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당하고 사는 사람 / 단편소설
02/01/2017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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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 2017 한국소설 1월호 


늘 당하고 사는 사람


 에페타이즈

 

으응, 그렁께당한 사람이 한 일 이년 구르고 나면 빠곰이가 되갖고, 또 새로 온 놈 똑같이 벗겨 먹더라 이거여. 그래야 본전을 찾응께당신은 그러지 말더라고

에이, 아무리

그 사람은 봉기와 눈을 마주치면서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세상 일 누가 알까어차피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비정함만이 가득한, 배신이 밥 먹여 주는 정글 속이 아닌가. 후회 없이 부끄럼 없이 헤쳐갈 수 있을까...(중략)


봉기가 입맛을 다시자 정임이 피식 웃었다. 그리곤 말했다.

얼마 전엔 자기가 좋은 술 마시고 공연히 이유 없이 줘 터지고 당하더니, 오늘은 그 망할 년한테 내가 멀쩡하게 당해뿌렀네. 이넘에 동네는 그냥 매일 몇 놈씩 그러나 봐. 먹고 튀고 사기치고... 그러고 보면 늘 당하는 넘만 바보지!”

어쩌겠어. 세상이 그런걸... 일단 잊어버려. 살다 보면 그 망할 년 어디선가 한 번은 만나게 될 거야. 자기가 우연히 날 만나듯이 말이야. 세상은...좀 당하고 살면 맘이 편해요. 맘 풀어. 오늘 저녁내 혼내줄게

정임이 어이없다는 듯 봉기를 쳐다보며 말을 받았다....(본문중에서)

 

 

1

 

사람들은 그를 목사님이라고 불렀다. 봉기가 처음 그와 수인사를 나눌 때에도 소개시켜주던 선배가 그를 그렇게 불렀기에, 처음에는 정말로 그가 목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군대시절 군종병(軍宗兵)으로 복무했고, 그리고 그런 연줄로 미국에 와서 그냥 그렇게 행세만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두터운 안경까지 끼고 있어서 아이들 문자로 목사(目四)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안경을 썼어도 근육이 제법 탱글탱글하고 모난 얼굴이 꽤나 강인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봉기는 속으로, 생김새로 봐서는 서울 어디 뒷골목 술집의 기도출신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생김새와 다르게 상당히 순진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아무 화제나 빠지지 않고 꼭 끼어들며 , 그거 말이야, 나가 군대 있을 때 봤는데 말이시어쩌고하는 잘난 척만 하지 않는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인물이었다. 사실 그렇게 잘난 척하는 사람일수록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구렁이가 앉아 있지는 않으니까.

 

그는 수영장 청소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맡아 하는 수영장은 스물 댓 개 정도였는데, 주로 한적한 부자 백인동네의 개인 저택에 있는 것이라 했다. 때맞춰 물을 갈아 주고, 소독해주고 또는 물이끼를 제거해주거나 수면에 떨어진 나무 이파리들을 건져내고 하는 작업이 그의 일이었다. 듣기에 따라선 아주 쉬워 보이는 작업 같았지만, 그는 일만 갔다 오면 매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번 해보더라고. 온 삭신이 다 아프당께. 이 일은 말이시, 하루에 다섯 탕 이상은 못 해여, 씨부럴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얼굴은 어둡지 않았다. 고정 잡(job)이 있다는 일종의 자랑스러움이랄까, 그런 표정이었다. 그는 가끔 푼돈도 만지는 것 같았다. 호기롭게 맥주 깡통이라도 사는 날은 그런 푼돈이 생긴 날이었다.

월급 받았수

봉기가 물어보면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안경을 닦았다.

가끔 말이여, 풀장 모타가 작동이 잘 안될 때가 있거덩. 대충 뜯어보면 잔부속 한두 개만 갈아 끼우면 될 때가 있잖겄어그때는 말이시, 적당히 고개를 갸웃하다가설랑 바가지 좀 씌우는거지 뭐.”

