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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붉게 (제5편: 6-25 민족상잔의 고아)
01/11/201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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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6-25 민족상잔의 고아였다. 북조선 인민군대가 38선을 넘어 서울을 3일 만에 들이닥쳤던 6-25 사변이 터지던 때에 그와 남동생은 무슨 이유로 인지 둘만 고향인 삼천포에 남아있었다 한다. 아버지는 당시에 서울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고 누님과 형이 있었다고 했다. 그 전쟁의 와중에서 가족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의 준비 없이 갑자기 이같은 침략을 당하자 “염려하지 말라”는 녹화한 방송을 계속 내보내면서 자기들은 한강다리를 건넜고, 일반 시민들 대부분이 서울에 남아서 거의 굶다시피 3개울을 보냈어야 했다. 북조선의 공산당들은 저희들 눈에 '부르죠아지'로 보이는 인사들을 수색해서 북으로 끌어가던가 아니면 즉결처분을 일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종적을 감추었고, 남어지 아녀자들은 도토리를 줏으러 공원이나 산과 들을 헤매야 했었다. 그리고 미국의 B29 폭격기와 전투기가 밤낮으로 서울시내의 군사적 목표물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인천상륙이 있던 날 밤에는 인천바다에서 쏘아대는 함포사격이 내가 살던 중앙청의 인근동네로 수없이 떨어졌다. 그런 일이 있기 전에 군비행기에서 삐라를 살포했다만 어디로 피신할지 모르던 아수라장의 포탄 속을 뛰어 다녔다. 당시 내 나이 10살에 죽은 시체도 많이 보았고 광화문 일대의 페허에서 여전의 형체를 되살려야 했었다.


침략 3개월의 잠간 사이에 전라도까지 빼았기고 대구의 북쪽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UN군과 대치하던 급박한 상황에서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 작적이 유효하여 1950년 9월 28일에 서울이 재탈환되었으나,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미군의 주력부대가 중공군의 '새끼줄 작전'과 인해전술에 말려들어 흥남부두에서 치욕적 후퇴를 해야 했고, 급기야 서울시민들이 그 다음 해인 1951년 1월 4일에 서울을 버리고 시민들이 기차 지붕 위에 진을 치면서 남쪽으로 피난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성준이의 식구들은 그 대열에 섞여있지 않았다. 이로서 창준이는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당시의 그의 나이는 11살이었다. 처음에는 친척집들을 전전했지만, 오래 있지 못하고 결국 고아원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런 중에도 다행이 공부를 잘해서 삼천포중학교를 다녔고 고아원장의 아들이 경남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가정교사로서 부산으로 따라가다가 보니, 자기도 해동고등학교를 다녔고 또 그 학교를 졸업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서울에서 출생해서 거기서 오래 살았지만 막상 서울의 유명 유적지를 관람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날에 나는 서울구경을 시켜준답시고 박성준이를 불러내어 창덕궁을 둘러보고 있었다. 정문 오른쪽에 고종황제의 승용차가 두어 대 있었고, 그가 쓰던 조선 최초의 전화기도 전시되어 있다. 궁내의 여러 건물들과 정원들을 돌아보는 사이사이에 그는 자기 얘기를 들려주었다.


박성준이는 통영에서 서쪽으로 한 10여리 되는 삼천포에서 왔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변호사를 했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살았었다는데, 원래 고향은 삼천포로서 어머니는 일본에 유학한 인테리였었다고 했다. 삼천포 여고를 창립한 사람들 중에 한 분이었고, 당시에 '하이힐' 빼따구두를 신었었던 신식여성이었다고..


자기가 어떻게 힘들게 서울상대를 입학하게 된 얘기로 이어갔다. 부산바닥의 날고 기는 어깨들의 흠모와 보호아래서 천재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서울대학을 감히 지망한다는 것은 무리한 도전이었다고 했다. 우선 학교의 선생실력도 마땅치 않았고 참고서적이나 시험경향을 귀띔해줄 친척이나 친구도 없었다. 


