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용상 중편소설 제6집 '도적님과 여인들'
09/15/201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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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용상 중편소설 제6

 

 

도적님과 여인들


                                                                  손   용  상 



< 작가메모>


이 중편소설 도적님과 여인들은 유럽 여행 중 우연하게 만난 중년 남녀 사이에 벌어지는 이른바 복고조의 멜로 애정소설이다스토리는 생판 픽션이 아닌 어느 정도는 내 젊은 시절의 체험에서 따 왔고더하여 주변에서 듣고 보았던 얘기를 근간으로 적당히 초를 치고 양념을 발라 구운 소설이다어쩌면 7-80년대 시절의 진부한 테마일 수도 있다. 따라서 요즘 일부 진보(?)의 평자들이 흔히 말하는 시대를 아우르는 디지털 세대의 주제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겠으나그래도 멜로는 멜로대로 설사 시대를 거스른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대로의 구성으로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를 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삶에서 사람과 사람끼리 만남의 인연은 서로가 좋고 싫음에 큰 이유가 없다일테면 어느 날 우연히 서로 만나 전기가 통하거나 또 헤어지는 현상은 좋으니까’ 만난 것이고 그러다 또 싫으니까‘ 갈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처음부터 지극히 계산적인 사람들도 있겠지만보통 생판 처녀 총각이 아닌인생의 쓴 맛 단 맛을 적당히 경험해본 중년의 남자와 여자들의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은 특히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적님과 여인들은 요즘의 일부 소설처럼 독자들의 정신을 어렵고 혼란하게 만들지 않았다일부 비평가들 말처럼 인상 깊은 개성적인 문체의 미학을 추구 하거나소설에서 사랑과 배신과 아픔과 극복그리고 심신의 쾌락을 전달하는데 까지도 표현이나 은유를 어렵게 배배 꼬아 자신의 현학(衒學)을 과시함으로써 독자들을 헛갈리게 만드는 일은 가능한 한 배제했다. 과문한 탓인지, 솔직히 나는 누군가가 말한 '인상 깊은 개성적인 문체의 미학 추구'란 말 자체가 뭔 지를 잘 모르겠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그냥 문장이 매끄럽고 내용이 재미있는 읽을 거리가 되어 끝날 때 뭔가 뇌리에 박히는 작은 메시라도 남든가, 혹은 입가에 조그만 미소라도 번진다면 그 소설은 낫 벳(not bad)’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항상 느끼는 바지만인간의 밑바닥을 보는 시선은 글을 어렵게 쓴다고 더 잘 보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그런 건 현란한 글 솜씨를 자랑하는 일부 평론가들에게 맡길 일이고암튼...독자들이 제 얘기를 끝까지 읽어주고 따뜻한 미소가 있기를 기대한다.<필자 주>                         


프롤로그


경마장엘 가면 기수가 경주용 말머리 양옆으로 뿔 같은 각을 붙여 말의 눈이 앞만 바라보고 뛰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 앞뒤 없이 마구 대시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전차같다고 했던가? 오동민-그는 그런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동기로 인해 스스로 이것이라고 판단하면 전혀 주변의 눈치 따위 보지 않고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참으로 특이한 전차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말처럼 다만 그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기수가 누구 인가 문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는 아무데나 함부로 빠져들지 않는 신중함도 가지고 있었고, 그 신중함이 지나쳐 어찌 보면 정말 놀라고 노해야 할 때는 눈썹 한 올 깜짝하지 않는 차가움도 갖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우스우리만치 혼신을 기울이는가 하면, 실처럼 가녀릴 정도로 정에 약하고, 남들이 시큰둥해 하며 웃고 넘기는 신파조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뚝뚝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한마디로 그는 다소 복잡한 성격 구조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동민 그는 무척 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누군가 가 경우 없이 그를 자극 한다거나 말짱한 얼굴로 그를 기만이라도 할라치면 그는 결코 타협 없는 집념으로 상대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가 하면, 그것이 이유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엔 평생을 상대에게 베풀고 관용할 줄도 아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또 역사와 예술, 문화에 대해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소양과 조예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사이비라고 평했지만, 수경이 보고 듣기엔 알만큼 알고 똑바른 시각으로 사물에 대한 비평도 곁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결코 사이비로 그를 폄하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멋진 잡놈의 속성이 있었다.

 

여권 운동가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

멋진 잡놈을 추방해버린 것은 아닐까 /

비겁하게 치마 속으로 손을 들이미는 졸개들은 많은데 /

온 사막을 헤매며 검은 눈썹을 태우는 /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 멸종 위기네

                                                              ㅡ 문정희의 다시 남자를 위하여에서

 

당신은 어떨 땐 가끔 네로 같아요

그들의 만남이 한참이 지난 후 언젠가 수경이 그를 쿡 찔렀을 때 동민은 눈살하나 찌푸림 없이 조용히 수경의 말을 수용했다.

, 가끔... 네로가 좋아요. 도적놈 심보에다 그의 폭정이나 난잡성은 싫어하지만 그의 다른 한쪽 면, 즉 다정다감한 측면이나 예술적인 소양에는 점수를 주고 있지요.”

 

오동민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쩌다 그녀는 그 사람의 연인이 되었다.

 

1


밤 열차는 거의 진동 없이 부드럽게 플랫폼을 벗어나 뿌우~ 인사하듯 기적을 한 번 울리곤 곧바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수경은 서두르지 않고 지정 좌석을 확인하곤 바로 식당 칸으로 자리를 옮겨 우선 맥주를 주문했다. 몹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그녀는 날라 온 맥주로 한 모금 목을 축이곤 차장 밖 캄캄한 어둠 속으로 눈을 던졌다. 차창 속에는 눈두덩이 부어올라 얼굴 전체가 푸석푸석해 보이는 웬 여인이 멀건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먼 친척같이 낯선 얼굴이었다.

싫어!

그녀는 낮게 독백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풀어헤쳐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귀찮게 흔들렸다. 그녀는 핸드백을 뒤져 머리 집게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짜증스럽게 핸드백 속을 훑어 고무 밴드 한 개를 찾아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겨 꽁지 머리로 묶었다. 차창 속에서 아까의 그 여인이 이번엔 머리를 뒤로 묶은 모습으로 또 다시 이쪽을 건너다 보고 있었다.

수경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창문에 얼굴을 갖다 붙였다. 차가운 유리 기운이 싸아하니 피부로 스며들어왔다. 유리창 속에서 낯선 여인 대신 먼 도시의 불빛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어둠을 뚫고 빛의 조각으로 그녀의 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빛의 조각들은 제 가끔의 빛으로 조각조각 하모니를 이루며 무언가 상징적인 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타쿤울람

수경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유대교 경전에 담긴 신비주의의 완성을 뜻한다든가? 세상에 흩어진 모든 조각들을 모아 빛을 담음으로써 그 모든 빛의 편린들이 종국엔 한 개의 커다란 빛으로 뭉쳐 신비의 세계, 즉 천국을 이룬다는 것으로 수경은 알고 있었다. 불교의 큰 뜻으로 보면 바로 화엄(華嚴)이 아닐까...

아름답다

수경은 비로소 기분이 조금 풀리며 창에서 머리를 떼었다. 또다시 낯선 여인의 얼굴이 그녀를 마주했다. 수경은 그녀를 향해 피식~ 의미 없이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돌려 맥주잔을 들다가 화들짝 감전된 사람처럼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오동민이었다. 며칠 전 에펠 탑 광장에서 만났던 그 남자, 원인 모르게 자신을 서성거리게 했던 바로 그 사람이 거기에 서있었다.

 

2

 

윤수경이 그 중년을 만난 것을 며칠 전 파리 에펠탑 광장에서였다.

그때 그녀는 아르바이트로 주말이면 그곳에서 관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관광객들은 그녀를 즐겁게도, 짜증나게도 했지만 말 그대로 관광객들인지라 비교적 후한 그림 값을 놓고 가는 편이기에 수경은 돈보다도 오히려 그 일을 즐기고 있었다.

오후 시간이었다. 그 중년사내 오동민이 불쑥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은. 그는 일행도 없이 혼자였다. 잘생긴 용모는 아니었지만 뭔가 분위기를 뿜어내는 그는 그런 인상의 사람이었다. 그 때 수경은 막 한 관광객의 초상화를 마무리해주고 잠깐 숨을 돌리고 있었는데, 그의 눈앞에 좀 색다른 신발, 마치 군화같이 투박한 구두를 신은 두 다리가 턱 버티고 멈춰 서면서 스스럼없는 한국말로 내 얼굴도 좀 그려줄래요?” 했었다. 그리곤 그는 국산 컵 라면을 들고 후루룩 면발을 입속으로 빨아들이며 마지막으로 국물을 비우고 입을 닦고 있었다.

수경은 그의 모습이 신기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보았다. 거기엔 웨이브 진 곱슬머리가 분위기 있게 어울리는 눈빛이 강렬한 한 사내가 잔잔하게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 공연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금방 눈을 내려 깔며 뜬금없이 물었다.

한국분이세요?”

. 오리지널입니다.”

괜스레 왈랑 해진 가슴으로 더듬거리듯 물은 수경의 질문에 그는 우렁한 목소리로 대꾸를 하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수경의 앞자리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이란 참 이상했다. 처음 본,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 중년이 왜 그렇게 그녀의 마음을 불안정하게 했는지수경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하리만치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도무지 데생이 제대로 되지 않았었다.