그래도 되는거유그러다 빵구나면 이거 될텐데……

봉기가 피식 웃으며 모가지 자르는 시늉을 하면, 그는 오히려 딱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곤 했다.

이런, 순진하긴. 이보라구, 그러니까 적당히양심에 안 찔리게 하는 거라구 나는. 그러고 솔직한 말로다가, 코쟁이 부자 노친네들 을메나 노랭인지 아는감열심히 일해주는 대신 보나스 삼아 좀 갈라먹자 이것이여

솔직해서 좋시다

그러면 그는 십팔번이 나왔다. 말인즉, 한국사람 얘기였다. 같은 동족끼리 사기 치고 피 빨아먹고 하는 얘기들을 뱉어놓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나는 말이시, 적어도 그런 짓은 안 한다 이말이여. 봐봐. 지난번도 얘기했지거 뭐냐, 비자 사기치는 놈들 말이여. 그 사탕발림헌 선전을 보고 찾아간 우리 동포들 을매나 피를 토하겄나 말이시. 어디 그뿐인감

하긴, 봉기도 동감했다. 목사의 말이 아니라도 보고 들은 일이 어디 한두 가지였던가. 언젠가 안면 있는 어떤 사람의 딱한 사정이 떠올랐다.

 

얘긴즉슨, 그 사람도 봉기처럼 어찌어찌 미국으로 흘러와 체류비자가 만료되었다고 했다. 소위 F-1이라는 유학 비자를 거금을 주고 신청했는데 변호사인지 사무장인지 하는 사람 왈, 처음엔 걱정일랑 마시오 하더니 반년도 훌쩍 넘어 10여 개월이 다 되가자 글쎄, 그게 빠꾸당했다네요하더란다. 당초부터 싹수가 없다 했으면 꿈이나 꾸지 않았을 것을, 돈만 날리고 나니 황당해진 그 친구 어쩔 수 없이 매달릴 수밖에. 그들은 그렇다면 정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이민국에 새로 어필해서 여하간 합법체류를 하게 해 줄 테니 또 몇 천불을 가져오라고 하더라나.

욕지거리가 나와도 어쩌랴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한국으로, 친구들에게로 구걸하다시피 그 돈을 마련해서 갖다 바쳤는데, 이상하게도 얼마 되지 않아 유학비자가 나왔다고 하면서 축하 말씀(?)과 더불어 온갖 생색을 다 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놈이 나중에 알고 보니 가짜일 줄이야

있잖아요, 즈그들도 여기 처음 왔을 땐 고생했을 테고 우리 같은 사람 심정 누구보다 잘 알 것 아니에요그런데 두 번씩이나 사기를 치면 되겠어요사람이라면 두 번째는 돈 아끼라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니에요너무 가증스러워요.”

그 사람은 분해하기 보다는 사람이 싫어진다고 하며 눈물을 글썽였었다. 그때 그 얘기를 들은 목사는 또 한 번 입에 거품을 물며 사기꾼들을 성토하다가 문득 그 사람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은 경험 했구먼. 하지만 웃고 마소. 열나서 속 끓이면 병난당께. 헌데, 난 당신이 걱정이구만

이 동네 말이시. 신참이 와서 두어 번 당하고 나면 억울해 갖고, 나중에 꼭 복수를 하더란 말이여.”

복수요

으응, 그렁께……당한 사람이 한 일 이년 구르고 나면 빠곰이가 되갖고, 또 새로 온 놈 똑같이 벗겨 먹더라 이거여. 그래야 본전을 찾응께……당신은 그러지 말더라고

에이, 아무리

그 사람은 봉기와 눈을 마주치면서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세상 일 누가 알까어차피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비정함만이 가득한, 배신이 밥 먹여 주는 정글 속이 아닌가. 후회 없이 부끄럼 없이 헤쳐갈 수 있을까. 봉기는 언젠가 가기 스스로도 황당하게 당(?)하고 말았던 어느 날의 봉변이 떠올라 혼자서 쓴 웃음을 머금었다,

 

 2


세상에증말 큰 일 날뻔 했네.”

