재됐다. 그리고 곧, 미군이 월남피난민에게 나누어주는 그 박스가 배급되었다. 미군의 전투식량인 C레이션. 우리 가족에게 그건 요술상자같은 생명박스였다. 껌과 초코렛은 물론, 커피와 잼과 비스켓, 도로푸수 사탕까지 있었다. 소고기 통조림과 길게 생긴 직사각형 통조림의 햄은 놀라운 맛이었다. 찌개에 넣고 아무리 끓여도 녹지않던 치즈, 우리는 그렇게 미국의 식문화에 접했었다.

엄친께서 취직이 되어 생활은 안정되었지만 사고무친한 월남피란민을 살려준건 미군의 그 C레이션 박스엿다. 나는 지금도 우리가 배급받았던 그 C레이션의 기적을 잊지않고 있다. 그게 우리 식구를 살렸기 때문이다.
6.25 한국전쟁은,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에 의한 냉전의 현장이다. 공산불럭의 세력확장과 이를 저지하려는 민주진영의 한판싸움이 한반도에서 치러진 것이다. 나는 철이들어 이 끔찍한전쟁을 겪은 마지막 세대이기도 하다. 1950년 6월25일부터 37개월후 휴전이 성립될때까지 UN군은 전세계 16개국에서 파견되었으며 그 총인원은 195만 7.616명 이었다. UN군 편성에서, 공군의 98%, 해군의 83.3%, 지상군의 80%가 미군이었다. UN군 사령관도 미군 장성이었다.

한국군 전사자 13만 8천여명, 부상자가 45만여명이었으며 실종자를 포함하면 실로 60만 9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군이 주축이 된 UN군은 전사자 5만8천여명, 부상자 48만여명, 실종자와 포로를 합치면 54만 6천여명의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이중 미군은 전사 3만6,940명, 부상자 9만2.134명, 포로 4.439명의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렇게 미군이 치른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으며 지금도 미군은 한반도에 주둔해있다. 미군의 존재이유는 북한이 끊임없이 요구하고 외치고있는 ‘미군철수’ 가 그 답이다. 그들은 눈의 가시같은 미군이 있는 한 남한에 도발할수 없기 때문이다. 적화통일의 혁명위업을 달성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군대의 기본은 변함없이 ‘보병’ 이다. 첨단무기가 아무리 발달해도 보병이 땅을 점령해야 전쟁은 끝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8년전인 1957년, 나는 대한민국 육군의 최전방부대 소총수-보병이었다. 신발은 월남화였다. 월남의 고 딘 디엠 대통령이 보내준 군화로서 바닥에는 쇠로된 징이 촘촘히 박혀있는 가죽군화였다. 바지는 국산 군복이었은데 너무 조악하게 만들어 늘 꿰매야 했다. 우린 그걸 ‘중공군바지’ 라고 불렀다.
상의는 왼쪽주머니 위에 글씨도 선명히 찍힌 USMC, 미 해병대 군복이었다. 옷이 모자라 미군군복이 지급되었기 때문이었다. 허리에 차는 탄띠에 달린 대검과 수통도 미군들이 쓰던 것이었으며 보병의 기본화기인 소총도 미군들이 쓰던 반자동식의 M1 이었다. 명중률이 높은 놀라운 총 이었지만 너무 크고 무거워 우리에게는 맞지않았다. 그리고 철모, 지금은 화이바로 만들어 가볍지만 그때는 미군이쓰던, 쇠로 만든 철모였고 그 무게 때문에 목이 아팠다. 중대의 공용화기인 기관총과 박격포도 미군이 쓰던 것이었으며 숟갈도 그들이 쓰던 것 이었고, 우리는 손잡이 부분을 접어 만년필처럼 주머니에 꼳고다녔다. 찦차와 쓰리쿼터, 지엠시 트럭도 전부 미군이 쓰던 것이었다. 그때 대한민국 정규군은 미군의 대여장비가 없었다면 무장자체가 안되는 군대였다.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춥고 배고픈 것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썪었기 때문이었다.

