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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붉게 (제6편: 책을 벗한 사람)
01/12/201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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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내에서 판문점을 향하려면 서대문 로타리를 돌아서 좌측으로 鞍山(안산) 그리고 仁旺山(인왕산)의 우측 언덕 위에 있는 영천이란 동네가 있다. 그리고 가는 길목에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빈관이 서있었다고 한다. 이를 허물고 서재필 박사의 독립회란 단체가 일본시대에 조그마한 독립문을 세웠다.


로마나 파리의 개선문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한국인의 민족사에서 외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하나의 意志(의지)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식민이 시작된지 얼마 않되는 시기에 이조의 4대문 중의 하나였고 헐리고 다시 세우는 반복이 있었다. 세종대왕이 돈의문의 이름을 복귀시키면서 500년을 내려온 서쪽의 성곽의 대문을 일본사람들이 1915년에 강제로 철거하였다.


어쩐 이유에서 그리했을까? 아는 바가 없으나, 장안의 인구가 증가로 시가지를 넓이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허나 남대문과 동대문 그리고 북악산 뒤의 북대문, 일명 자하문이 예대로 남아있는데 유독 서대문을 허물어야 했던 그 이유가 뭘까? 짐작컨데, 중국과의 영향력이 끝났음을 시사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한국인들의 자주적 행사였는지 아니면 총독부의 사주가 배경에서 움직였는지... 나는 모른다.


아무튼 우리 가족은 수십년을 살던 종로구 도렴동의 한옥을 팔고 내가 고교 2학년이 되던 봄에 불광동으로 이사를 갔다. 도렴동이란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쪽으로 난 서소문과 광화문과의 사이에 있는 동네이고 세종회관의 뒤가 되는 곳이다.


10여년 전에 지하철을 타고 불광동 정거장에 내렸더니, 내가 살던 집에는 큰 건물이 들어서 있고, 그 바로 우측으로 정동으로 나가는 터널이 멀리 보이는 그런 곳으로 개발되어 있더군. 1962년 경에 김신조란 북한특수부대가 청와대 인근까지 덮치는 불상사가 나면서 세금정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생겼고, 북악산을 넘기는 '스카이 하이웨이'가 나게 되었다.


1960년 초에 당시에 국민주택의 맨 오른쪽 모퉁이의 우리 집으로 박성준이를 데리고 왔다. 아버지에게 인사를 시켰더니 너부죽이 절을 마치고는 무릅을 꿇은 자세로 계면적게 웃는 표정으로 대학에서 만난 나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아버지 말씀이, "내 자식이 많이 부족하니 자네가 잘 가르쳐서 사람이 되게 하라." 성준이가 이 뜻밖의 부탁에, "저 자신도 부족한데 어찌 그런 일을 감당하겠읍니까?"


이 장면을 지켜보던 내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틈을 타서 부려부랴 내 방으로 그를 끌어들여들였다. 어른스러운 그를 좋게 보았더는 건지, 어른으로 자식친구에게 하는 인삿말인지... 시험지옥에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 날이후로 박성준이는 자주 우리 집을 들락거렸다. 애지중지하는 아들의 친구라 해서 어머니는 늘 정성스러운 밥상으로 그를 대접하였다. 내 눈에 두두러 졌던 것은 그는 늘 무슨 책을 손에 들고 다녔다. '思想界(사상계)'라는 잡지가 아니면 文庫版(문고판)의 철학, 종교 또는 문학서적들이었다. 때때로 나름의 논평도 해주었고 감동하는 눈치도 보였으나 나로서는 별로 흥미있는 과제는 아니었다. 듣는둥 마는둥 했지만 잘 모르는 분야에 心氣(심기)가 편치 만은 않았다.


옳치!...이 친구에게 지지않을 만한 무슨 책을 나도 읽어야 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로 대학시험준비를 공부해야 할지 불안해 했었다. 생각 끝에 종로 5가의 중고책방들을 뒤지다가 여러해 전의 시험문제들을 뫃아놓은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읽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던 내가 아닌가? . 아하!!! 이거 별거 아니구나 하는 감이 왔다던 바다. 이번에도 단시간 내에 버금가는 실력을 발휘하는 방도를 찾기 위해서 서가에서 採根談(채근담)이란 제목의 책을 샀다. 그러고 "대화의 요령"이란 책도 쌌다. 또 "유머 모듭집”이란 것도 있어서 그것을 사서 읽었지 않았게나. 그기로 그가 김창준이가 방문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가 나타났다. 나도 지지않고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채근담이나 유머를 현실적으로 갑자기 구사한다는 것은 실로 꿈같은 얘기더군. 새 책들을 내 책장에서 발견하그가 피식 웃었다.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더니, "어떻게 이런 책을 읽으려 하니? 어리 뻥뻥해서 할 말을 내게 이렇게 잘라 말했다..


"정보만을 수집한 책은 뼈와 살이 되지 못한다. 무슨 책이든지 原典(원전)을 읽어야 한다. 남이 소화한 것들을 받아먹다가 보면, 정신년령이 결코 성장하지 않는다...... 뭐 이런 쪼의 말을 남기면서 한심하다는 듯...씀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더군. 챙피해진 내가 무슨 변명을 들여댔겠는가? 눈을 껌뻑이며 그저 잠잠할 수 밖에... 이 날 이후로 나는 완전히 약코가 죽게 되었다. 적어도 그 방면에서는.


그에게 유일한 동무는 책일 수 밖에 없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나이에 고아원에서 살면서 어떻게 자긍심을 찾을 수 있었을까? 오직 책 속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 억울한 민족적 울분을 토로한 지식인들의 고향이 마침 통영이란 곳이 그 바로 옆동네가 옆동네였던지라 그들 문학인들과 호흡을 같이 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을 것이다.


대학의 강의실에서나 우리 집에서 맛상을 같이 했고, 한 이불 속에서 새벽까지 대화의 대화를 거듭했다. 어머니의 저녁상을 받아놓은 어느 날, 먹기를 않고 한동안 머뭇거렸다. 이를 의식한 내가 물으려는 참에 그가 말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와 마주 앉아서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해서 수저를 내려놓자, "고아원에서는 긴 테이불에서 모두들 같이 먹었었고, 가정교사로는 늘 혼자 먹는 독상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하고 맛상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 바로 식사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나는 혼자 먹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는 말을 들은 후로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회식하는 교회의 행사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음편에 계속)


禪涅槃


2018-01-12 14:5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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