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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하는 자는 福이 있나니,
01/09/2018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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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유래는 자기가 원하는 것들이 세상에 그렇게 흔하지가 않다는 데에 있다. 우선 먹을 것, 잠자리, 또 성욕을 해결해야 한다.  이런 기본적인 것이 충족되면 더 맛있는 것, 더 좋은 집, 더 좋은 어떤 것들....”  You name it”을 위하여 우리는 엄청난 수고를 마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태를 영어로 “Fight or Flight”라고 미국의 識者(식자)들이 말씀하시더라. 즉 “싸우거나, 않되면  도망치는” 그런 현상을 첫째 단계라고 부른다.  동물의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본능적인 삶을 놓고 하는 말이다.  


이 경쟁의 세계에서 이겨내려면 상대를 제치고 살아 남아야 한다. 그러나 불리할 것 같으면 줄행랑을 쳐서 목숨을 부지하는 현명함을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들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인생을 살았었고,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있다.  "내 삶을 본능대로 유치하게 산다고?   얼토당토다.  말이 안된다!...  내가...?   문론, 흥분하시겠지!


둘째 단계는 싸우다 도망칠 것이 아니라, 항상 이기고 사는 방법을 강구하는 단계란다.   Deepak Chopra란 사람이 계신데, 그의 책, “How to know God” (부제; The Soul's Journey into the Mysteries) 에서는 반사의 단계(Reactive Response) 라고 명명했다.  소위 사회적 성공이란 것들이 이런 거다.  권력, 영향력, 신분, 그리고 재산 등등으로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필요한 필요조건의 영역을 말한다.

  

이런 조건이 맞지 않아서 불행하다든가, 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대해서 화가 난다는 등등의 불만들이다.  개에게 종을 치며 밥을 주다 보면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리는 Pavlov의 조건반사가 비근한 이의 예라 할 수있다.  일이 좋게 풀리면 다~ 자기 탓이라는 충분조건이 이에 해당한다.   이미 잘 갖추어 진 것은 오직 내 德(덕)이라는 자만심...  그렇게 믿는다는 얘기다.


셋째는 靈的安息(영적안식)... 예를 들면 마음의 평화(peace), 그 중심성(centeredness), 자기대로 의 용납(self-acceptance), 그리고 內的(내적)평정(inner silence)를 즐기는 수준이다.


네째에 도달한 사람은 '남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empathy), 용서할 마음이 생기며(forgiveness), 귀찮은 남을 견디어 주고(tolerance),  이 정도에 이르면 和平(화평)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고 하겠다.


다섯째 단계에서는 통찰하는 힘 (insight)을 가지게 된다는 거다.  이 과정을 거쳐서 靈的(영적)인 경지를 체험하면(inspiration), 이로써 예술이나 과학의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며(expanded creativity in art or science), 그리고 무제한의 새로운 발견(unlimited discovery)이 가능하게 된다.


여섯번째는 비죤(vision)을 보는 단계로, 경건하고(reverence), 남을 동정(Compassion)하고, 헌신적 봉사(devoted service), 끝으로 博愛(박애)의 정신(universal love)으로 삶을 사는 경지에 이른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神聖(신성)한 경지에 이르러, “모든 것과 완전히 하나됨”(wholeness)과 魂身一體(혼신일체; unity with the divine)를 달성하여 미래를 보며 올일을 예언하는 聖人(성인)의 차원에 산단다.  예수님이나 부처같은 분들이 그런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된다.  東西古今(동서고금)에 그러한 경지를 열망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 않았나?


작년에 “Further Along the Road Less Travelled” (부제: The Unending Journey toward Spiritual Growth)란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가, 내용이 좋아서 아주 사서 다시 정독했었다. 


그 저자는 Harvard 대학을 나오서 군대의 정신과의사로 오래 일하다가 30년전에 “Road Less Travelled”란 책을 써서 10여년 동안 New York Times에서 '베스트 셀러'로 300여만부를 팔았었다고 한다.  이 책의 “영적성장의 단계들”이란 한 '챕타'에서 사람들의 정신수준을 아래와 같이 분류를 하고 있었다.