저기요, 정말 죄송한데요사실제가 오늘 몸이 좀 안 좋거든요괜찮으시면 내일 다시 오시면 안될까요?”

수경이 그를 데생했던 스케치북 두어 장을 뜯어내며 조그맣게 말하자 그는 고개를 갸웃한 채 듣기 좋게 웃었다.

그러죠 뭐. 근데어디 많이 안 좋으세요? 혈색이 안 좋은데컵 라면 한 개 만들어 드릴까요? 보온병에 뜨거운 물이 있는데...”

, 아니요. 됐어요. 그냥 좀어지러워서요.”

수경은 마치 누구에게 쫓기듯 화구를 챙겨들곤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오며 도무지 스스로에게 이해가 안가 짜증이 일었었다. 그리곤 그 다음날 그녀는 아무 이유 없이 그 일터에 나가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후 며칠간 수경은 원인 모르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밤잠을 설칠 정도로 안절부절 못하곤 했었다. 조울증세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아파트 거실과 침실을 서성거리며 갑자기 다가온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원인 모르게 자살이라도 해버릴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녀는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압박감을 털어내기 위해 학교 미술실을 찾아 새벽녘까지 자신을 학대하며 작품에 몰두하여도 보았고, 마치 바람난 여자처럼 또 어느 날은 밤늦게까지 거리를 쏘다니며 혼자서 바를 찾아 스탠드에 앉아 와인을 홀짝거려도 보았지만 도무지 뭔가에 씌운 것처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불쑥 생각해 낸 것이 여행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녀는 왜 이제야 그런 생각을 했는지 억울해하며 부랴부랴 옷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런데사람의 인연이란 그 끈이 따로 있는 것인지수경이 그 사람을 또 다시 만난 건 예정 없이 훌쩍 올라탄 그 때의 런던 행 유로열차 안에서였다.

 

3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니

첫눈에 뭔가를 느끼게 한 사람. 수경은 잘근 입술을 씹으며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인연일까? 악연일까, 아니면 좋은 만남일까? 그야말로 우연이라고 하기엔 뭔가 아쉬운 구석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과민일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으며 속으로 혹시나 내가 은연 중 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무심코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플랫폼에서 얼핏 아가씨를 봤는데잠깐 사이에 그냥 잃어버렸어요. 한참 찾았네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왜 찾았는데요?”

수경은 생각과는 달리 그의 말을 자르며 불쑥 물었다. 그는 눈가에 빙긋한 웃음기를 담고 강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냥요. 궁금하기도 하고그날 어지럽다면서 집에 갔잖아요

그래서요?”

수경은 스스로 생각해도 아무 이유 없이 말투가 마치 시비조가 되는 것 같았지만 왠지 이 남자에겐 그렇게라도 해야만 속이 다듬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남자가 잠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눈가에 웃음기를 거두었다.

숙녀께선... 내가 보기엔뭔지 모르지만, 스트레스가 가득한 것 같아요. 몸보다는 마음이 아픈 것 아닌가요?”

수경은 꿀꺽 침을 삼켰다. 공연한 투정을 부리듯 한 말투가 금방 후회스러워 당황스러워 졌다. 그러자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나 한 듯, 큰 오빠 같은 걱정 담긴 남자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그녀의 귓가에 다시금 내려앉았다.

 

, 있잖아요. 나쁜 사람 아니거든요. 경계 안 하셔도 되요. 그나저나... 뭐라고 부르면 되죠? 나는 오동민이고 건축쟁이죠. 사우디아라비아의 네모건설 근무 중이고, 지금은 휴가 겸 출장을 왔는데여가 선용중이죠.”

윤수경

그녀는 공연히 힘이 쭈욱 빠지며 기어들어가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냥 항복을 해버린 심정이었다.

같이, 맥주 마셔도 되죠?”

동민은 다시 눈가에 웃음을 띠며 수경에게 물었다. 그녀는 눈을 내려 깔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경은 건너편에 앉자 웨이터를 불러 맥주를 시키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 밑으로 쌍거플 없는 큰 눈이 조금 충혈 되어 있는 듯 했지만 눈빛엔 힘이 있었다. 반듯한 코, 약간 검은 듯 한 입술이 꽤나 자극적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창속엔 아까의 그 여자가 유리창을 통해 앞 쪽의 사내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다소 생경스럽게 비쳐왔다. 수경은 버릇처럼 머리를 매만지곤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기요, 사우디아라비아에 계세요? 거긴 어떤 나라에요? 무척 덥다던데, 저도 가끔 사막이 가보고 싶은데.”

동민이 풀썩 웃었다. 그는 맥주 한 잔을 따라 아주 시원스럽게 꿀컥꿀컥 목젖을 움직이며 단숨에 비웠다.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있어 선인장과 야자, 대추나무와 유도화가 자라긴 하지만, 그리 숙녀가 가볼만하게 낭만적인 곳은 못되죠.”

동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거기서뭘 하세요?”

도적질을 하고 있습니다.”

네에?“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그리곤 잠간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다간 불쑥 내뱉듯 말했다.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냥 남의 설계를 적당히 모방하서 고치고 디자인하며...루팡처럼 흔적 없이 훔치지요

“.......?”

아니, 그냥로마나 파리나 유럽처럼의 그 예술미가 담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는 남은 맥주를 따르며 다시 한 번 풀썩 웃었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저는 요, 프랑스에 올 때마다 루브르 박물관에 들려요. 갈 때마다 그 본채 건물을 보면 제 존재가 한없이 작게 느껴지거든요. 더구나 그 앞의 피라밋 형 유리 돔 건축물을 보면 너무 샘이나 미치겠어요. 본채 건물이야 아주 오래 전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유리구조물은 금세기 우리가 살아있는 시대에 설계된 것이라 같은 건축쟁이로서 너무 부럽고 화가 나거든요. 수경씬 그림을 그리시니제 심정 이해가 갈지 모르겠네요

알 것 같아요

얘기의 실마리가 건축과 회화 쪽으로 흘러가자 수경은 비로소 마음이 풀어지며 다시 한 번 천천히 동민의 여러 모를 살필 수가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오 선생님도 사막 모래벌판에서 설계를 하고 집을 짓는다면 그 것 또한 보람 있는 일이 아닌가요? 하지만.... 제 생각엔 모래구덩이 위에서 집이 어떻게 지어질지 솔직히 의문이네요.

그렇죠. 돈만 생각한다면... 그것만큼 괜찮은 잡(job)도 드물겠지요.”

동민이 입맛을 쩝 다시며 더운 듯 위 저고리를 벗어 옆 의자에 걸었다. 드물게 균형 잡힌 몸매가 와이셔츠 속으로 내비치며 수경은 문득 이 남자를 모델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4

 

4월 런던의 새벽은 아직도 쌀쌀한 기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차창에 비친 플랫폼은 안개비가 뿌옇게 내리고 있었고, 열차는 마지막으로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커다란 역사 안으로 그 머리를 막 들이밀고 있었다. 수경은 우두커니 차창 밖을 내다보며 문득 생각 난 듯 옷가방을 열고 준비해간 가디건 스웨터를 꺼내 블라우스 위에 걸쳐 입었다.

런던엔자주 오시나 봐요?”

자기 가방을 챙겨든 동민이 어느새 수경의 좌석 곁으로 다가와 뚜벅 말을 붙이며 손을 뻗어 스웨터에 붙은 머리카락 몇 올을 무심히 떼어내었다. 마치 연인의 옷에 묻은 보푸라기를 떼어내듯 동민의 그 몸짓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수경은 순간 멈칫 몸을 사리다가 얼른 숨을 고르며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가끔요. 이 곳 4월은 아직 춥거든요.”

,

동민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듯 수경의 옷가방을 들어 자기의 수트케이스 위에 걸쳐 얹었다. 그리곤 잠간을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저어기숙소가 어딘지물어봐도 돼요?”

아직워낙 벼락치기로 열차를 탔거든요. 여행 오면 가끔 묵는 피카딜리 근처의 모텔로 갈까해요

 

수경은 열차를 타면서 아차 했었다. 미리 전문으로 예약을 해야 했는데, 불쑥 생각해낸 여행길이라 그만 그 순서를 놓쳐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가끔 단골로 가는 모텔은 항상 빈방이 있었기에 그녀는 가서 하지, 하는 심정이었다. 동민이 또 다시 한참을 망설이다가 다시 어렵게 말을 건넸다.

저기요괜찮다면제가 묵는 숙소로 같이 가실래요? 거긴, 우리 회사랑 연계가 되어있어서 방 하나 더 잡긴 쉽거든요

수경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까지 식당차에서 얘기를 나눈 정황으로 보아 앞으로 며칠간 어차피 이 남자와 런던을 같이 돌아다닐 바에야 같은 숙소에 묵는 것이 편할 것이라고 이미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수경이 그녀가 묵을 숙소를 그에게 소개해줄까도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어딘데요?”

동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사보이요. 별이 꽤 되는 호텔이에요.”

그렇지만 거긴꽤 비싼 걸로 알고 있는데

수경은 속으로 자기가 무슨 갑부라고 일류 호텔씩이나 묵으려고 하는 건지 약간은 빈정대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동민이 그 눈치를 금방 알아차리곤 공연히 사정하듯 말까지 더듬거렸다.

, 거기요? 우리 회사 스폰서인 사우디 프린스가 그곳 주주인가그렇대요. 그래 서 회사 간부들이 출장가면 반값으로 할인해 주거든요. 수경씨 가셔도 그리 큰 부담은 안 될 거에요

그렇다면 저도 좋아요. 그럼, 방 하나만 따로 부탁드릴게요

오케이!”

