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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涅槃(선열반)(zenilv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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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 會長(회장)과 秘書(비서)
11/13/2017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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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비서를 해볼 생각 있냐?>


밤은 깊어가는데 할일은 아직도 많았다. 그 많던 직원들이 하루 종일 들석이든 사무실 한쪽 앞자리에, 나는 혼자 남아서 그 나만의 타이프 라이타를 끌어않고 일했다. 세계 온갓 곳에서 우리를 어떻게 알고 보내오는지, 편지 답장을 써보내고 또 보내도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멀리는 부라질, 가깝게는 홍콩에서 이런 원단을 짤 수 있는가 저런 천을 파는가 문의해오는데, 그냥 모른척 내버려 놓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쓰레기통에 버릴 수도 없었다.


우리 과에는 직원이 두명 더 있었다. 한명은 이후락씨의 6촌 되는 대학후배였고, 또하나는 한양 공대 섬유과 엔지니어 출신 이 대리였었다. 중개 무역회사인 "이또쯔 상사"가 세계 곳곳에서 주문을 받으면 이영길이 한테 전화로 문의 해왔다. 그것이 기술상 가능한가, 채산이 맞는가, 선적기일이 맞는 가를 알아보는 일은 이석진 대리 소관이었다. 조건이 맞고 신용장이 확보되면 생산에 들어갔고 결국 선적했다. 모든 거래의 3 % - 5 %는 수수료로 내야했다. 그럼으로써 한 무역 행위가 완결됐다. 그동안 이런 전 과정을 이들은 전화로 해결해 왔다.


이런 때에 내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와서 보니 해외에서 날아든 상거래 문의편지들이 여기 저기 굴러다녔다가 쓰레기통에서 발견되곤 했다. 이것을 다시 꺼내어 파일을 하려니까, 파일 캐비넽에는 편지파일은 않보이고 샘풀 쪼가리만 가득했다. 내가 왔다고 자기네가 하던 일을 양보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나보고 뚜렸이 무었을 어떻게 하라고 일러준 사람도 없었다. 나는 이 상용편지들을 하나 둘씩 쓰레기통에서 찾아내어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황대리가 그만둔 것은 좋았는데, 박과장은 시장개척을 한답시고 해외로 나가 다녔고, 수출1과에는 나혼자 남게 되었다. 나는 이밤에도 직물 생산업자이면서 일본상사와 관계없는, 독립된 수출업자의 첫 걸음을 혼자서 탐색하고 있었다. 회사의 어느 누구도 이런 비죤의 방향을 나에게 제시한 사람은 없었다. 늦게 남아서 일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매일 밤못다한 편지들을 읽어보고, 답하고, 타이프 치며 일했다. 밤늦게 까지...


그런데 어느날 밤 10 쯤일까? 이제는 끝을 낼랴고 서두르는데 누가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곧바로 회장실로 들어갔다. 그쪽은 불을 꺼놓고 있었고 나는 일에 열중하던 터이라, 그 검은 그림자는 잠간 뒷 모습만 보였을  뿐이었다. 나는 그가 누군지 괘념할 필요가 없었던지라, 하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런 일이 있은 여러날이 지난 후, 이밤에도 나는 혼자 일하고 있었다. 나의 조용한 공간에 또 어느 누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관심을 쏟고 주의를 기우렸다. 최 회장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들어가면 들어갔지 내가 왜... 나는 내 할일을 계속했다. 거듭 얘기하지만, 이 일들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황 대리를 쫒아낸 후 국제 편지는 계속 날아오는데 제때에 이들을 처리해줄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즉 나의 기준에서 볼때 국제 "코레스폰던스" 를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됐다. 이런 의무감에 쫒겨서 나는 매일밤 이 짓을 하고 있었다. 국제무역은 편지에서 시작하여 통신으로 끝난다.


최 회장이 자기 사무실을 밤늦게 혼자서 찾아드는 것을 내가 이전에 안적도 없었고, 그가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나는 알 필요도 없었다. 하여간 우리는 여러번 맞났으나 회장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 적도 없었고, 나역시 그를 무시하고 밤 늦은 한 공간을 서로 호흡하며 지냈다.


후에 내가 최 회장의 비서가 되어 그 방을 들락거리다가 발견한 것은, 회장의 큰 마오가니 책상을 덮어논 유리판 밑에는 전 직원의 자리 위치와 그 직책과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때 비로서 나는 회장이 내가 누구며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직원이었던 것을 확인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사실 이 회사에 입사한 이후로 최 회장을 복도에서 어쩌다 잠간씩 만날 수는 있었어도, 그가 회사원을 독려한다든지 지시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 사람은 그저 큰 방을 차지한 사람으로 밖에는... 직원들과 직접적인 회사경영의 실무통솔과 인사관리등의 일들은 그의 동생 최종현 부사장의 소관이었던 모양이었다. 밖에서 정치적인 접선과 새로운 사업기회를 포착하는 일들은 최 회장이 도맡아 처리하는 것을 내가 비서가 된후에 비로소 알게되었다.


호주에서 돌아 온 1971년 쯤의 나는, 회사안에 설 자리가 마땅치 않았었다. 그 당시에 뉴욕에 또 하나의 지점을 막 차렸고, 독일의 "푸랑크 후르트"에도 진출한다는 말이 있었다. 수출1과에서는 내가 혹시 자기들의 자리를 뺐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나에게 찬바람을 날렸다. 나역시 그들을 괘심하게 생각하던 터라 그곳에 다시 섞여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의 해외지사원 생활이란 질투와 무관심 속에 버려진 고아같은 처지였었다. 무능력과 비협조... 더구나 새로온 부임한 무역담당 상무는 서울고 대선배인(아마도 5-6회) 정도로서, 내가 12회의 졸업생이었으니 6년 선배가 되는 셈이다. 이 사람이 회사 몰래 차려놓은 자기의 별도창구에 일거리를 보내라고 계속 압력을 넣고 있었다. 나는 이를 무시했다. 일부러 그런게 아니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않되는 그런 주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사건건이 나를 더 비참한 경지로 몰아넣었다. 또한 회사는 해외지점을 운영할 경제적 바탕이나 제도적 준비가 않된 상태였었다. 단지 국가에서 하라는 시책에 밀려서 나를 그곳에 내동댕이 쳐놓았던 것이었다.