그 분 말이 Emory University의 신학대학의 James Fowler란 교수가 쓴 “Stages of Faith”에서 6가지 신앙의 단계를 설명하고 있으나, 자기는 신학적 전문성을 떠나서 다음의 4가지로 사람들의 心性(심성)을 나눈다고 했다.


그 첫 단계에 속하는 사람들은 혼란(Chaos)과 無原則(무원칙)의 인생을 산다고 한다.  인구의 대략 20%에 해당하는 이들은 精神的(정신적)인 것과는 담을 쌓고, 社會의 사고뭉치들로서 자기본위로 '무슨 척'을 하면서 남을 이용하기에 급급한 부류들이란다.


감옥이나 정신병원에서 자주 맞나는데, 길거리에 활보하는 이들 중에는 자기관리를 아주 잘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그런 영향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 중에는 한가닥 했던 어디의 대통령이나 또는 유명한 설교가 (소위 먹사 또는 사이비 목사)도 여기에 포함되고 있다는 거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는 척(pretending)은 하지만 이들에게 공통되는 점은, 언젠가는 反社會的(반사회적)인 본성이 결국 들어나고 만다고 했다.  뚜렸한 이유없이 자살하는 경우를 가끔 보는데, 이것은 자기를 기만하던 '혼돈의 삶'에서 자신을 탈출하려던 강한 의지의 결과라고 판단된단다.


제2단계를 사는 사람들을 이렇게 분류했다. 어떤 조직체(institutions)에 의존하여 모든 것을 이미 공식화(Formal)된 그 법도에 의존하며 자신의 험한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종류의 사람들을 일괄해서 말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연해서 이렇게 어떤 절대자에게 매달리는... 그것이 감옥일 수도 있고, 군대생활일 경우와, 그리고 그 대다수는 여러 형태의 종교집단에 자신을 매어달고 安息(안식)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 조직들의 질서가 부모의 엄한 규율과 유사한 지라, 자신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그 신앙의 요구에 잘 맞추어 살다가 보면 "잘 되지 않겠나" 하는 태도다. 이들이 이런 습관에 일단 매이면 절대로 다른 사고와 색다른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이들의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죄수들이 형무소에서 모범적으로 형량을 살면 가석방의 혜택을 입는다.  그러나 일단 감옥을 벗어나서는 곧 옛날의 제1단계의 동물적 무법천지를 돌아감을 마다하지 않는다.  얼마 안되어 또다시 감옥으로 끌려와서는 다시 좀전의 절도있는 모범수로 돌아간단다.   처음부터 自有人(자유인)으로 멋대로 살았다면 사람들이 처음부터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겠다.  그는 그런 사람으로 제처놨으니 무슨 큰 변화를 그에게서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절에서나 교회에서 가장 신실하다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서 아주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일요일에 절에 가서나 교회에 돌아와서는 “죄인이로소이다”를 다시 외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부처 앞에서 ‘娑婆(사바)사바’를 웅얼댄다. 지난 週(주)에도 같은 기도를 했지 않았던가?  그렇게 하고 사는 줄을 모른다는 건지…, 이런 경건한 척 하는 사람들이 세상 밖에 나와서는 또 다시 제1단계의 생겨먹은 인생을 계속하지 않던가? 내 말이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진짜 죄인들이라고 볼 수가 있다.  교회나 절간이 바로 형무소요 풀려난 바깥세상은 자유세상이니 멋대로 살겠다는 거다.  이래도 저래도 죄인이다.


그러나 제3단계의 사람들은 이런 형식적이고 정해진 틀에 밖힌 어떤 종교적 사고방식에 속하기를 거부한단다. 왜냐하면, 자기네들은 어려서 부터 정신적으로 이미 훈련이 철저히 잘 돼있으니까, 새삼스레 그런 미신적이고 황당한 신화를 믿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가정의 아이들이 탈선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을 본다. 부모의 사랑이란 그 자체가 판에 밖힌 형식적인 것이고 보니 푸근한 인간미를 느끼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회의주의자” 혹은 개인주의자로 살기를 원한다. 기존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나름으로 새롭게 알기 원하는 그런 삶을 추구한다고 한다.  소위 자유를 사랑하는 멋있는(?) 인생을 말한다.