아내인 정임이 물수건과 오렌지 쥬스를 쟁반에 받쳐 들고 방안으로 들어서며 기가 막힌 듯 혀를 끌끌 찼다. 봉기는 눈을 내리깐 채 부시시 일어나 앉으며 쥬스를 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텁텁하던 입속이 새큼한 액체 탓인지 한결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슬금 아내의 눈치를 보다간 헛기침을 하며 거울을 달라고 했다.

차암 내그래서 일 나가겠어요

그녀가 경대 서랍을 열곤 동글뱅이 손거울을 건네주며 목소리에 잔뜩 걱정을 담았다.

쉴거야, 오늘전화 좀 해줘

그는 짤막하게 대답하며 손거울을 받아 얼굴을 들이밀었다. 거울 속에는 눈두덩이 푸르뎅뎅하게 멍들어 있고 입술이 터지고 이마가 좀 찢어진 또 하나의 자기가 한심한 몰골로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는 눈시울을 찌푸리며 근육을 움직여보다가 욱신한 통증에 움찔 놀란다.

물수건

봉기는 멍든 부위를 가만히 싸안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이고오, 술냄새

아내가 그의 손을 밀치며 물수건을 접어 직접 그의 상처부위를 누르다 말고 코를 싸잡는다.

얼굴이 변했어

상처나 안 났으면 좋겠어요

봉기가 터진 입술을 쳐들며 혼잣소리로 말하자 정임은 안쓰럽게 그를 쳐다보다간 종내는 기도 안차다는 표정으로 쿡쿡 웃었다. 봉기는 그녀를 한번 흘깃 쳐다보며 팽개치듯 손거울을 던져버리곤 벌렁 누워버렸다. 그녀가 다시 옆으로 다가와 새로 빤 물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가만가만 닦아냈다.

어이 이봐요, 마누님

으응

있잖아저으기내 앞꼬리 좀 만져 볼래

뭐요

그녀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워서 보는 아내의 얼굴이 유난히 상큼해보였다. 봉기는 이상스럽게 맹렬한 성욕을 느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슬그머니 자기 아랫도리로 가져갔다.

아니이 아저씨 봐

정임이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화다닥 손을 뿌리치며 정말 기가 막힌 표정으로 얼른 몸을 피해버린다. 봉기가 쑥스럽게 히히 웃었다. 그녀는 한걸음 물러선 채 정말 못말려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이고 차암아저씬 구제불능이야, 구제불능. 일 안나갈라면 잠이나 푹 자요

그녀는 톡 쏘듯 말을 내뱉으며 얼른 밖으로 나가며 문을 탁 닫아버렸다. !…봉기는 공연히 혀를 차며 아래 춤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온 전신이 욱신욱신 정상이 아닌데도 거시기 녀석만은 무슨 생각인지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녀석을 움켜쥔 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가끔은 필름이 끊어졌지만 어제 저녁의 일들이 리마인드 되어 슬금슬금 그의 머릿속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어제 늦은 오후였다. 막 일을 끝내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오랜만에 후배인 오공(吾空) 도사가 전화를 했다.

헹님뭐하요

어어뭐하긴오랜만이요 요즘어떻소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일 끝났능교

지금 막뭔 좋은 일 있수

봉기는 요즘 안 그래도 목구멍이 근질대던 참이라 속으로 이 친구랑 알술이나 한잔 걸쳐야 되겠다고 미리 작정을 해 버렸다.

있지요, 나올랑교

어딘데

여기가 G스트릿 곰싸롱이라 카는덴데목사 헹님이 일찌감치 퍼질고 앉아 마부흥회 한번 하자카네요. 보니까 가스나도 몇개 있구만요

오공이 히힛 웃으며 슬큼 양념을 발랐다.

그 양반뭔일 있대

앙이몰라요 요즘 껄떡하면 보신탕 밝히쌌더니헹수가 징그럽다고 도망갔다나 우쨌다나

뭐라구

그가 다시 킬킬 웃었다.