수경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동민은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으며 마치 오랜 연인이나 된 듯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따듯한 손이었다. 새벽 냉기와 안개비 때문에 습기가 축축한 기온 속에서도 동민의 손은 전혀 그런 느낌이 없이 보송보송했다. 수경은 순간적으로 그에게서 손을 빼내려 잠깐 굳어 있었지만 이내 그의 체온이 전해오는 기분 좋은 느낌에 그냥 맡겨버린 채 문득 어느 여류작가의 에세이를 떠올렸다. 그 작가는 스킨십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손잡는 게 그렇게 좋아. 좋아하는 사람과 깍지 손을 끼고 산책을 한다든가,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든가 하면 마냥 행복해. 섹스도 이런 사소한 접촉, 이를테면 손을 잡아주거나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거나 귓불을 만져주거나그런 심플하지만 정이 가득한 터치는 사랑을 더욱 깊게 하는 게 아닐까.

 

수경은 동민의 손 안에 잡힌 손을 살그머니 빼 저도 모르게 다시 그와 새로이 깍지 손을 만들어 끼며 흠칫하는 동민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동민이 그녀를 돌아보며 문득 눈길에 정을 담았다. 수경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이 모든 것 때문에 그 여류작가의 생각에 새삼스레 동감을 느끼며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5

 

하늘엔 드물게 달까지 떠 있었다. 거의 일 년 내내 흐리고 안개가 낀 런던의 날씨는 세계적으로 소문난 사실이었지만, 그 일 년 중 반짝하는 날을 본다는 것은, 특히나 관광객들에겐 여간한 행운이 아니면 얻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수경이 그 날 새벽 열차에서 내려 숙소를 잡고 오전 내내 잠을 자며 피로를 풀고 있을 때 오동민이 꽤나 흥분된 목소리로 그녀를 깨웠었다.

일어나요, 해가 떴어요!”

정말요?!”

수경은 저도 모르게 이불을 젖히며 빠르게 일어나 창문의 커튼을 열었다. 정말이었다. 밝은 햇살이 창을 통해 눈부시게 흩어지고 있었다. 아래 광장엔 어느 틈엔지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오랜만에 쪼이는 해바라기를 하기 위해 간이 의자들을 펴는 모습이 활기차게 비쳐왔다.

희한도 해라.

런던에서 햇빛을 보다니수경은 공연히 마음이 즐거워지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

동민이 수화기 저쪽에서 이 여자가 뭘 중얼거리나 싶었는지 큰 소리로 되물어왔다.

, 아녜요. 런던에서 햇빛을 보다니 신기해서 혼잣말 했어요

그러게요. 하하하 참말 행운입니다. 더구나 나에겐 특히 그렇구만요. 미인 아가씨도 만나고 드물게 날씨도 좋으니내 오늘 톡톡히 한턱 쏘리다. 아래로 곧 내려 오시라요

동민은 진정으로 기쁜지 장난스럽게 사투리까지 섞으며 목소리가 더욱 쩌렁 울렸다.

수경은 미소를 띠며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그들은 오후 내내 주변의 파크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해바라기를 즐겼다. 그래봐야 불과 서너 시간 남짓. 오후 다섯 시가 안 되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저녁때 템즈 강변으로 갈 때까지 그들은 햇볕 한줄기라도 더 받아들이기 위해 공원 구석구석을 잘도 돌아다녔다. 그냥 오늘은 선택받은 날이니 박물관이니 미술관등엔 다음에 가고 잉글랜드 하느님이 내린 빛의 은총을 듬뿍 받자는 동민의 제안에 수경이 두말 않고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저녁시간, 동민이 수경을 데려간 곳은 템즈강 변의 유서 깊은 스테이크 하우스였다. 하우스 창문 너머로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잘랑잘랑 번득이는 템즈 강물은 강변 양 옆으로 늘어선 현대와 고전이 섞인 건물들에게 그저 침묵으로 천년 역사를 일러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난 말이에요

낮과는 달리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약간은 우울한 얼굴로 연기를 뿜어내고 있던 동민이 강물로 시선을 향한 채 입을 열었다.

가끔 이런 꿈을 꾸곤 했어요내게 만약 목숨을 걸만큼 사랑할 수 있는 연인이 생긴다면, 그녀에게 뭘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을까 라는

뭘 해주고 싶은가요?”

수경이 관심을 보이며 묻자 동민이 가늘게 눈을 모았다. 그리고는 빙긋이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우선 햇볕 좋은 바다 근처에 조그만 포도밭을 하나 사고 싶어요. 그리고 포도를 가꾸며 그 넝쿨 밑에 흰 테이블을 놓고 연인과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고 싶어요. 또 성능 좋은 차를 한 대 사서 그녀와 내 이름 첫 글자를 딴 번호판을 붙이고 주말이면 바닷가를 드라이브하고 싶어요. 아이들이 방학을 맞으면 계절 따라 록키나 알프스를 가 스노보드를 타던가, 아니면 지중해든 캘리포니아든 빛 좋은 바닷가에서 찬 맥주를 마시며 그녀에 등에 썬 오일을 발라주고 싶어요.”

그런 연인이 있나요?”

수경이 잔잔한 감동을 느끼며 조그맣게 물었다. 동민이 시선을 그녀 쪽으로 돌리며 허허롭게 웃었다.

아직요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가치가 있는 사람이 새로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어요. 내 욕심이지나친가요?”

아니요. 욕심지나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동민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아마도 그런 사람이 나타나리라 믿어요

수경은 공연히 그가 가여워지며 이 남자의 과거가 문득 궁금해졌다.

 

6

 

당신 또담배 좀 끊어요. 우리 목사님이 너무 마음 아파하세요.

불쑥 아내 정윤 요안나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동민은 저도 모르게 얼른 담배를 입에서 떼었다가 순간 피식 웃음을 날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왜 아버님을 목사님이라고 불러? 그냥 아빠라든지 아버지라든지 하면 안돼?”

동민이 불뚝하는 심정에 힐난하듯 말을 받자 그녀는 눈도 한 번 깜짝 않고 이렇게 대답하곤 했었다.

당신도 참우리 목사님은 사적으로는 아버지이지만 영적으론 하나님 아들이시잖아요? 모르세요? 예수님의 부모님들도 그 분을 그냥 아들로 부르지 않으셨어요.

이런! 그럼 장인어른이 예수님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그냥 말문을 닫아버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디 그뿐이었는가. 가끔 그가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그녀를 품으려 할라치면 정윤은 마치 큰 흉물을 대하듯 진저리를 치며 이런 식으로 하면 주님이 용서하지 않으실 거예요. 제발 진정하고 우리 함께 기도해요.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설교로 그의 욕정에 찬물을 뒤집어씌우곤 했다. 만정이 떨어진 그가 일부러 오기를 부리며 그녀를 보듬어 옥죄기라도 할라치면 정윤은 정말 큰 마귀라도 덮친 듯 버둥거리며 주여! 주여! 이 사람을 용서하소서!’를 수십 번이고 되뇌곤 했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온 것을.

이봐요, 마누라. 러브 이즈 터치라는 말도 못 들어봤어? 비틀즈 노래에 나오는 말인데. 남녀 간에 스킨 터치 없이 어떻게 사랑이 생기나? 당신 도대체 왜 그러는데?”

기가 막힌 동민이 오기 부림도 지쳐 그녀에게 떨어져 앉아 헛소리 삼아 그녀를 달래도 보았지만, 그럴 때 그녀가 그를 바라보는 눈길은 정말 마치 사탄이라도 보는듯한 눈빛이었고 그러면 동민은 술이 확 깨곤 했었다.

젠장! 도대체 당신이랑 그 짓 한번 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거야?

이이는 점잖지 못하게……어떻게 그렇게 무지막지한 소리를 해요? 주님께 부끄럽지도 않아요?

이런 제기럴! 그럼 공자님처럼 여편네와 그 짓 한번 하려면 날 받아 목욕재계하고 이부자리 정갈하게 깔고 요 앞에 꿇어 앉아 , 부인. 지금부터 합방할 터이니 준비하시오...’ 이러란 말이야? 그럼 당신 할 거야?

그녀는 아예 눈을 감은 채 중얼중얼. 오로지 주님!’ 만을 외치며 때로는 눈물까지 흘리곤 했었다. 이런 해프닝이 벌어지는 날에는 동민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지기 마련이었고 속에 천불이 일어 그냥 옷 주워 입고 바깥으로 나와 못다 채운 주량을 마저 채우는 것으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진정 이해하지 못 할 부분이 있었으니 정윤이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그가 주님의 품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동민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슬그머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중동 떠나기 전 받은 정윤의 편지가 못내 마음에 걸렸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그녀는 미국의 목사님그녀의 아버지께 가 있었다. 재주가 좋은 그의 장인은 미국에 간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아 꽤 큰 교회를 인수하여 대대적인 부흥회를 개최할 것이라며 정윤을 불러들였다. 당연히 그녀는 그를 돕기 위해 만사 제쳐놓고 비행기를 탔고, 떠나기 전 날 그녀는 동민에게 미국에 함께 갈 것을 제안했었다.

우리 목사님이 미국 가셔서 이제 자리를 잡으셨대요. 우리 같이 가요. 그곳에 가서도 당신 좋아하는 건축공부 할 수 있잖아요. 당신만 좋다면 목사님이랑 식구들 모두가 얼마나 반기시겠어요! 그리고 분명, 당신이 하고 싶은 일 언제든 할 수 있게 도와주실 거예요. 우리 가요, 함께...