문제는 고아원 출신의 궁핍한 경제사정이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영어 구문론'이란 책이 참 좋았다고 말해주었다만, 그 책을 사서 공부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낸 것이 그 책을 빌려다가 백지에다 전부 옮겨써 가지고 통학길에서 그것을 읽었다고 말했다. 실은 나도 이아무개 교수가 펴낸 '구문론'을 읽고 많은 도움을 받았던 처지였기에, 이처럼 어렵게 공부해서 대학에 입학한 그를 다시 보게되었다. 비록 두번째의 시도였지만...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노력의 결과가 아닌가?


당시에 우리 신입생들을 모아놓고 두번이나 또는 그 이상 시험쳐서 입학한 신입생들은 손을 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약 '3분의 1' 이 손을 드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우리 구릅에 끼었던 한 친구는 3번이나 시도해서 입학할 수 있었다. 이병철씨의 삼성에 입사하여 이곳 저곳에서 중역을 하다가, 한국전통마을을 재현한 '무슨 전통마을이란 곳'의 책임자를 하다가 은퇴했지만. 이것을 '三受(삼수)'라고 하던데, 하여간 이 친구는 二受生(이수생)이었으니 행운아라 말해야 할지?


걷다가 보니까 秘園(비원)이란 곳이 나타났다. 그 마즈막한 뒷동산을 오르니 궁궐 밖으로 시내가 내려다 보였다. 적당한 잔디밭 위를 찾아 앉아서 그의 고달픈 과거 얘기에 귀를 기우렸다. 그의 손에는 벌써부터 '앙드레 지드'라는 불란서 문학가의 책이 들려있었다. "사랑과 행복의 조건"이라고... 당시에 막 출간된 소위 베스트 쎌라였던 모양이다. 내게 그 책을 들쳐보이면서 "우정은 무었인가, 또는 "진실이란 무었인가" 또는 "사랑이란 무었인가"하는 제목의 글을 찾아내어 내게 들려주었다.


나한테는 너무나 생소한 화제였다. 나는 그때 까지 한번도 우정이 무언가, 진실이 무언가, 더구나 사랑의 의미가 내게 무슨 상관인가를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박성준이게는 매우 의미심장했던 모양이다. 감격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찬찬히 그 뜻을 풀이해 주었다. 삶의 진정한 가치를 탐구하려면 그런 기본적인 개념을 잘 알아야 한다는 얘긴데...


'문학인들을 많이 배출한 곳에서 온 사람답게 그는 그런 개념을 잘 파악했다는 건지, 고아로서 외로운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었다는 건지, 英-數-國의 교과서 벌레에게는 그것들이 왜 필요한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는 신이나는듯 '톨스토이'의 유명한 소설들이나 '도스토에프스키'의 것들도 들먹였다. 실은 나도 그런 유명한 고전을 읽어 본 적이 있었지만, 거기에 그 처럼의 깊은 삶의 의미가 숨겨있었는지 솔직히 몰랐다.


그는 화제를 돌려서 현재 어떻게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가를 말해주었다. 서울에 와서도 해오던 가정교사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그의 직업이었고, 학교를 다니는 수입원의 생활수단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나 당시에는 지방학생들이 그런 일에서 학비를 마련하던 시절이었다. 진지하다고 할까, 아니면 산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할까, 늘 어두운 그늘이 그의 얼굴에 서려있었고, 가냘픈 입술 사이로 드문 드문 씁쓸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민족의 비극을 한 몸에 떠안고 산 천애의 고아는 이렇게 허우적거려야 하나? 연민의 정으로 나를 몰아갔다. 잘 살지는 못했지만 부모 밑에서 그런대로 걱정없이 살아온 내가 천진난만하다고 할지, 세상의 모진 풍파에서 살아남는 도통한 어른이라고 봐주어야 할지, 하여간에 그는 내가 모르는 그 어떤 비밀을 많이 알고 있었다.


禪涅槃


2018-01-11 16:2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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