앙이 앙이요, 농담이고마 빨리 오소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하지만 그런 곳은 보통 새벽까지 영업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진하게 한잔 꺾기로는 적당한 시간이라 생각되었다. 그는 부리나케 옷을 걸치곤 입맛을 다시며 곰싸롱으로 차를 몰았다. 헌데 거기까지는 좋았다. 아니, 오랜만에 마음 통하는 친구들을 만나 그야말로 부담 없이 허리띠 끌러놓고 개소리 쇠소리 씨부려 가며 걸 지게 퍼먹은 것까지는 끝내주게 좋았는데, 막판에 마()가 낄 줄이야.

 

얘긴 즉, 어언 새벽 3시나 다 되어 마담과 호스티스들의 바이 바이를 받으며 술집 문을 나서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청년 두엇이 다가와 사장님 약주 많이 하셨는데 음주운전 걸리면 큰일 난다, 대리운전 하시라는 바람에 아무 경계 없이 그대로 받아준 것이 바로 화근이 된 것이었다.

목사양반은 그래도 언제 전화를 때렸는지 그의 부인이 나타나 멱살 잡히듯 끌려가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오공과 봉기는 공연히 거들먹거리며 거금 20불씩을 주고 작자의 차 뒷자리에 올라앉았다가 봉변을 당한 셈이었다. 오공이 자기 차로 사라지고 봉기가 차에 실린 채 골목길을 돌아 나서자 앞의 대리 운전수 녀석이 사장님 시간도 늦었는데 친구 한명 같이 갈까요오우케이. 그런데 차가서고 문이 열리자 한 명이 아닌 서너 명이 달랑 그를 끌어내어 그야말로 아무 이유 없이 개 패듯 두들기곤 지갑서껀 홀랑 털어 날라버린 것이었다. 불가항력악몽이었다.

씨바, 여기가 어디라고 한국 흉내내고 거들먹거려맞아도 쌌네그나저나 오공이 녀석은 어찌됐을까

봉기는 후회 반, 분통 반의 심정으로 중얼거리다 짓쳐오는 잠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그 와중에도 오늘 저녁 일을 펑크 내면 매니저에게 잘려버리지 않을까 적이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어쩌랴, ‘잘림을 당하면또 할 수 없지 뭐...중얼 되면서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3

 

봉기가 실내 청소를 마치고 개운한 기분이 되는 것은 대략 하루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거리에 땅거미가 내려앉는 시각이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7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손님이 들려면 아직도 두어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얼굴 부기가 좀 빠지고 이틀 만에 출근한 그에게 매니저는 혀를 차며, 혼자 술 먹고 밤에 다니면 그런 사고 당하는 일 많다고 칼 맞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했다. 그리곤 앞으로 조심하라고, 또 그러면 해고 하겠다고 다짐을 주었다. 봉기는 꾸벅 머리를 숙이곤 실내를 둘러보았다. 지난 밤 매상이 비교적 뜸했던 관계로 오늘의 가게 청소는 한결 수월해 보였다.

스탠드 바 뉴욕 뉴욕

봉기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가 이곳에서 일자리를 구하기까진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듯 그를 채용해주는 곳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기왕지사 만리이국까지 흘러온 바에야 무슨 일이건 못하겠나. 미국이란 체면으로부터 자유로운 땅이라고 하지 않던가봉기는 소위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생전 경험도 없는 바텐더 일을 시작했었다. 정임에게 부탁해서 칵테일 책도 구해서 보고, 손님이 없는 낮 시간에 가게에서 책에 쓰인 대로 이 술, 저 술을 섞어 찔금찔금 맛을 보며 칵테일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노력 덕에 처음엔 청소부였지만 이제는 스탠드를 맡게 되었다.