동민의 대답은 간단했다.

난 생각 없으니 당신이나 가. 그리고 여건이 되면그냥 그곳에서 지내.

아내는 그의 말뜻을 잠시 가늠해 보는듯한 표정이다가 이내 좋은 뜻으로 해석한 듯 이렇게 말했다.

살 여건이 되면 그렇게 할게요. 그렇다고 그 사탄이 우글거리는 나라를 가시면 어떻게 해요? 대신 곧 내가 연락하면 당신도 바로 들어와야 해요. 알았죠?

그 때 봐서

동민은 말끝을 흐렸지만 그는 그 때만 해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제 이 여자와 헤어져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느닷없이 들게 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편지 속에는 구구절절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의 사랑 속에, 주님의 축복 속에 목사님과 그녀의 가족은 크나큰 영광과 은혜를 입었고, 교회도 나날이 번창하고 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는 새벽기도 나갈 때마다 동민이 주님 품에 함께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드리고 있음을 호소하고 있었다. 또한 이제부터라도 제발 술과 담배를 멀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과 함께 하루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을 끝으로 편지를 접고 있었다. 그녀의 글투로 보면 동민은 완전히 외계에 동떨어져있는 떠돌이 방탕아처럼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동민은 새삼 짜증이 일며 머리를 흔들며 내려놓았던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제 정말 이 여자와 헤어져야 하겠다라는 생각이 치밀었다. 그리고 그는 그때 다소 거칠더라도 멋대로의 자유스러움이 갑자기 그리워졌었다.

 

대학시절, 지금은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의 아버지가 목회를 하던 교회 확장 설계를 맡아 작업했던 인연으로 자의반 타의반에 맺어진 그들 부부는 그야말로 남들이 보면 모범부부 같았다. 하지만 그의 아내 정윤은 석녀인지, 성녀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부부생활에는 흥미가 없는 여자였다. 대화와 육체적 접촉이 뜨겁지 않은 그것은 항상 메마른 가을 낙엽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결혼생활이 반 십년이 넘었지만, 그들에겐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아이가 없었다.

당시 동민은 변두리 지역 버려진 농막 비스름한 오두막집 한 채를 헐값에 사들여 설계 작업실을 꾸미고 아예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이곳에서 먹고 자는 일이 더 많았다. 하긴, 집이고 들어가 봐야 남편 뒷바라지 보다는 사회봉사와 교회 활동에 혼이 빠진 아내와 맞닥뜨리면 서로가 그냥 소 닭 쳐다보듯 멀뚱멀뚱 바라만보다 몇 마디 건성 대화만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동민은 가능하면 작업실에 눌러앉는 날이 더욱 많았었다. 하지만 그래도 정윤이 맘에 걸려 미국으로 건너가 잠깐 함께 생활했지만, 그녀의 천성은 별로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중 다행히 그의 전공을 아끼는 선배의 소개로 마침 중동에 진출한 건설회사에 입사되면서 아예 중동으로 터전을 옮기고 말았다. 그리고 일 년이 넘어가자 정윤은 수시로 연락을 보내 보고 싶다는 말보다는 그가 이단자의 유혹을 빨리 털고 돌아오라고 울며 기도한다는 소식만 전해 오곤 했었다.

 

 7

 

포도주 두어 잔에 눈 밑이 발개진 수경은 문득 얼굴을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템스 강은 강변에 촘촘히 늘어선 가로등의 불빛과 달빛이 어우러져 일렁이는 물 굽이굽이가 물고기의 비늘처럼 번득이고 있었다.

저만큼 휘황한 오색등으로 치장한 유람선 한척이 뿌웅- 뱃고동을 울리며 강위를 거슬러 오고 있었다. 뱃전에서 밀려나는 물결들이 포말을 일구며 일렁일렁 그들이 앉은 창가까지 퍼져오고 있었다. 수경은 미끄러지는 배를 따라 시선을 옮기며 탁자 위에 놓인 담뱃갑에서 무심히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물었다. 동민이 암말 없이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주며 뚜벅 말했다.

? 담배 태우세요?”

가끔요

수경이 다시금 눈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서로의 눈빛이 마주치자 동민이 잔잔히 웃었다.

 

재미없죠?”

글쎄요동민씨의 과거 얘기, 재미가 없다기보다는그 기억들이 마치 톱니처럼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 자칫, 그러구...”

수경이 잠시 말을 멈추곤 와인 한 모금을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다. 동민이 눈에 웃음기를 거두곤 찬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구, 혹 부인에 대해 너무 일방적인 건 아닐까요? 그러면 그 무게만큼 실망과 슬픔도 커질 것 같은데동민씨 삶도 그런 편인가요?”

글쎄요

동민은 말을 얼버무리며 생각을 모아 보았다. 그녀의 말처럼 너무나 이빨이 맞지 않았던 정윤과의 기억들이 무딘 칼날처럼 살아 있어서 수시 때때로 그 몽당 칼날에 혼자서 찔리고 베인 적이 많았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동민은 마치 어린 시절에 엄마 지갑에서 잔돈을 훔치다 들켰을 때처럼 황당한 부끄러움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수경의 손이 가만히 탁자 위로 건너와 그의 손등을 덮었다.

 

아프세요?”

그녀가 조용한 미소를 건네며 부드럽게 물었다. 동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그맣게 뇌까렸다.

많이 베이고 찔렸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를 생각하면안쓰러움과 더불어 턱도 없이 증오심이 일곤 하지요. 이기적인지는 몰라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결코 그녀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뭔가 가슴에 꽉 들어찬 막힘을 아직도 소화해 낼 수가 없거든요

큰일이네요

수경이 배시시 웃으며 그의 손을 꽉 쥐었다 놓았다.

 

그래서떠나왔어요. 그녀에게 날 버리라고 종용한 후에 좋다 싫다는 그녀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그냥 훌쩍 떠나오고 말았지요.”

버리다니요?”

그냥날이 갈수록 그나마 그녀에게 진솔하게 기울였던 애정이 배신당한 느낌이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내 앞날이 까맣게 방향을 잊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었지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나를 사탄으로 매도하는 그녀의 위선과 기만에 대해 삭힐 수 없는 분노로 몸을 떨곤 했어요. 꼭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임자 있는 사람이 비록 예수님이라도 딴 사람한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위선이고 기만이니까요. 그래서 그녀에게 날 버리라고 했지요. 내가 결코 그녀를 버릴 수는 없었으니까요. 아예 그 쪽을 택하란 거지요. 어리석죠, ?”

동민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카랑카랑 톤이 높아지며 숨이 차올랐다.

 

8

 

수경은 우울했다. 새벽녘에 템즈 강변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호텔로 돌아온 그녀는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곤 가운을 걸친채 창문의 커튼을 열었다. 어둑한 바깥에는 그새 날씨가 바뀌었는지 낮과는 달리 밤안개가 깔려있었고 실처럼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인적이 거의 끊긴 아스팔트는 이따금씩 쏘아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젖은 얼굴을 드러내며 허허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슬비 속에 시간이 파묻히고 있었다.

수경은 냉장고로 가 미니어처 브랜디 한 병을 컵에다 따른 후 다시 창가로 향했다. 브랜디 잔을 기울이자 혀끝으로 감미로운 술 냄새가 은은히 후각을 타고 올라 곧 식도까지 퍼져가는 전율을 느꼈다. 그 전율에 따라 그녀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문득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지만 주머니를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화기로 다가가 동민을 부를까 생각하다가 혼자서 피식 웃으며 송수화기를 놓아버렸다.

 

호텔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포도주 한 병에 술이 약간 오른 듯한 오동민은 음울한 얼굴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고 그녀도 그녀대로 머리에 온갖 상념이 차올라 입을 닫고 있었다. 동민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정윤과의 후일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수경 역시 약간의 궁금증은 있었지만 더는 알려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마지막으로 독백처럼 흘린 말이 귓전에 맴돌며 그녀는 오늘밤 잠을 설칠 것 같은 예감에 다소의 피로감을 느꼈다.

 

중동 현장으로 돌아와 그래도 그동안 간직했던 아내와의 사진첩 등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하나하나 폐기하면서 과연 내가 옳은지 그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가슴에 앙금으로 남아있는 석연찮은 것들, 연유야 어떻든 나와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나를 사탄의 무리처럼 싸잡아 비난한 것은 그래도 남편이었던 나에 대한 무시라고밖엔 생각되지가 않더라구요. 그런데그녀와의 추억들이 담긴 많은 흔적들을 태우거나 파묻으면서도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내가 혹시 종교에 대한 생각이 너무 편협한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그녀에 대한 연민이었습니다. 나는 솔직히 신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거부감이 없거든요

동민이 문득 눈빛에 애증이 엇갈리며 입술을 깨물자 윤수경은 마음속으로 잔잔한 동요를 느끼며 그의 손을 잡았었다.

 

동민씨

네에

그렇네요. 보기보다는꽤 소심하시네요?”

그런가요? ”

동민은 슬그머니 그에게서 손을 빼며 시니컬하게 웃었다. 수경은 그러는 그의 손을 다시 끌 어다 톡톡 손등을 두드려주며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동민씨?”

네에

동민씨는 아직... 아내분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잖아요

동민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면요

……?”

