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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人生無常이라, 덧없이 갔고나
05/26/201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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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이다. 지금은 북한 땅이 되어서 다시 가 볼 수 없는  곳...내 추억의 고향이 되고 말았다. 1945년 해방되던 해에서 6월 25일 북괴가 남침하던 1950년까지 한 5 년동안 어머니를 따라 자주 그곳에 갔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서울 역에서 신의주로 가는 경의선 기차를 타고 북으로 얼마 달리면 개성역이 나타난다. 거기서 잠간 더 가면 토성이라는 작은 역에 멈춘다.  그 여행거리는 실상 그리 멀지 않으나 당시의 어린 나이로는 꽤 긴 여행으로 생각되었다.


연안읍이었는지 아니면 토성이란 역이었는지, 구별하지 못하는 한 정거장에서 어머니를 따라 내리면 '걸렁'이라 불리는 시골의 작은 장터가 나타났다. 그 곳을 빠져 나와서 자갈길을 따라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빨리 걸으라는 어머니의 재촉과 귓가를 스치는 휫파람 소리... 초여름의 녹색 풍경에 한눈을 팔며 10 여리를 서두르면 내 외가집 앞에 우뚝 서있는 느티나무가 저 멀리 보였다. 황새가 들끓는 그 넘어로 큰 기와집이 긴 축대 위에 홀연히 등장했는데, 지은 지가 얼마 안되는 듯 일자로 늘어선 큰 개와집 한옥이 곧 나의 외갓집이었다.


이 고목나무로 말하자면, 교과서에 나오는 천연기념물로써 우리나라의 몇 않되는 엄청나게 큰, 몇 천년 묵은 느티나무로 한국땅에 드문  황새들의 서식지로 지정됐던 유명한 곳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둥치의 절반이 썩어서 텅빈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라도라든가 충청도의 어느 곳에도 황새들이 날아드는 곳이 또 있다 하더라 마는, 이 고목나무의 덩치는 자그마한 집터만 했다. 그 바로 옆에 초가집 한채가 있었는데, 내 여동생이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개와집은 뒤로는 작은 언덕을 돌담으로 둘러막았고, 앞으로는 사랑채와 곳간이 좌우한 가운데에 커다란 대문이 중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높은 문지방을 넘으면 왼쪽에 방이 하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다음으로 또 중간문의 문턱을 넘어야 안채의 마당이 시작되었다.  오래전에 독립군이라고 칭하던 山敵(산적)들이 자주 덮쳤던 고로 바깥채에나 안채의 열린 곳의 어디에나 굳은 덛문을 매달았고 여차하면 내려서 외인의 출입을 차단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여름에 축대 위에 지어진 사랑채에서 바라보면 고목나무 위로 연백평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내 어머니의 어린 시절에는 도적떼들이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집 바깥에 타작하고 남은 볏짚더미에 불을 지르면 동네사람들이 처마에 매달아 놓은 망태에다 돌을 잔뜩 담아서 집안으로 마구 돌팔매질을 했다고 했다. 물론 본채의 문은 방패막이 덧문을 이미 내린지라 누구든지 밖에서 언정거리면 돌팔매에 얻어맞는 고로 그들은 뒷담을 넘어 도망쳤다. 이들은 긴 칼과 육혈포라는 권총으로 무장했고, 어떤 때는 외삼춘과 내 어머니까지 잡아서 "돈 숨겨놓은 곳"을 알리라고 협박하기도 했단다. 하도 자주 당했던 고로 어머니는 치를 떨며 그때의 일을 아예 떠올리기 조차 싫어했다.


곳간이란 창고에는 배가 썩어나갈 정도로 각종 소산물이 저장되어 있었고, 연평도가 가까운지라 조기철이되면 바리로 실려왔었다. 다 먹을 수가 없어서 말린 조기가 넘쳐났고, 내가 서너살 적에는 굴비가 아니라 굴비알만 내놓라고 투정을 부려서 외갓집 식구들의 눈총을 샀다고 하더군.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마는 지금은 조기알을 구하지 못함으로 그저 침만 삼키고 말지를.


김성수라고...일제 때에 동아일보, 경성방직 등의 기업을 운영하던 전라도 만석꾼의 아들이 고려대학교를 건립한다는 명목으로 우리 외갓집을 찾아왔다는 말이 어린 나에게도 전해졌다. 외가가 얼마 만큼의 성금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외사춘 형님되시는 분이 대동아 전쟁 말기에 징집연령에 해당됐을 때, 고려대학교에 특혜로 입학할 수 있다 했으니... 본인 말로 “큰 물고기는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 면서, 정작 일본으로 유학했던 것을 미루어 볼때 어느 정도의 성의를 보였던 것 같다.


“캠퍼스 길 찾기가 쉬워 졌어요”란 "재미 서울대학교 동창 회보"가 몇년 전에 배달된 적이 있었다. “방대한 관악 캠퍼스” 운운하는 글이 확대되어 내 눈에 들어 왔다. (참고: 2006년 12월 제153호)  관악산... 하니까 머리에 금방 떠오르는 것이 있으니, 내 외가가 그곳에 종산을 마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관악산 어디 쯤인가는 알지 못한다. 또한 얼마 만큼의 큰 땅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큰 물에서 놀았던 사촌 형님이' 6.25전쟁 후에 남한에 남아있는 종가의 재산 중에 관악산 묘지를 몰래 팔았다. 


내 어머니 시절에는 외조부가 여관비를 절약하고자 집 한채를 효자동에 마련한 적이 있었고, 내 시절에는 큰 손자에게 주었는지, 큰 외삼촌이 아들에게 맡겼는지...하여간 아현동 집이 나의 서울 외갓집이 되었다. 시골 사람들이라 서울에 큰 집을 장만할 이유가 없었겠지만 하여간에 사촌형님이 그 가족들과 함께 그곳에 오래 살았다. 얼마 후에 종손이란 이름으로 종묘를 처분했던 것이 발각되어 시끄럽게 되자, '죠지아州'라든가 미국의 남부 어느 곳에서 큰 모텔을 운영하다가, 후에 L.A.로 도망치다 시피 이민하고 말았다. 오래 내왕없이 지내왔으니 생존해 계신지는 알길이 없다만, 90을 훨씬 넘겼으니 짐작컨대 이미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고등학교 1-2학년생이었을 때에  그집에 가끔 놀러 가면 느닷없이 “Time 紙’를 들이대고 읽어 보라해서 난처할 때가 많았다. 하시는 말씀이 내 영어 발음이 어떻고 저쩧고, 세계가 지금 어찌 돌아가는지... 등의 얘기를 들려 주곤 했다.  그는 6-25전쟁 수복기에 영어선생를 하다가 무역회사에 중역으로 일했다. 일찌기 내가 미국이란 나라를 동경하게 된 요인 중에 이 분이 내게 끼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하겠다.


내 나이 80를 바라보는 이 즈음에 내 동창이 경제학 교수로 은퇴하고, 그곳 관악산에 별채의 공부방을 다른 동창들에게 구경시켜 준다 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내 妹弟(매제) 역시 그곳에서 교수로 은퇴했던 곳이라 이들의 서재를 이미 구경했었 바다. 고교의 붕우들이 관악산 어느 중턱에서 재상봉의 소줏잔을 기우렸다 하니,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나도 가야할 때가 멀지 않은 바라, 생각나는 것은 오직 옛 추억일뿐... 人生無常(인생무상)이라, 덧없이 흘러갔고나.


禪涅槃

5/2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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