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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버지의 과수원
06/03/2019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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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버지의 과수원

아버지날을 맞으면서

 

방용호

    나의 아버지의 과수원은, 경원(京元)선의 기차가 동해를 출발하는 원산에서 20Km북쪽 송진만 해변에 근접한 황석리라는 나의 고향마을에 있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면서 나의 고향은 북조선에 속하게 되었다. 이 마을 앞에는 동해로 흐르는 야태강이 있고 뒤에는 겨울철 시베리아 찬바람을 막아주는 황덕산이 있다. 뒷산에서 흐르는 두 개울을 끼고 마주 앉아 있는 50 초가들에는, 한결같이 여러 종류의 과실나무들이 서 있었다.

 

    아버지는 조상이 남겨준 유일한 논 모두가 일본 알루미늄 공장부지로 압류되자, 어머님과 함께 선산(先山)의 남쪽기슭을 개간하고 여러 종류의 과일 나무를 심은 것이 내 아버지의 과수원이다. 봄이면 양지바른 언덕에 서있는 복숭아나무들이 분홍색 꽃동산을 이루면, 어느덧 습지에 심어진 배나무의 흰 꽃에 이어 사과나무의 붉은색 꽃들에는 꿀벌들이 모여들어 소란을 피웠다. 과수원 주변에 제 멋대로 서있는 밤나무들은 선선을 노란색으로 물들이고 향기를 피우며 여름을 맞아주곤 했다.

 

    과실나무들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내가 9살 되는 생일날 아침 만40이라는 젊은 나이에 의사의 옷자락도 한번 만져보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님은 나와 6살 아래동생을 데리고, 과수원 초입에 삼촌들이 지어준 초가에서 살았다. 어머님은 과수원을 관리하시면서 생계를 꾸렸고 나는 방학과 공일날 땔감을 장만 하는데 모두 보냈다. 그러한 생활도 여러 해 이여지지 못하고,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엄마는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님의 장래가 끝나자 동생은 출가한 누님 댁으로, 나는 두 삼촌댁을 오고가면서 농사일을 배웠다. 조석으로는 숙모님의 허들에 일을 그리고 낮에는 과수원에서. 아침이면 나는 점심보자기를 묶은 지게를 지고 과수원에 가서 김을 매다가 과일나무들의 그림자가 지워지는 무렵에 돌아왔다. 첫해의 봄여름 나는 내가 평생에 흘려야할 눈물 모두를 이 과수원에서 흘렸다. 외롭고 무서워서, 힘들고 슬퍼서 하늘과 땅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소리 없이 울었다. 봄을 노래하는 새들, 여름을 알리는 매미들 그리고 가을하늘을 나르는 기러기들도 나와 함께 울어주웠다. 이렇게 나의 15살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도 긴 한해였다.

 

    겨울날 새벽이면 마을 공터를 찾아다니면서 얼어붙은 개똥을 주었으나 그 많은 과실나무들에게 화학비료를 대신하기에는 충분치 못해서 달구지를 몰고 어촌에 가서 겨울동안 쌓인 인분(人糞)을 퍼왔다. 내가 작년 봄에 졸업한 북성국민학교 화장실을 두 번째로 찾아간 날은 마침 동창회가 있었다. 늠름하게 교복을 입은 학우들이 눈에 띠었으나, 다행히도 누구 하나 인분을 나르는 초라한 나를 처다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달구지를 끌고 묵묵히 걸어가는 말()에게 나는 부끄러움도 형편에 따라 생기는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자신을 위로 했다.

 

    내가 부모님의 과수원을 영영 떠난 것은 내 나이 19이 되는 1950년의 정초, 4년간의 농사일을 마감하고 가출함으로서였다. 그해 봄 나는 평양에 있는 중앙은행본점에서 3개월간의 강습을 받고 은행서기로 임명되어 원산지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군부대들과 몇 국영기업소의 은행구좌를 담당하게 된 탓으로 인민군 증집을 피하게 되었다. 그렇게 전쟁에서 살아남아, 그해 12월 원산에서 포함까지 도보로 월남하여, 4년 만에 서울에서 만학의 기회를 얻었고 또 9년 만에는 미국유학차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떠나온 부모님의 과수원을 다시 찾아간 것은 199211, 그러니까 원산에서 누님과 헤어진 지 만42년만이었다. 해외동포 고향방문이라는 프로그램에 따라, 나에게는 누님 댁에서 동생과 함께하는 34일이 허락되었다. 평양에서 함께 온 안내원의 도움으로 고향마을 아버지 과수원을 찾아 갔으나 부모님이 심은 과실나무들은 흔적이 없었다. 다만 그 옛날 홍옥 사과나무들이 서 있었던 언덕에 몇 년 전에 누님과 동생이 새로 이장했다는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가 40여년 만에 찾아온 나를 맞아 주웠다. 과수원 주변 선산의 무성했던 수목들, 내가 겨울이면 땔나무로 베어오던 소나무들까지도 보이지 않았다.

 

    제2의 과수원: 향을 떠나 15년 만에 힘들게 미국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서 직장을 구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그러다 제3국에서의 일터를 얻게 되어, 태국을 시작으로 아프리카와 동남아 후진국들을 전전하면서 소외된 사람들의 전염병을 조사연구 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2년 꼴로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찾아 갈 때마다 나는 이 남쪽 한반도의 어느 한 구석에라도 부모님의 과수원을 대신하는 과실나무를 심고 싶었다. 그러다 용인-이천 간의 옛 국도가 멀리 보이는 한적한 양지바른 야산 2만평을 구매했다.

 

   그러나 계획하고 준비한 한국에서의 나의 은퇴생활의 꿈, 아버지의 제2의 과수원은 실현되지 못했다. 나의 아프리카 오지 직장생활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집을 떠나 외롭게 진학한 세 아들 모두가 미국에 정착하게 됨으로서, 우리 부부에게는 더 이상 은퇴 후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여생을 보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산부두에 도착한 이삿짐을 미국의 상항부두로 옮겨, 1990년대 초 우리의 노후생활은 세계적인 포도주생산지로 알려진 나파(Napa)라는 시골도시에서 시작되었다.

 

    제3의 과수원: 한국에다 장만한 제2의 과수원 부지를 매각하여, 나는 900평정도의 뒤뜰이 있는 집을 사서 몇 종류의 과일 나무를 몇 구루씩을 심었다. 이른 봄에 분홍색 꽃이 피는 복숭아를 시작으로 배, 후지사과 등 꽃 색깔과 성숙기를 고려하여 계절을 따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어릴 때 본 부모님의 과수원에 비하면 매우 초라하지만, 뜰 초입에 두 줄로 포도나무를 심어 여름이면 포도송이들이 그늘을 이루는 아치를 만들었다. 나는 종종 이 아치 밑에 앉아서 흑백사진으로도 볼 수 없는 부모님을 희미한 기억으로 회상하곤 한다.


    제2의 과수원이 투자효과를 낸 덕분으로 우리의 노후생활은 경제적으로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부모님의 과수원은 어쩌다 잃었지만, 뒤뜰에서 자유를 자랑하는 제3의 과실나무들이 오늘도 나에게 부모님 곁에서 함께 호흡하게 한다. 그리고 한 인생의 꿈은 고향에서 시작 한다는 말을 되새겨 본다. (저자: 황혼의 막다른 길목에서, 2014)  yonghob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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