필요한 만큼 시간을 가지세요. 포기하지도 말구요. 물론 힘들 거란 건 알지만, 동민씨가 더 나은 삶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요구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헤어진다고 해서 침묵만 남겨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요? 더구나 두 분은 지금헤어진 것이 아니잖아요. 어찌 보면... 동민씨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요? 정윤씨는 전혀 그렇지가 않는데

그럴까요?”

동민이 머리를 흔들며 남은 술잔을 단숨에 비우곤 씁쓸하게 웃었다.


9

 

수경은 예견처럼 공연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에펠 탑 광장에서 처음 맞닥뜨릴 때 알 수 없는 느낌을 준 남자- 오동민의 옛날이야기가 마치 스스로의 일처럼 느껴지며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정윤 요한나? 수경은 동민의 여자가 상상으로 떠오르며 문득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한 남자를 그토록 가슴 아프게 한 여인이라면 무언가 남다른 어떤 것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는 공연히 방안을 서성거리다 또 한 병 미니어처 술병의 뚜껑을 따며 텔레비전 스위치를 눌렀다.

 

제목을 알 수 없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두꺼운 안경을 낀 남자가 이웃집 여자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지적이고 슬픈 눈매를 가진 여자가 그에게 안긴 채 다소곳이 그의 호소를 듣고 있었다.

 

오랫동안 당신과 함께 있는 꿈을 꾸어왔어요. 지금 그 꿈이 실현되고 있네요. 정말 당신이 함께 있군요. 당신 입술에 키스도 하고 당신의 볼에, 두 눈에 입 맞추고 싶었던 꿈이 이뤄졌어요. 나는 이 날을 상상하며 창문 커튼 뒤에서 항상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당신은 언제나 움직이고 있었지요. 담배를 입에 문 채, 설거지를 하다가 얼굴에 뭔가 묻은 당신의 아이가 달려오면 당신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수도꼭지에 던지고는 조용히 웃으며 아이의 얼굴을 닦아주곤 했었죠.

나는 당신을 한 순간이라도 더 보기 위해 스토커처럼 당신을 따라다니며 지켜보았어요. 당신이 보이지 않으면 나는 안절부절못했고 창가에서, 현관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당신 집, 당신이 있는 창문을 훔쳐보곤 했지요. 왜 이런 집착이 생겼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당신은, 당신이 그 곳에 있다는 존재만으로 충분히 내게 희망을 주었지요

 

여자의 눈에 얼핏 물기가 서렸다. 그녀는 안경 낀 남자의 볼을 싸안으며 소나기처럼 입맞춤을 퍼부었고 이어 그들은 무너지듯 카펫위로 쓰러졌다. 옷이 한 꺼풀씩 벗겨지며 알몸이 되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그 동안의 목마름을 해갈하듯 원초의 유희를 나누며 온몸이 땀으로 젖도록 탐닉의 공간을 헤매다 잠깐사이 죽은 듯 몸짓을 멈추곤 침묵하고 있었다. 여자가 말했다.

 

떠난다면서요?

언제요?

여자가 침묵했다. 남자가 벗었던 안경을 찾아 쓰며 여자를 향했다.

, 우린 포기해야 하나요? 혼자 떠나기 싫어요.

여자가 일어나 자켓을 걸치며 창밖으로 보이는 그녀의 집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 실루엣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과 아이들의 모습이 비쳐지며 이쪽 커튼 뒤에 숨어서 그녀를 지켜보는 한 남자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여자가 흐트러진 머릿결을 뒤로 모아 묶으며 중얼거렸다.

그냥가세요. 어차피 함께 건너지 못할 강이라면혼자 떠나세요 !

 

수경은 한동안을 텔레비젼을 지켜보다가 마치 오동민의 얘기를 각색한 것 같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TV의 스위치를 눌러 꺼버리곤 시간을 보았다. 새벽 4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TV 옆 탁자에 놓인 전화기를 뚫어지듯 노려보았다.

-딩동뎅

어떤 텔레파시라도 통했는지 느닷없이 전화기의 벨이 울렸다. 그녀는 기겁을 하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동민이었다. 그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한 듯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수경이 조심스레 송수화기를 들자 그가 불쑥 물었다.

잤어요?”

아뇨

해요?”

그냥TV봤어요.”

괜찮아요?”

단조로운 대화였다. 두 사람의 가슴에 뭔가 할 말이 꽉 차있는 느낌이었지만 왠지 뱉어낼 수 있는 말이 한정되어있는 것 같아 답답했다. 동민이 잠간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

내일아니, 오늘은 뭐 할까요?”

글쎄요

수경이 우물거렸다. 그녀는 차라리 동민이 뻔뻔하더라도 잠이 안와요. 그쪽으로 가면 안되요? 스카치라도 한 잔 같이 마시면 좋겠네요- 했으면 그녀는 못이기는 척 허락해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동민이 또 잠깐을 망설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저으기테이트 미술관 알아요?”

수경이 피식 웃으며 송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우리내일아니, 오늘 거기 가볼래요?”

, 그러죠

거기가 봤어요?”

동민이 말문이 막힌 듯 잠간 입을 닫았다가 우물거리며 다시 이었다.

안 가봤는데, 거기 헨리무어의 조각상이 꽤 볼만하다던데안내해 줄래요?”

. 그래드릴게요.”

잘 자요

그쪽도요

그렇게 그들은 통화를 끝냈다.

바보같긴!

수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10

 

테이트 미술관은 영국의 현재와 과거가 함께 살아 숨 쉬는 듯 했다. 템즈 강변을 끼고 약 200여 년 전 런던의 남서쪽에 세워진 그 곳은 그 외모는 투박하고 현대적이지 못했지만 그 내부를 들어가면 전혀 그런 느낌을 가질 수가 없었다. 30여개의 전시실로 쪼개져있는 내부는 각 전시실마다 17세기부터 근세까지의 유명화가들의 작품들로 가득 쳐워져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곤 했다. 세 사람의 댄서를 추상화한 파블로 피카소가 거기 있었고, 앙리 루소의 화병에 담긴 <>이 생생히 살아 그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수경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 테이트 미술관의 핵심은 두 곳이라고 했다. 그 하나는 각 시대의 특징과 그 시대상들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근대 추상미술의 작품들이 전시된 것으로, 이들 작품들은 초현실주의 회화부터 미래파, 추상파, 다다이즘, 추상표현주의, 팝 아트, 개념미술 등등의 광범위한 표현기법을 보여주는 유럽미술을 대표하는 작품들의 전시장이라고 했다. 그녀는 마치 정식 가이드라도 된 양 동민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진지한 표정이었다.

추상미술 전시실 말고 또 하나는요, 조각 전시장이에요. 그곳엔현대 조각의 거장으로 불리는 헨리 무어의 작품이랑 다른 작가들의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어요. 사실은 조각상의 진수는 로댕의 것인데....여기엔 그 오리지널이 없어 아쉽지만, 특히 로댕의 연인 까미유 클로텔의 조각상은 숨이 막히게 하거덩요.... , 근데혹시, 피곤하세요?”

, 아뇨

동민은 그녀의 쉼 없이 재잘거리는 설명을 듣다가 문득 그 모습이 인상적이라 눈가에 웃음을 띠었다. 수경이 샐쭉하며 물었다.

근데 어째... 시큰둥한 표정이네요. 남은 한참 설명하고 있는데, 별로인 것 같군요

동민이 펄쩍 뛰었다.

아닙니다! 절대! 그냥수경씨좀 쉬게 했으면 좋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목마르지 않아요?”

치잇고양이 쥐 생각하시는것 같네요. 하긴, 목도 마르고 배도 좀 고프고

수경이 동민과 눈을 마주치며 입가에 살짝 웃음을 베어 물었다.

저 쪽에 커피샵이 있던데

동민이 무심히 수경에게 손을 내밀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그의 손가락을 잠간 잡았다 놓았다. 그리고 투정하듯 말했다.

, 배고파요

그럼우리 식당으로 갈까요?”

동민 역시 불현듯 시장기를 느끼며 시간을 보았다. 오후 2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어젯밤 잠을 설치고 아침 11시나 가까이 일어나 미술관으로 바로 왔으니 당연히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동민은 적잖이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미안해요

? 뭐가요?”

내가 미처 점심 사드릴 생각을 못했거든요

수경이 쿡쿡 웃었다. 그리곤 그의 손등을 툭 치며 눈을 흘겼다.

형광등이셔라미안한 거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네요. 숙녀 배고픈 거 못 챙겼으면오늘 저넉에 난 그냥 가버려야지생각했거든요

네에?”

동민이 머리를 긁으며 눈을 둥그렇게 뜨자 수경이 농담이 아니라는 듯 웃지도 않고 말했다.

정말이라니까요

동민은 앞장서서 또각또각 식당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간 멍하니 바라보다가 혼자 풀썩 웃었다. 수경은 수경대로 뒤쪽에서 멈칫하고 서있는 동민을 의식하며 날름 혀를 내밀었다.

그녀는 오늘 점심이 아니라 새벽녘 그녀의 마음을 못 읽은 동민이 공연히 괘씸스러워져 의자에 앉았어도 우정 목을 빳빳이 한 채 입술을 빼어 물었다. 동민은 그런 표정의 수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비록 농담이라고 하더라도 우물거리지 않고 똑 부러지게 자기 마음의 메시지를 표현해 준 그녀에게 또 다른 신선함을 느꼈다.