1953년 5월, 쌍방간 휴전협상이 시작되었을 때 이승만은 이를 강력히 반대하고 거부했다. 연합군이 북진을 계속, 통일한국을 이루겠다는게 그의 열망이었다. 미국정부에 의해 이 요구가 거부되자 이승만은 세계가 놀랜 승부수를 띄웠다. 1953년 6월 18일, 미군 지휘하에있던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한 것이다. 그때 아이젠하워 행정부 에서는 이 고집센 늙은이를 제거해야 된다는 얘기까지 있었다고 한다. 휴전협상은 계속되었고, 이승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직접 쓴 문서를 보내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결국 미국은 이 요구를 수용했으며, 1953년 10월 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이 조약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잘 모르고 있다. 한,미방위조약이라는 큰 안보의 울타리가 있었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 이 있을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안보에 쏟아야할 시간과 돈을
오직 경제발전에만 투자, 성공할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이 이끌어 낸 한,미방위조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이 조약은 지금도 한국을 지키는 커다란 안보의 울타리가 되고 있다. 6.25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끝났을 때, 우리는 너무나 가난해서 1957-1958년도 정부예산의 54%를 미국의 원조로 충당해야 했으며 1945년에서 1961년 사이 미국은 우리에게 31억 달러의 원조자금을 제공했다. 그때 우리의 GNP는 67달러 였으며
이 원조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또 한가지 잊지말아야 할 것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이 압축성잘 할수있었던 것은 미국이 우리에게 그 큰 시장을 열어줬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우리회사가 생산한 특수강이 미국으로 수출되기 위해 선적되던 그 감격적인 장면을 잊지못하고 있다. 특히 부가가치가 큰 수출제품은 지금도 미국이 가장 큰 시장이다. 미국의 도움없이 한국은 설수 없었다. 건국에서 전쟁, 그리고 민주국가의 건설과 경제발전의 고비고비에서 우리는 미국의 도움과 격려를 받았다. 2차대전이후 미군이 진주했고 미국이 원조했던 나라는 전부 130여국이 된다. 그중 미국이 심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성공한 나라는 우리뿐이다. 그들이 인정하듯 우리는 ‘미국의 보람’ 인 것이다. 한국정부가 조성, 유엔에 기증해서 유엔이 관리하는 부산의 유엔군묘지는 세계에 하나밖에 없다. 지금도 2300여명의 한국전참전 유엔군들이 잠들어 있다.

우리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수입원자재의 90%, 수출상품의 90%가 좁고 험한 말라가해협을 통과하고 있다. 기름과 천연개스같은 에너지도 전부 이 해협을 통해 수입되고 있다. 한해 3,000 여척 수준이며 우리 해경이 말레시아와 합동으로 훈련하는 곳이기도 하다. 미 해군의 제7함대가 없이 이 해협이 지금처럼 조용할수 있을까. 우리가 제주 해군기지의 건설을 서두르는 것도 사실 말라가해협의 항로확보가 주 임무다.

그런데도 기지건설을 반대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은 한탄을 금할수 없는 일이다. 북한은 집요할만큼 ‘미군철수’를 부르짖고 있다. 북한헌법의 상위개념인 노동당규약에 ‘남반부의 적화통일’ 이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혁명위업을 주한미군 때문에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선전한다. 극단적인 종북세력들이 이 땅에 살면서 ‘미군철수’를 부르짖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적성이 있고 과격한 급진종북단체가 61개에 이르며 이중 32개가 서울에 있으며 적극적으로 가담, 활동하는 회원이 1만9천여명 이라고 경찰은 집계하고 있다.

이제 이들에 대해서도 손볼때가 된 것이다. 더 미루면 안되는 한계점에 왔다고 판단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종북좌파세력들은 습관적으로 전쟁반대, 평화협정체결같은 말을 입에달고 다닌다. 종북성향 단체들은 유난히
‘평화’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올린다. 조금만 불리해져도 ‘전쟁이냐, 평화냐’ 하면서 상대를 압박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평화’ 는, 그 의미가 우리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된다. 그들에게 평화란, ‘남조선 적화혁명이 완수된 상태’ 또는 ‘적화혁명의 최대걸림돌인 주한미군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제 대한민국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달라져야 한다. 종북세력의 숙주인 야당은 정신을 차리고 그들과 선을 그어야 하며, 사법부의 오만한 솜방망이 처벌, 입법부의 테러방지법 지연, 정부의 안이한 공안대처의 관행도 사라져야 한다.

‘통일은 대박’ 이지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합의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국제적인 역학관계에서 우리가 사용할수 있는 가장 큰 지렛대는 결국 미국뿐이다. 그게 현실이며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진실이다.
역대 외교관중 최장수 단일 임기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김하중 전 주중대사는 이렇게 말한다.

‘진부한 얘기같지만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나라는 미국이다. 지구상 어떤 나라도 미국을 대신할수 없다. 앞으로 상당기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개구리는 올챙이 때를 기억해야한다.-

출처: by/yorowon

이 블로그의 인기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