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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 만에 누님과의 3박 4일
06/10/2019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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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 만에 누님과의 34 

방용호

 

     평양에서 출발한 밤 열차에서 내가 안내원 신동무와 함께 내린, 19921120일 아침 8시 원산역에는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눈이 내렸다. 그 기나긴 세월 소식조차 알 수 없었던 누님이 꽃을 든 손녀딸과 함께 나를 맞아 주웠다. 이 순간을 위해 42년간을 참고 기다리는 동안, 어느새 할머니가 된 누님과 나는 서로 껴안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원산에서 잠시 쉬고 있는 기관차도 함께 온 손님들도 우리 남매의 만남을 조용히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그 옛날 매형이 그렇게 사랑했던 누님의 아름답던 그 예쁜 얼굴, 작고한 어머니를 대신해서 우리 형제에게 늘 웃어 주시던 얼굴, 고달픈 삶에 지친 주름진 얼굴, 근심의 긴긴 밤들을 참으며 오늘을 기다려 주신 얼굴 그리고 죽은 줄만 믿었던 동생이 이렇게 살아서 의젓하게 찾아온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누님의 얼굴을 나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이렇게 누님을 다시 만난 것은 꼭 보름이 모자라는 42년만이었다. 그러니까 1950년 겨울 원산부두에서 철수하는 LST를 기다렸으나 기회를 못 잡은 나에게 주먹밥을 주시면서 어디 가서든지 살아만 있어라는 누님의 부탁을 듣고 집을 나선 날이 바로 125일 저녁시간이었다. 그 긴 세월, 이 고향땅에서 나를 희미하게나마 살아있을 것으로 믿고 기다려 주신 누님이시다. 오후 평강에서 동생부부가 와서, 세 남매가 생전 처음으로 저녁을 함께 먹었다. 살아 있음이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의 둘째 날은 구름 한 점 없는 따뜻한 겨울 날씨였다. 강원도 도청의 정동무가 준비한 차편으로 우리 형제는 누님을 모시고 부모님 산소를 찾아 떠났다. 나의 고향은 원산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작은 농촌이다. 겨울을 기다리는 골짜기에는 맑은 물줄기가 한가하게 흐르고 있었다. 냇가를 따라 마을에 들어가면 뽕나무들이 줄줄이 서 있었는데, 내가 삼촌댁에 얹혀 살 때 누에를 치기위해 뽕잎을 따던 곳이다. 뽕나무밭 밑 빨래터에서는 그 옛날 마을 아낙네들이 조실부모한 나의 박복한 이야기들을 주저 없이 주고받던 곳이기도 하다.

 

    나의 삶에 깊이 수놓아진 이 마을의 옛 사연들은 아랑곳없이 정동무의 차는 내가 한때 숙부님과 함께 농사를 짓던 천수답을 지나 아버지의 과수원에 도착했으나 그 옛날의 과일나무들은 흔적조차 없었다. 아버지 묘는 오래전에 과수원 가운데 이장되어, 지금은 다행히도 어머니와 함께 가지런히 자리를 하고 있었으나 묘석도 묘비도 없었다. 나는 누님의 양해를 얻어 먼저 어머님의 묘전에 한 걸음 더 다가서서 머리를 숙였으나, 불효자식이 이제야 찾아오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조차도 못하고 꽃을 든 채 마냥 서있었다. 나를 따라 누님도 동생도 말없이 묘전에 마냥 앉아서 하늘과 땅을 차례로 쳐다보다가, 약속한 시간 모두를 흘려보내고 만 것이다. 얼마나 고대하고 마음 설레며 기다려온 이 시간이었는데!