 

11

 

옆 좌석에 한 무리의 아이들이 식탁을 점령하고 앉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중학생 또래의 학생들인 듯 했다. 그들은 모두가 화판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스케치북에 뭔가를 그려 가진 채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그들의 소란스러움에 약간의 짜증이 일었으나 무심히 넘겨다본 스케치북엔 장난 아니게 미술관 대가들의 작품들이 스케치 되어 있어 동민은 순간적으로 호기심이 일었다.

뭐죠?”

동민이 수경을 향하며 눈으로 물었다. 수경도 그들의 화판을 보고 있었던 듯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며 살큼 웃었다.

여기는요화요일이나 수요일엔 미술전공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에게 전시 작가들의 작품을 모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어요. 쟤네들도 그런 그룹인 것 같은데요?”

그래요?”

동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 창의력이 불붙을 학생들에게 창작의 길을 일깨워주는 교육 이전에 대()화가들의 작품을 베끼게 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그는 얼핏 이해가 가질 않았다. 윤수경이 테이블에 놓였던 음료수를 단숨에 반이나 비우곤 그의 의구심을 간파한 듯 입을 열었다.

언젠가 신문에서 이런 모작 습관들이 나중에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동기가 될 수도 있지 않나하는 비판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

왜냐하면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들의 학생들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이 기법이나 색깔의 배합, 또는 그의 사상 등을 완전히 소화해내고 미술의 이해를 돕게 함으로써 진정한 예술가의 길을 걷게 하는 초보적인 교육으론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과정을 거쳐 스스로 성장하는게 아닐까요?”

그런가요?”

동민은 그녀의 설명이 이해가 가는 듯도 하고 또 아닌 것도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윤수경과 특별히 논쟁을 벌일 생각이 없었기에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눈을 돌리니, 식당의 벽면에는 많은 포스터들이 불어있었다. 각종 전시회 안내와 연극공연, 음악회 등의 홍보물들이 제각기의 특징 있는 디자인들을 뽐내고 있었다.

동민은 음료수로 목을 축이곤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 포스터들을 둘러보았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공연 안내가 있었고 장기공연 중인 햄릿의 포스터가 조명을 받고 있었으며, Fare Well My Love라는 부제가 달린 <1000일의 앤> 공연 그림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엔 기사의 칭호를 받은 로렌스 올리비에의 분장한 모습과 리차드 버튼의 젊은 시절 모습들도 현직 출연 배우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우와! 쟁쟁한 인물들이 총 망라되었네요

동민이 진정으로 감탄한 듯 눈을 크게 뜨자 윤수경도 안경을 꺼내 눈에 걸치며 시선을 벽으로 향했다가 문득 생각난 듯 동민에게 물었다.

헨리 8세와 앤 왕후의 얘기아세요?”

글쎄요. 자세히는 몰라도 당시 앤 왕후의 핏줄이 지금의 영국 왕실을 이어오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또그로 인해 헨리 왕이 교황과의 사이가 틀어져 영국 성공회가 생겨났다는 정도?

수경이 상큼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안경을 벗어 제 집에 넣으며 마침 화제가 생겼다는 듯이 다소 수다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그런 정치적인 이야기보다는 헨리 왕후와의 사랑 얘기에 더 관심이 많거든요. 더구나 몇 백 년 전에 이뤄졌던 세기적인 로맨스가 결국엔 최고의 비극으로 끝낸 앤 왕후의 1000일간의 삶이 가끔 가슴을 때리곤 해요. ... 하필이면 그토록 사랑하던 여자를 단두대에 세워 목을 잘랐는지아들 못 낳았다는 것이 죄가 되는 걸까요? 차라리 궁녀로 그대로 살아가게 했다면 앤 왕후는 그냥 앤 볼린이라는 평범한 여인으로 제 삶을 다 했는지도 몰랐을텐데암튼 잘난 남자들의 소유욕 때문에 그런 비극이 생긴것 아니에요?”

수경은 의외로 목소리에 노기가 담기며 따지듯이 동민에게 물었다.

글쎄요그게

동민은 적이 당황스러워지며 어물거렸다. 수경이 기억을 더듬듯 눈을 가늘게 모았다.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인데거기에 헨리 왕이 6년을 앤 궁녀를 쫓아다니며 구애하면서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러브레터를 보내곤 했대요. 앤도 처음엔 헨리왕의 사랑을 믿지 않았다가 결국엔 그의 열정을 받아들이고 몸과 마음을 허락한 것이 비극의 시초였죠. 제 기억으로는앤 왕후가 단두대에 서기 전에 자기의 분신인 엘리자베스에게 담담하게 토해놓은 대사가 있었는데그게 제 가슴을 많이 때렸어요.”

……?”

이렇게 얘기했대요. ‘비록 처음엔 헨리의 사랑을 믿지 않았지만, 훗날엔 그 열정이 사랑으로 변해 미친 것처럼 그를 갈구했단다. 그 결과 너를 얻었고 그 것이 꼭 1000일이 되었구나. 내 딸 엘리자베스, 너는 후일 반드시 이 나라의 여왕이 될 것이고, 그 빛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라고그 때의 그 여배우가 누군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 표정과 분위기, 주변의 참관자들, 헨리왕의 서성거리는 모습과 단두대에 서서 죽음을 기다리는 한 여인이 담담하게 뱉어내는 목소리에 모든 관객들이 숨을 죽였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해요비록 외국영화 였지만 그 때 전동서양을 막론하고 뭔가 힘 있는 남자들의 아집과 횡포, 자기중심적인 행위들이 모든 비극을 만들어낸다고 느꼈거든요그렇게 생각 안하세요, 동민씬?”

얘기가 엉뚱하게 비약되고 있었다. 얼굴에 약간의 홍조마저 띄운 채 갑자기 수다스러워 진 수경의 모습을 바라보며 동민은 빙긋이 웃음이 나왔다.

수경씬그럴 때 보면참 소녀 같네요.”

수경이 샐쭉하며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엉뚱하다고 느꼈는지 잠시 동안 침묵하다가 혼자 쿡쿡 웃었다.

그 영화볼 때가 소녀시절이었거든요..”

그래서지금도 그렇게 느끼세요?”

동민이 여전히 웃음을 베어 문 채 물었다. 수경이 잠간 고개를 갸웃하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본적인 생각엔변함이 없어요. 다만

다만?”

남녀 간의 어떤 해프닝에는그 당시 상황이나 둘만이 느끼는 남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걸 이해해줘야 되는 게 아닌가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동민씨도요한나씨와의 사이에 남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아닌가요?”

수경이 무척 힘든 질문을 하는 듯 목소리가 낮아지며 시선을 밑으로 깔았다. 동민은 일순 당황스러워지며 지금까지 수경의 심중에서 그가 아직도 못다 한 정윤과의 얘기가 궁금증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12


왜 그래요? 그냥 여기서 머물면 안되나요? 꼭 그쪽으로 가야만 되나요?”

미국생활이 얼추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어느 주말 오후, 동민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중동행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짐을 챙겼다. 곁에서 울먹이며 그를 지켜보던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왜요?”

그냥...여기가 싫어!”

“.....?”

정윤이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말없이 그녀를 껴안았었다. 그리고 그녀를 포옹한 채 마음속으로 속삭였었다.

당신은 아버님이 있고, 또 마음을 던지며 사랑하는 하나님이 계시잖아? 그러기에 당신은 외롭거나 슬플 땐 온 몸을 던져 그분께 호소하고 위로 받을 수 있겠지만, 나 그렇지가 못한 걸 어떡하겠어? 아무리 당신을 따라 마음을 비우고 오직 그분께 통렬히 내 외로움을 간절히 기도해 보아도 도무지 내 맘속의 도화지 위엔 아무 그림도 그려지지 않는 걸 어쩌나. 당신... 이거 알아? 아닌 걸 긴척하고 내 스스로를 기만하고 산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느껴본 적이 있냐고?

 

그녀는 그녀의 품속에서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오열을 삼키며 몸을 떨고 있다가 끝내는 또다시 성녀(聖女)의 얼굴로 돌아오며, 그 와중에서도 그의 손을 꼭 붙잡고 기도로 그 장면을 마무리 했었다.

 

하나님, 내 남편 오동민은 아직도 방황하며 미로를 헤매고 있는 어린 양입니다. 원컨대 하나님! 내 남편의 이 방황을 멈추게 해주시고 하루라도 먼저 당신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비록 오늘부터 또 가족과 함께 잠시 동안 떨어지게 된 것도 당신의 뜻인줄 압니다만, 그렇더라도 이 헤어짐이 후일 더 큰 은혜로 우리를 더 영글게 하도록 하는 시험인 것으로 생각하오니, 하니님! 부디 저희에게 힘을 주시옵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

동민은 그냥 두면 그녀의 기도가 마냥 길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자 서둘러 자기가 먼저 끝맺음을 미리 해버렸다. 정윤이 그를 따라 기도를 끝내곤 처음과는 달리 말갛게 그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었다. 그리곤 언제 울먹였다는 듯 그의 손을 꽉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사우디에 갔다가 힘들면 언제라도 다시 와요. ...이래뵈도 당신의 속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거든요. 당신의 그 외로움 병...하나님이 꼭 낫게 해주실거예요.

가서 건강 조심해야돼요. 알았죠?“

“......”

그때 동민은 아내 정윤이 차라리 이 무책임한 자식아, 너 혼자 불쑥 가버리면 난 어찌 살라고 그러냐? 넌 그 정도 인간밖엔 안 되는 그렇게 이기적인 인간이었냐?’고 소리라도 질렀으면 오히려 마음이 덜 무거웠을 것이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눈두덩을 눌러 쓰다듬었다. 너무 심하게 눈을 눌렀는지 갑자기 앞에 앉은 수경이 이중의 모습으로 어릿하게 비쳐왔다. 그는 무심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다시 집어넣으며, 뚜벅 입을 열었다.