 

실내는 언제나 어둠침침하고 습했다. 이 음습한 실내에서 할 일 없이 우두커니 앉아 시간을 죽이는 것은 봉기의 체질상 맞지 않아 손님이 없을 때에는 언제나 불을 가장 밝게 밝혀 놓았다. 그리고는 실내 정돈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카운터 뒤편의 즐비한 술병들도 반듯하게 줄을 맞추어 윤이 나게 닦았다. 지배인은 이런 그를 아주 만족해했다. 군대 내무반처럼 정리정돈에 철저한 봉기였기 때문이었다.

준비완료!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그는 무료함을 달래려 노래방 기기의 스위치를 올렸다. 노래나 한 곡조 때리자매일 이 시간쯤 혼자서 너 댓 곡씩 불러 젖히는 덕에 그의 노래 솜씨는 제법 늘어 있었다. 거울을 보며 무슨 가수나 된 것처럼 폼을 잡는 재미도 이젠 쑥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이놈의 마이크만 잡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였다. 어찌나 청승맞은지. 얼마 전엔 정임에게 호된 훈시(?)를 듣기도 했다. 젊은 사람이 구닥다리 뽕짝이나 부른다고. 요즘 뜨는 쌈빡한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 중늙은이 흉내나 내고 있다고 쫑코를 먹기도 했지만, 그래도 고향무정이나 비내리는 고모령이 부르기 쉽고 가슴에 오는 게 있는 것을 어쩌랴. 하지만 노래도 누구든지 함께 해야 흥이 나는 법이지, 혼자 폼 잡고 불러봤자 30분을 넘기면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봉기는 마이크를 소독수건으로 닦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고는 바깥 간판의 네온 스위치를 올렸다. 유리창을 통해 번쩍번쩍 샤르륵 샤르륵 돌아가는 뉴욕 뉴욕이라는 네온사인 글자가 현란스러웠다. 거리의 다른 상점들도 하나 둘 경쟁하듯 간판 불을 밝혔다. 손님을 꼬시기 위해

때마침 웬 횡재인가. 운이 좋은 건지 이 이른 시간에 첫 손님이 들이닥쳤다. 그것도 여러 명. 덩치가 굵직한 사내 서넛이 실내를 가득 채울 듯이 왁자지껄 들어왔다.

이 집엔 아가씨 없어요

그들이 스탠드에 진을 치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 . 조금 있으면 나올 겁니다.”

봉기가 머리를 굽신하자 그들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그를 쳐다보며 맥주 몇 병을 시켰다.

망할 놈들. 기집애 없으면 목구멍에 술이 안 넘어가나.

봉기는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도 얼른 맥주를 갖다 주고 접시에 안주를 담았다. 보아하니 돈은 안 될 놈들이었다. 생긴 것하고, 지들끼리 한국 부동산 경기가 어쩌고 몇 십억이 들락날락한다며 떠드는 것으로 봐선 제법 돈푼께나 만지는 업자들 같았지만, 안주도 안 시키고 맥주 몇 병에 더치페이를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젠장 할날 샌 친구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시간 여나 지났을까 그들은 일어나며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그냥 우물우물 나가버렸다.

에라 쌍놈들아잘 먹고 잘 살아라.

봉기는 울컥 열이 올라 스탠드 밑에서 주먹감자를 먹여주었지만 겉으로는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웃음 띤 얼굴로. 이럴 때 홀 서빙하는 미스 박이라도 빨리 나왔다면 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내새끼들이란 호스티스가 방긋방긋 웃으며 아양이라도 떨어주면 호기롭게 몇 십 불씩 팁을 주곤 하니까. 봉기는 팁 몇 푼 못 챙긴 것 때문에 속을 부글거리는 자신이 여간 한심스럽지 않아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사람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물건이었다.