"이또쯔 상사"는 왜 너 혼자 시장을 개척하려 드느냐..., 그것이 너희 본사의 지시냐를 따지면서 나를 괴롭혔다. 내가 그곳에서 독립된 상활동을 하는 것은 "이또쯔" 상사의 그때 까지의 중개상 위치를 위태롭게 한다고 그들은 봤었다. 하지만 나는 국가에서 시장개척을 하라고 거기에 보내졌던 사람이었다. 중개상인들의 뒷바라지를 하라고 나를 보낸 것은 아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회사는 아무 의견이 없었다.


나는 지쳐서 돌아왔다. 귀국한 나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회사의 뜻을 나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느날 나에게 본부장이란 타이틀을 주면서 책상 하나를 마련해 주었다. 일본, 뉴욕, 시드니의 지사를 통괄하라는 것이다. 문론 직원은 나 혼자였다. 일거리는 뉴욕에서 온 편지 두장 뿐이었다. 몇년 후에 해외지사의 수가 늘면서 이 본부장 자리가 엄청난 권력의 자리가 됐다는 얘기를 미국에 이민와서 들었다.


아무튼 그 초창기에 나는 그 본부장 자리에서 파리나 잡고 있었다. 어느날 회장실에서 나를 부른다 하여 회장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최 회장과 최 부사장이, 그리고 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최 회장이 직접 나에게 물어왔다.


"... 내 비서를 해볼 생각이 있냐?"


너무나 갑자기 묻는 비서란 말에 나는 당황했다. 그것이 어떤 일인지, 내가 과연 해낼 수 있는지, 그걸 하면 내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생각해 볼 틈이 없었다. 내가 머뭇거렸다.


비서란 회사 안에서나 밖에서 내가 배우고 경험해왔던 무역의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그런 것이다. 나를 비서의 자리에 앉히는 것은 회사의 낭비였을 뿐만아니라, 나의 능력의 밖에 속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남의 녹을 먹는 입장에서 않하겠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회사의 총수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데...


"힘껏 노력해 보겠읍니다"


이걸로서 나는 비서라는, 팔자에도 없었던 자리를 떠맡고 말았다. 그리고 회장실 바깥에 놓여진 한 책상에 앉으면서 새 일을 시작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회사의 어느 누구도 "비서란 이런 것" 이라고 나를 가르쳐준 적도 없었고, 나 또한 그것을 어떻게 하야 하는 건지 전혀 아는 바 없었다.


뒤돌아 볼때, 그 비서란 직책은 별도의 학교를 나온 사람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태어나면서 부터 비서가 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러다 보니, 회장이 나의 비서가 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그가 실무에서 나를 직접 가르쳐야 했다. 어떤 때는 하도 답답한지 신경질이 머리 끝까지 올라가는 것을 참느라고 애쓰는 모습도 나는 여러번 보았다. 그러나 어쩐일인지 정작 나를 감정적으로 나무래고 야단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한번은 대우실업의 창업자인 김우중씨가 최회장을 방문해서 비서실에서 기다리던 참에 호주의 대우지점장인 조기성씨의 얘기를 건넸었다. 이 사람은 '도요멩까'라는 일본상사의 한국 판매담당 중개인으로 김우중씨가 회사를 시작하던 시절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분이다. 그는 가족까지 거느리고 호주로 아예 이민갔었는데, 내가 객지에서 고생할 때에 이분집에 가끔 초청을 받아서 한국음식을 허겁지겁 하였었던 과거가 있다.


조기성씨의 이름을 꺼내자 김회장이 하는 말이, "저 양반이 당신같은 경험이 있는 사람을 여기다가 처박아 놓는 그런 경영자란 얘기구먼. 그러니 머리쓰는게 뻥꾸라지... 비꼬는 투의 한마디를 남기더군. 당시에 대구에 많은 방직회사가 도산하던 시절이었는데, 최회장과 김회장이 이런 문제로 각축전을 벌렸던 것으로 알았다.


이 양반은 오진암이란 요정에서 "최지ral"로 별명이 붙어있는 대단한 성질의 사나이였다. 어쩌다 깨끗하게 차려입은 중년 부인들이 사무실에 와서 부채를 돌리면, 그 전날 밤 오진암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봐야했다. 최 회장이 중역들 앞에서 술상을 때려엎는 날리를 쳤다는 것이다. 문론 상당의 배상금을 지불했겠지.


때로는 자기가 가진 현금을 상위로 뿌리면, 거기에 합석한 기생이들이 그 돈을 주워가지려고 법석을 친다고 했다. 자기 돈만 날리는 것이 아니라 중역들의 돈까지 안주머니를 뒤져서... 이런 괴벽의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다음날 그는 반드시 뿌린 돈을 세어보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중역들의 돈은 어떻게 됐는지 나는 모른다.


아무튼 이렇게 성질 급하고 과격한 분이 나한테는 아주 참을성있게 잘 봐주는(?) 것을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무슨 이유일까?... 별 신통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혹시 내가 그때 밤늦게 혼자 남아 일했던 것을 최 회장은 고맙게 생각하셨던 것이 아닌가... 나는 나대로 그렇게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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