그냥그 사람 얘기는 그만하죠. 아직내 스스로 아무 결론도 못 얻은 채, 도망치듯 훌쩍 떠나오고 말았으니까요. 이유야 어떻든내가 옳았던 틀렸던 상처 입은 건 사실이니까요

……

상처가 깊은 만큼 나을 때도 그만큼 힘든 것이니까수경씨 말마따나 서로가 시간을 가져야겠죠. 다만 안타까운 것은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을 들었더랬는데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화가 난 것 뿐예요, 스스로에게

수경은 암말 없이 혼잣말처럼 뇌까리는 동민을 뚫어질 듯 빤히 쳐다보며 왠지 눈길에 연민을 담고 있었다.

 

13

 

그 날 저녁 그들은 솔잖게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 마신 것만큼 얘기도 많이 했다. 화두는 주로 미술 쪽의 소재였는데 특히 조각부문의 얘기를 나누다가 그들의 대화가 잠깐 틈이 벌어지기도 했다. 수경이 낮에 잠깐 언급했던 로댕과 까미유 클로텔의 작품 얘기가 다시 시작되면서였다.

동민씨?”

, .”

동민은 얼결에 그녀가 내민 술잔을 받아 쥐며 어눌하게 말을 받았다.

카미유 클로텔 좋아하세요?”

? , 로댕의..”

맞아요. 로댕의 연인이었죠.”

윤수경은 수민이 받아 쥔 잔에 술을 따르며 무슨 연유인지 갑자기 하르르 한숨을 내뱉었다.

 

카미유 클로텔

동민은 그녀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유럽 여행 중 파리의 로댕 미술관에서 본 바 있는 그녀의 작품은, 작품도 작품이려니와 그보다도 그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녀와 로댕의 격정적으로 합일하는 모습이었다. 후일 누군가에 의해 쓰여 진 그들의 열정적인 사랑 행위의 장면은 단지 상상만으로도 행위 자체가 바로 예술이 아니었나 싶었다.

 

로댕의 아틀리에는 마치 초등학교 교실처럼 양면이 네모창살로 짜여서 있었고 막 일몰이 시작된 초여름의 햇살이 서쪽 유리창을 꿰뚫고 마지막 정염을 태우듯 강렬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카미유 클로텔은 그 빛을 마주한 채 돌을 다듬고 있었다. 망치를 맞은 정의 날카로움이 돌에 꽂힐 때마다 그녀의 영혼은 불꽃으로 터져 연소되고 있었고 앞이마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은 땀에 뒤범벅이 된 채 역광을 맞아 어찌 보면 귀기마저 서려있는 듯 했다.

그녀는 혼신의 힘으로 정을 두드릴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의 스승과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아쉬워했을까. 아니면 끝없는 사랑을 보이면서도 우유부단하게 부인 로즈의 곁을 떠나지 못했던 로댕에게 정을 두드리며 원망과 증오를 퍼부었을까.

또 아니면 당신은 차라리 돌을 되지 말고 나무가 되십시오. 돌은 바람에도 파도에도 끄덕도 않지만 나무는 소슬한 바람에도 어김없이 가지를 흔들어 바람에 입 맞추곤 하지요. 그래요, 당신은 차라리 호수가의 나무가 되세요. 그래서 내가 바람이 되어 물결에 잔잔한 파문을 일구며 당신에게 다가가면 당신은 당신의 이파리를 비늘처럼 번득이며 내 귓가에 사그랑 사그랑 속삭이듯 사랑의 언어를 들려주세요...’ 이렇게 말했을까....

하지만 그녀는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온 몸을 송두리째 던지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의 뒤편에서 언젠가부터 유령처럼 지켜 서서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스승 로댕의 모습을. 하지만 어느 순간 그들의 교감이 섬광처럼 부딪히며 눈길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를 껴안았고, 목마른 나무들처럼 깊게 깊게 뿌리를 뻗으며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정과 망치가 내던져지고 작업대의 연장이 쓸려버리고 그들은 한순간 불덩어리가 되어 작업대 위에 쓰러지고 만다. 아마 그랬을 것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껍질들이 하나, 둘 벗겨지고 둘은 원초의 모습으로 돌아가 화산이 되고 용암으로 흘러내렸을 것이었다. 얼마나 탐닉했으면 너무나 뜨거워 지진과 화산이 폭발하면서 세워진 조각용 돌이 자빠지고 유리창이 깨져 그 파편이 그들의 몸에 꽂혀 피가 흐르는 것도 몰랐을까....

 

동민은 그 때 그 장면의 글을 읽으며 100년 전의 어느 날 그들이 벌인 하오의 정사를 상상했다. 그 날 그들의 그 아뜩하고 황홀한 세계가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일처럼 느껴져 몸을 떨었었다. 그리고 그 날의 그 불꽃이 후일 그들의 작품으로 승화된 것이라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날 그는 로댕의 집을 둘러보며 하루 내내 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특히 로댕의 작품 중 키스라는 작품 앞에서는 한동안 발길을 못 박고 있었었다.

 

꿈꾸는 동공을 가진 한 여자(그녀는 바로 그의 연인 클로텔을 꼭 닯아 있었다)를 비스듬히 껴안고 허리를 가볍게 끌어당기고 있는 한 남자. 그가 안겨진 여자의 입술을 향해 다가가며 그녀를 갈망하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자연스럽고 사실적일 수가 없었다. 로댕은 후일 이 작품을 스스로 평해 신곡에 나오는 프란체스카와 그녀의 젊고 잘생긴 정부와의 사랑얘기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지만, 동민이 보기에는 그 작품의 여인은 당시 분명히 그가 숨겨놓고 사랑했던 카미유 클로텔이 틀림없다고 느꼈었다.

 

동민은 학부 시절 건축 전공을 하면서도 특히 조각에 필이 꽂혀 로댕을 공부하며 그의 초기 작품부터 후기 작품까지 속속들이 훑어보았고, 주로 신화에 의존한 초기의 성물조각보다는 후기 작품을 좋아했었다. 그 이유인즉 그의 후기작품들은 주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표현하면서 특히 남녀 간의 육체 깊은 곳의 섬세한 움직임까지도 예리하게 끄집어냄으로써 차가운 돌덩어리에 따뜻한 생명을 불어넣은 작가라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14

 

그런데 왜? 윤수경이 느닷없이 카미유 클로텔을 끄집어냈을까

동민은 문득 잠간의 상념에서 돌아오며 수경이 따라준 와인 잔을 저도 모르게 한 모금에 비워버렸다. 그리곤 냅킨으로 잔 언저리를 닦아낸 후, 수경에게 다시 잔을 건넸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해요?”

수경이 가볍게 웃으며 그가 내민 잔을 받았다.

그 여자를 생각했어요

그 여자? , 로댕의 연인?”

수경이 순간 고개를 갸웃하다가 왠지 시니컬하게 웃으며 연민의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술병을 들어 자작으로 잔을 채우며 불쑥 내뱉듯 말했다.

동민씨는, 그들의 사랑 얘기를 들으면짜증나지 않던가요?”

“.......?”

저는요, 로댕이랑 우유부단한 인간 때문에 천재를 가진 카미유 클로텔이 결국은 망가져버린 것에 분노를 느끼고 있거든요.”

,

동민이 잠간 당황하며 우물거리자 수경은 정말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마치 시비를 걸 듯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도요, 파리에 있을 때 여러 미술관을 섭렵하면서 혼자 상념에 젖곤 했어요. 다른 건 모르겠어요. 다만 로댕과 그의 연인에 대한 얘기를 접했을 때, 그리고 그 여자의 혼이 담긴 작품을 대했을 때저는 로댕보다는 오히려 그 여자의 작품이 더 가치 있게 평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야, 서로의 작품세계가 다를 수도 있으니까 평가도 다를 수 있겠죠?”

동민은 일순 그녀의 의견이 일리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그가 존경하는 스승을 공연히 깎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분이 다소 언짢아졌다. 그러자 그의 우물거리는 모습에 순간 수경이 술잔을 탁!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우습게도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막 싸움을 시작하려는 아줌마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민씨 이거 알아요?”

“.........?”

로댕이 정말 그녀를 목숨처럼 사랑했다면, 후일 그녀가 정신병동에서 최후를 맞이하도록 하지는 말았어야죠. 안 그래요? 그리고 그 원인이 테마가 똑 닮은 작품 때문이었다면 백번 로댕이 그녀를 앞세우고 자기 작품을 발표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

그녀가 흥분을 느낀 얘기는 이러했다.

로댕의 작품중 카라테아라는 것과 영원한 우상이란 조각상이 있는데, 이 작품의 제작연대가 까미유 클로텔의 밀집의 짊어진 소녀사쿤델라라는 작품보다 1년 내지 2년 후의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조각상들은 1-2년 전의 클로텔의 것과테마가 거의 같았고, 이는 결국 로댕이 당시 크로텔의 작품을 공식 출품 못하게 하고 먼저 표절하여 발표함으로써 그 후유증으로 두 사람은 파경을 맞았고, 또 정신병까지 얻게 된 비극의 시초였다는 얘기였다.