생각해보면 봉기 자신도 미국에 처음 와서 굴러다니기 전엔 소위 팁이란 것에 대한 생각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한국식으로 익숙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10불 남짓한 밥 한 그릇 사먹고 도대체 팁을 얼마나 놓아야 할지가 항상 고민거리였다. 차라리 한국식으로 아예 청구서에 봉사료 몇 퍼센트하고 붙어 나오면 그냥 주고 말 일이겠지만, 솔직히 밥 한 끼에 소주라도 한잔 걸치면 밥보다 소주 값이 더 비싸 성질나고, 거기다 팁까지 주려면 억울한 생각이 들었기에 그냥 슬그머니 나온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친구들한테 얻어먹을 때에도 그들이 팁을 몇 십 불씩 주는 것을 보면 공연히 억울해져 씨바넘, 나나 좀 도와주지라며 속으로 꿍얼거렸었다그런데 입장이 바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물론 그 당시엔 봉기의 처지가 형편이 말이 아니었기에 그랬다손 치더라도, 그때 그를 접대한 종업원들은 속으로 얼마나 그를 욕했을까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사람들의 생리가 역겨워, 그리고 봉기 자신의 이중성이 마음에 안 들어 그는 문득 술집 일을 때려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한국에서 날아 온 부동산 졸부들에게 도 못 받고 당했다는 쪼잔한 생각에 그는 또 속이 부글거렸지만, 그래도 그들이 먹다 둔 반이나 남은 맥주들이 아까워 그대로 가져다 그냥 병째로 나팔을 불어버렸다. 그리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더러버서...!

 

4

 

봉기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정임이 소파에서 훌쩍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실성한 사림처럼 머리를 산발한 채, 꺽꺽거리는 모습으로 눈마저 벌겋게 충열되어 있었다.

아니, 왜 이래무슨 일이야

봉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큰일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푸푸거리며 숨을 몰아쉴 정도가 될 지경이 되었는지 걱정이 앞섰다.

원래 봉기의 아내 정임은 어느 때에는 아기처럼 천진난만, 순수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아주 돌쌍년이다 싶은 정도로 못 말리는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그런가 하면 먼 이국땅에서 어쩌다 봉기와 만나 어영부영 살림을 시작한 후, 신랑이 된 봉기에게 만큼은 어떤 여자가 그리할까 싶을 정도로 지극 정성을 다하는 현모양처의 기질도 갖고 있었다이를테면 삼중 구조의 성격이랄까. 그 원인이 무엇인지가끔 봉기는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언젠가 그녀가 말해준 것처럼 어린 시절 술망나니 아버지와 계모 슬하에서 외롭게 자라났고, 그랬기에 아주 어릴 때부터 눈치 코치만 동물적으로 발달하여 그리된 게 아닐까 하는, 그 결론 이상으로는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사실 우리네 주변에 그렇게 자란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모든 것이 본인 하기 나름인지라 정임이라고 남달리 그런 이유 때문에 세상을 삐딱하게 살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왔어밥 안 먹었지

그녀는 벌겋게 충열된 눈 자위를 스윽 문지르며 엉거주춤 일어나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졌다.

아니, 괜찮아.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마. 근데 정말 무슨 일이야어린 애도 아니고

치이. 자기는 친구 편지 읽다가도 울었으면서

그녀가 엉뚱한 소리를 뱉어내며 우는 듯 웃는 듯 애매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갑자기 봉기를 끌어안으며 임자 만났다는 듯 어깨를 떨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정말애기같이 왜 이래도대체 무슨 일인데얘길 좀 해봐

봉기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공연히 그녀가 안쓰러워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느낌이 그래서인지, 처음 만나 그녀를 안았을 때와는 달리 어쩐지 탄력도 줄었고, 몸도 야윈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자기가 혹 이 여자에게 뭔가 부담을 주고 있지나 않은지, 그래서 자기로 인해 무슨 일이나 일어난 것이 아닌지 더럭 의심이 생기면서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언젠가, 봉기가 직장을 그만두고 얼마간 빈둥거리며 매일 잠만 자고 있을 때였다. 밤늦게 들어온 그녀가 지나가는 말투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이구, 집안 정리나 좀 해놓지……운동도 좀 하고. 천생 한국 남자라니까

그때 그녀가 무슨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봉기는 그날 이후 공연히 섭한 마음이 들어 며칠을 그녀와 대화도 끊은 채 밤늦게까지 일거리를 찾아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집에 들어와서는 괜스레 울퉁불퉁 심통을 부리며 그녀를 괴롭혔었다. 결국엔 아무 잘못도 없는 정임이 아양 섞인 사과를 하며 고물고물 그의 거시기를 성나게 함으로써 서로 풀고 말았지만, 생각해보면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용렬스러운 한국산 남정네가 어디 봉기뿐일까.