    셋째 날은 누님대신 누님의 외아들 덕남이와 함께 시내관광을 했다. 오후에는 5째 숙모님의 식구들, 둘째 집 사촌들 그리고 원산근교에서 사는 누님의 세 딸 식구들의 방문을 맞이했다. 안방에 자리를 잡은 숙모님과 우리 형제를 제외하고는 마루에 모여 앉아 저녁식사를 하는 이 식구들은 모두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혈연의 탓이리라! 무엇이 저들을 저토록 즐겁게 해 주는지는 알 수 없어도 대화의 웃음이 그칠 줄을 몰랐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 누님은 나에게 오늘 도착한 모두에게 내가 그간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려주었으면 했다. 그들에게는 죽었다고 믿었던 내가 이렇게 살아 서, 더욱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다가 빈손으로 월남한 내가 도미까지 하여 미국대학에서 박사가 되었고... 세 아들의 아버지로서 지금은 미국시민으로 살고 있다는 등등 궁금한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흘째 날은 나에게 허락된 누님과의 마지막 날이자 누님의 70세 생일이었다. 조반 후, 누님의 사위 셋과 신동무가 두 시간이나 걸려 생일상을 차렸다. 잔칫상 중간에 크게 자리 잡은 문어를 중심으로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담은 여러 접시가 두 개씩 대칭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이 큰상 뒤에 회색 치마저고리를 입으시고 웃음을 감추지 못하면서 아들부부로부터 큰 절과 술잔을 받는 누님은 오늘을 위해 사신 것처럼 행복하게만 보였다. 신동무의 안내에 따라 내가 두 번째에 이어 동생부부와 사촌들, 누님의 세 딸과 가족들이 나이 순서대로, 그리고 나의 사촌들과 오촌에 이르기 까지 누님의 만수무강을 위해 큰 절을 올렸다.

 

    잔칫상은 곧 점심상으로 그리고 축하연으로 이어져, 너나 할 것 없이 축하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작별의 시간은 사정없이 찾아와 안내원의 계획대로 먼 곳에서 온 친척들부터 한 가족씩 작별 인사를 나누고 돌아갔다. 지난 며칠 동안 하루 세끼씩 20여명의 음식을 무연탄 불로 만들어낸 이집 며느리의 부엌도 조용해 졌다.

 

    나는 짐을 챙긴 후 누님 곁에 누워 작별이야기를 나누었다. 누님은 내 처가 보내온 털신, 오리털로 만든 침낭 그리고 태엽으로 밥 주는 손목시계를 두고두고 잘 쓰겠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대신 고마움을 전해 달라고 하셨다. 내 가족사진을 다시 꺼내어 보시기에, 누님께서는 내 식구들이 사는 미국에 오시게 되는 날이 꼭 올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한 피를 나눈 형제의 만남은 누구도 방해 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누님의 두 손을 잡는 순간, 내 가슴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라고 하신 사도 바울의 말씀이 스쳐 갔다.

 

    다시 만난다는 기약은 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도 같은 것이기에, 나는 누님께 내년 봄 버드나무 두 그루를 아파트 뒤뜰에 심어 달라고 부탁 했다. 가지들이 자라서 그늘을 만들면 누님이 이웃들과 함께 그곳에서 여름날을 지내면서 다시 찾아오지 못하는 이 동생을 조금이라도 이해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원산의 하루를 마감하는 겨울 해와 함께 평양으로 가는 열차도 출발한다는 기적을 울리자, 나는 누님과의 약속대로 웃는 얼굴로 누님 아무쪼록 건강히 계세요라고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기차에 올랐다. 누님은 큰 소리로 방동무, 우리 조국을 다시 방문해 주시요하면서 손을 흔들며 나를 기쁘게 떠나도록 웃어 주셨다.

 

     서둘러 떠나는 열차의 창밖으로부터 내 눈에 비쳐지는 온갖 것들은 오직 만남이란 생각뿐이었다. 즐거움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에게는 그리움이라는 속성(屬性)이 있기에 하나님은 만남이라는 선물도 함께 주신 것이다. 고로 만남은 인생에 있어서 필연적(必然的)인 천륜(天倫)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세상 사람들은 얼굴과 얼굴, 눈과 눈 그리고 입술과 입술을 맞추어 가면서 마음을 나누면서 산다. 그런데 왜 내 고향 한반도에는 혈육의 만남까지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내 누님은 그 버드나무 그늘 밑에서 다시 만날 날이 오기를 일곱 번의 여름을 기다리시고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나는 수개월 후에야 인편을 통해 들었다yonghob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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