수경은 이런 그들의 히스토리를 꿰뚫듯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로댕의 인간에 대해, 그리고 그가 보낸 클로텔에 대한 사랑이 전혀 진실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이거봐요, 동민씨.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제자의 작품을 베끼고...그것도 모자라 앞길을 막아 정신병자까지 만드는 스승도 있나요? 그는 그저 그녀의 육체만 탐닉했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거든요...”

글쎄요...꼭 그렇다고 단정 짓기는...그들 각자가 서로 천재성을 지녔다면, 가끔 같은 주제의 작품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들의 사랑 역시...당사자 아닌 제3자가 옳다 그르다 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동민은 마치 그녀에게 항변하듯 말을 더듬었지만, 솔직히 수경의 로댕에 대한 근원적 분노를 변명할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로댕의 작품이 확실히 카미유 클로텔의 사쿤델라라는 작품의 표절이란 것은 여러 비평가들에 의해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이미 동민은 알고 있었기에, 그는 수경에게 대놓고 뭐라 대꾸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우연히 도마 위에 오른 로댕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생긴 이래 그렇고 그렇게교활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권력과 지위와 명예가 있는 자들은 그들대로, 평민과 서민은 또 그들대로 나름대로 합리화 하고, 그 합리를 또 합리화 하기위해 얼마나 사회를 기만하고 거짓말을 해대고 있는지...

동민은 우선 스스로에게도 자신이 없었다. 그 자신마저도 흔히들 얘기하는 사랑도 없이 의무적으로 결혼하고, 그렇다고 그 결혼을 영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사명감도 없이 한명은 미국에서 한명은 사우디에서 떨어져 살며, 매일 매일을 회의 속에서 지내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동민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머리가 복잡해져 무심코 담배 한 대를 뽑아 물었다.

여기...금연이거덩요...”

수경이 그런 동민을 일깨우며 느닷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이봐요, 동민씨?”

“....?”

...로댕같은 사랑말고...진짜배기 사랑이 어떤건지 알아요?”

글쎄요...”

수경이 동민을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빨았다.

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세상을 살다보면 참 별 일을 다 겪곤 하잖아요? 짜증나고 답답하고 우울하고 콱 죽고 싶고…… 이런 느낌들이 가슴에 꽉 차있을 때는 말입니다. 그럴 땐 동민씬 어떻게 푸시나요? 속이 탁 트이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뭘까요?”

글쎄요…… 뭐 자기 일에 몰두하거나 또는 좋은 영화나 소설을 보거나 아니면 듣고 싶은 음악을 듣거나…… 암튼 뭔가에 빠져들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은데 난?’

의외의 질문의 화살이 동민에게 날아들자 그는 고개를 갸웃한 채 수경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풀썩 웃었다. 그리곤 똘방하게 말했다.

저는뭐 그런 것들도 나쁘지 않지만, 그 보담은섹스라고 생각하요. 아님 정말 미운사람 찾아가서 그냥 목숨 걸고 싸움을 한판 벌이던가... 그래서 클로텔이 죽기 살기로 로댕과 섹스를 벌인 게 아닐까요? ”

“.......?”

그리고 그녀는 자작한 와인 한잔을 한 모금에 비우고 동민에게 불쑥 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똑바로 그의 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절정의 순간을 기억했다가 작품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15

 

백호도 넘을 듯 한 커다란 캔버스에 하나 가득 숲이 그려져 있었다. 가늘게 뻗은 소로와 빽뺵한 나무들 사이로 부옇게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가지들 틈새로 하늘이 희끗희끗 밝은 햇살로 빛을 뻗치고 있었다. 길 뒤편으로는 아스라한 산등성이가 푸른 호수를 끼고 보일 듯 말 듯 엷은 그림자로 떠있어 그곳까지만 가면 뭐가 꿈이 이뤄질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동민은 그 캔버스 속의 숲길로 수경을 뒤따라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캔버스 속의 숲길은 사람이 드나들도록 나지막한 돌계단이 서너 개 만들어져 있어 돌계단 이쪽에서 보면 그 풍경은 캔버스 속의 그림이었고, 돌계단을 밟고 넘으면 신화 속의 그림처럼 곧바로 숲 속 의 산책로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빨리 와요!”

저만큼 앞서가던 수경이 이쪽을 돌아본 채 하얀 덧니를 살큼 내비치며 맑게 웃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아요.”

동민이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뭔가에 묶인 듯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이 참! 그냥 펄떡 내딛어 봐요. 해지기 전에 저쪽 호수까지 가야한단 말이에요!”

수경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목청을 높이며 동민을 향해 손을 내뻗어 주었다. 동민은 허리를 활처럼 굽히며 팔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며 힘껏 그를 끌어 당겼다.

 

아앗!

동민은 퍼뜩 눈을 뜨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엄청 목이 말랐다. 그는 어둠 속을 더듬어 침대 머리맡의 전등 스위치를 찾았지만 스위치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

그는 머리를 흔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떳다. 어둠 사이로 실내풍경이 희끄무레하게 비쳐왔다. 생소한 방이었다. 창문 앞으로 낯 선 의자가 두어 개 놓여있었고, 그 옆쪽으로 놓인 탁자와 냉장고 등속도 전혀 낯선 물건들이었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려 방안을 두루 돌아보았다. 한켠 구석의 소파에 누군가가 웅크린 채 잠이 들어있는 모습이 부옇게 비쳐져왔다. 수경의 방인 듯 했다. 동민은 후다닥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다시 한 번 눈을 비볐다. 얼핏 뇌리를 스치는 어제 저녁의 해프닝들이 단편적으로 빠르게 눈앞을 스쳐갔다.

 

하이구야! 이거 도대체

동민은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오며 침대에서 내려와 잠간을 망설이다가 소리죽여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윤수경이었다. 그녀는 입은 옷 그대로인 채 소파에서 웅크려 새우잠이 들어있다. 동민은 잠시 동안 우두커니 소파 모서리에 기대선 채 엷은 향내를 풍기며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도대체가 어떻게 된 일이야

동민은 다시 한 번 머리를 흔들어 기억을 일깨워 보았지만 그들이 왜 이 곳으로 왔는지에 대한 부분은 까맣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단지, 식당에서 식사를 끝낸 후 2차로 자리를 옮겨 입가심으로 딱 한 잔씩만 더 하자며 무슨 양주코너에 들어간 것, 그 양주코너의 한국인 바텐더에게 수경이 뭔가 횡설수설한 것, 그리고 끝내 술을 못 이기고 화장실에 가서 헛구역질을 한 것, 동민이 바텐더에게 미안하다고 한 후 화장실까지 쫓아가 그녀의 등을 두드려준 것, 그러면서도 다소 정신이 깨어난 수경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동민 자신이 중국사람 흉내를 낸답시고 파이날이라며 양주를 큰 잔으로 부어 단숨에 마시곤 머리에 잔을 거꾸로 들어 딸랑딸랑 흔들며 허세를 부린 것등등이 간간이 떠올라 정신이 아뜩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심한 심정이 되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감 냄새와 같은 들쩍지근한 술 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며 갈증이 더욱 심해졌다. 동민은 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축여보았지만 그마저도 깔깔하게 말라 입속에 침이 고여지지 않았다. 그는 마른 침은 삼키며 살큼살큼 소파 옆을 벗어나 다급하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곤 손에 잡히는 대로 물병은 움켜들곤 들이붓듯 물병 주둥이를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쿨럭쿨럭 목구멍을 타고 물 넘어가는 소리가 스스로 생각해도 욕조에서 물 빠지는 소리처럼 커다랗게 느껴졌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요?”

윤수경의 졸린 듯한 목소리가 허스키하게 뒤에서 울리며 그를 멈칫하게 했다. 동민은 그녀의 일깨움 소리에 움찔 물 마시는 속도를 늦췄지만 도저히 그녀를 뒤돌아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꼼짝 않고 서있었다. 만약 밝은 불빛 아래였다면 동민은 그대로 침대 밑에라도 숨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도 물 좀 줄래요?”

수경이 등 뒤에서 손을 뻗어왔다. 동민은 마치 그녀의 하인이라도 된 양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실하며 냉장고 속에서 물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따고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 역시 웬만큼 갈증이 있었는지 잠시 동안 물 삼키는 소리를 내다가 갑자기 쿡쿡 웃었다. 그리곤 동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있잖아요, 그 얘기 알아요?”

……?”

조동탁 시인의 에세이였는데그 사람이 어느 날 월정사에 갔다가 아주 좋은 술이 한 병 생겼대요. 혼자 먹기가 아까워 그 곳 스님을 모셔와 곡차 한잔 드시라고 꼬드겼대요. 근데 그 스님이 망설임도 없이 조 시인이 주는 술 한 잔을 얻어 마시곤 입맛 다시는 소리가 북소리 같았다는동민씨 물 마시는 소리가 문득 그 생각을 나게 했거덩요!”

미안해요!”

동민은 아직까지도 그녀를 돌아볼 용기가 생기지 않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사과했다. 그녀가 가만히 동민을 뒤에서 껴안으며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다.

재미있었어요. 근데 말예요이건 좀 거꾸로 된 것 같거덩요? 보통 영화나 소설을 보면여자가 술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고 그러면 남자가 그 여자 업고 여관방에 데리고 들어가 찬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그러던데오늘은 완전히 거꾸로 된 거 알아요?”

죄송합니다

동민이 한 번 머리를 꾸벅하며 조그맣게 말했다.

나 그런 소리 듣자고 한 소리 아닌데…… 그러지 말고 잠깐 저 좀 돌아봐 줄래요? 그리구나 한번 안아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