도대체 왜 이러는 그러냐니까혹시나 때문에 무슨 일 있는 거야

봉기는 정색을 하며 포옹을 풀곤 다그치듯 물었다. 정임은 그의 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가만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 돈 떼였어

돈 떼였다구그 망할 년한테

정임은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온 듯 봉기의 옷자락을 놓고는 휴지에 코를 풀었다.

그 망할년이 누군데

오히려 어리둥절해진 봉기가 어눌하게 물었다. 정임은 언제 울었냐는 듯 그를 밀치곤 독해진 표정으로 식탁으로 갔다. 그리곤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밑반찬을 꺼내 그의 밥상을 차리며 사연을 늘어놓았다.

그 있잖아내 후배라고 소개해줬던, 스탠드 바 하던 그 년

... 그런데

그 년이 글쎄, 내가 곗돈 탄 걸 알고는 급하다면서 이틀만 쓰자더라구……지 체크까지 끊어주면서.”

봉기는 언젠가 인사를 나눴던 그 망할 년을 떠올렸다. 그녀의 후배라는 꽤나 곱상하고 활달한 인상이었는데, 그런데 그 여자가 정임의 돈을 네다바이 했다고그는 풀썩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삼만, 그 돈으로 우리 둘이 가게 차릴 밑천하려고 했단 말이야

정임이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많기도 하다. 난 그돈 있으면 은행 차리겄네. 흐흐. 근데...체크 받았다며그건

그 체크오늘 은행에 입금했더니 잔고가 없다고 나오더라. 그것만이면 내 말을 안하지.”

또 있어

게다가 분실신고까지 된 수표라는 거야.”

분실수표아니, 걔가 자기한테 끊어준 거라며

글쎄, 고년이 그래 놓고는 또 분실신고를 했나 봐. 나쁜 년그리곤 가게 문 닫고 행방불명이야

세상 참듣고 보니 완전히 계획적인 네다바이였다. 결과적으로 정임이만 호구였던 셈이다. 이 나라 이 바닥에 오면 대충 사람들이 그렇게 변하는 건지봉기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곤 정임의 볼을 가볍게 싸안아 쥐며 토닥였다.

할 수 없지 뭐. 잊어버려!“

정임이 피식 웃었다. 그리곤 말했다.

얼마 전엔 자기가 좋은 술 마시고 공연히 이유 없이 줘 터지고 당하더니, 오늘은 그 망할 년한테 내가 멀쩡하게 당해뿌렀네. 이넘에 동네는 그냥 매일 몇 놈씩 그러나 봐. 먹고 튀고 사기치고...그러고 보면 늘 당하는 넘만 바보지 !”

어쩌겠어. 세상이 그런걸... 잊어버려. 살다 보면 그 망할 년 어디선가 한 번은 만나게 될 거야. 자기가 우연히 날 만나듯이 말이야. 세상은...좀 당하고 살면 맘이 편해요. 맘 풀어. 오늘 저녁내 혼내줄게

정임이 어이없다는 듯 봉기를 쳐다보며 말을 받았다.

당하고 살면 맘이 편하다고?”

흐흐....!?”

봉기는 어벙하니 애매하게 웃었다.

...자기는 착하기도 하다!”

, 내가... 착하다고? 아니, 나 하나도 안착한데...”

봉기가 갑자기 말 실수라도 한 듯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어눌하게 중얼거리자, 정임이 그를 한참을 빤하게 바라보다가 풉- 하고 다시 한 번 실소를 날렸다. 그리곤 비로소 배시시 웃음을 머금곤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이듯 말했다.

하긴...이래서 내가 자기 좋아하거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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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남우(ysson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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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당하고 사는 사람 / 단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