이런 길을 걷다가 보니, 옛적의 어떤 고정관념들에서 해방된 것은 좋았으나 혼자만의 노력이 힘들게 되면 다시 기성세력에 말려들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왕 나선 이몸, 우주의 신비나 거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스스로의 많은 고통을 격어 나간다. 결국 혼자의 삶이 곤고해 지다가 보면 다시 살겠다는 절규의 마지막에 靈的 지도자들의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하며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求道의 자세(seeking)가 결국 새로운 정신적 변화 (Spiritual Transformation)를, 소위 거듭나는 것 (靈的인 Resurrection) 혹은 Enlightment를 깨닫게 된다는 얘기였다.  배가 곺아봐야 빵의 고마움을 알고, 자신이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때, 비로서 천국을 찾게 된다는 말과 같다.


내가 왜 이런 장황한 얘기를 하는가? 우리가 어떤 단계에 속하던지 그것 조차 실은 확고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늘 유동적인 자세로 아래 위로 오르내리며 남과 어울린다. 자신도 확실하지 않고 남도 그렇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자신의 현주소도 모르며 또 남의 입장을 이해할 줄을 모른다. 싸움이 그칠 날이 없다.


제1단계 끼리는 동물의 세계가 시키는 대로 살다가 보니 본능의 언어와 몸짓이 통해서 서로의 이해가 매우 빠르다. 그런데 제2단계든가 3단계의 사람이 원시적 존재에게 자기들 딴에는 무슨 고상한 일을 하다가는 1단계에게는 오해를 크게 사는 경우가 자주있다. 반대로 1단계가 생겨먹은 대로 무지막지하게 나오면 2-3단계가 놀래 자빠질 수도 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내가 지금 같은 단계의 언어를 쓰고 있는가를 잘 살펴서 행동해야 한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평생을 교회생활하던 어떤 여자분이 암이란 병을 선언받았다. 최신의 치료를 받으면서 교인들에게 주님께 중보기도를 부탁했었다. 자신도 남을 사랑해야지 하나님이 미쁘게 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살폈더니 어떤 젊은 홀애비가 마침 혼자 사는 것이 보였다. 전에는 무심했었으나 병이 들고 보니 그 사람이 딱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날 팟죽을 쑤어가지고 그 집을 방문했다. 그 남자가 문전에서 그 병든 여인의 성의를 거절하고 뒤돌아서고 말았다. 이 남자가 왜 그랬을까요? 차원이 다른 사람들끼리 뭐를 서로 잘못 본것이었다.


나는 골푸장에서 동호인을 많이 만들어야 한국사람들 끼리 4명의 짝을 만들기 쉽다. 그래서 누가 한국사람 같으면 선득 먼저 인사를 하는 버릇이 있다. 이 날에도 그렇게 만난 사람과 짝이되어 막 나가려는데 낯선 사람이 보이길래 일부러 불러서 인사를 했다. 그런데 처음 같이 치려던 사람한테 내가 하는 짓이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자기 사전에는 모르는 사람한테는 모른척 하는 것이 예사였던 모양이었다. “이 분은 늘 이렇게 '나이쓰 하게'한다고 그 새 사람이 듣게 혼자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이 말을 듣고 한동안 생각했다. 아하~... 자기의 세계에서는 남에게 '나이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로구나. 소위 內-外를 하던 한국의 옛 습관이었다.


“화평케 하는 자는 福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말에는 이처럼 넘어야 할 단계가 산적해 있고, 자신이 지금 어느 위치에 와 있는 가를 깨닯아야 한다. 그래야 남과 마찰이 없이 交通(교통)할 수가 있다. 나아가서 남이 어느 싯점에 지금 머물러 있는가도 살펴야 한다. 내가 화평케 한다는 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한번 집적거려 봐서 통하지 않을 것 같으면 즉각 물러나는 것이 오히려 화평케 하는 일이다. 오해를 일으키면서 까지 화평케한다는 것은 자기 본의의 소행이며 오히려 싸움을 거는 소지가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현장을 보자.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데, 아버지여...저들을 赦(사: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하시더라. (Then Jesus said,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do.) <누가 23장 34절>  누울 자리보고 다리를 뻤쳐야 한다고 했지, 아마...


참고: <화평케하는 자는 福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마태복음 5장 9절-


禪涅槃


2018-01-09 07:4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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