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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는 누구인가
11/05/200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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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5일>

편집국은 어제 굉장히 바쁜 하루를 보냈습니다.

마지막 기사를 마감하고 나니 5일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캠페인 기간동안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기사는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당선되고 나니 오바마가 누구인지 또 궁금해집니다.

새로운 사실이 없을까 하는 심리인 것 같습니다.

또 내가 모르는 게 있나, 뭐 그런 생각도 차지합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위해 오바마 당선자에 대한 기사를 올려봅니다.  :)

***

<사진은 네바다주 유세장에 갔던 지인이 보내줬습니다>

 

“부모가 ‘버락’이란 아프리카식 이름을 붙여준 건 그것이 미국에서 성공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을 걸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야윈 소년은 미국에서 잘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품었다. 희망의 담대함(the audacity of hope), 그건 신이 준 위대한 선물이자 미국의 근본이다.”

4년 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런 연설을 했던 버락 오바마(47)가 대망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의 대선 승리로 미국 역사엔 새로운 장이 열렸다. 소년 시절 아프리카식 이름과 피부색 때문에 놀림을 받았고, 청소년기엔 술과 마약을 하며 방황을 했던 오바마. 그러나 절망에 늪에 빠지지 않고 담대한 희망을 키웠다. 그리고 백인의 철옹성에 도전해 역사적인 드라마를 만들어 냈다.

◆혼혈 흑인 소년의 좌절과 방황=1961년 8월 4일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케냐 유학생으로 하와이대에 다니던 같은 이름의 아버지(82년 교통사고로 사망)는 60년 러시아어 강의실에서 만난 백인 여학생 스탠리 앤 던햄(95년 난소암으로 사망)과 결혼했다. 그러나 오바마가 두 살 되던 해 하버드대 경제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헤어졌다.

어머니는 같은 대학에 다니던 인도네시아인 롤로 소에토로와 재혼했다. 오바마는 여섯 살 때 어머니와 새 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갔다. 거기서 이슬람교 학교와 가톨릭 학교를 2년씩 다니다가 71년 하와이의 외가로 옮겼다. “아들을 미국에서 가르쳐야겠다”고 판단한 스탠리 앤이 아들만 친정으로 보낸 것이다. 인류학자였던 앤은 72년 롤로와 갈라섰으나 자카르타에 주로 머물렀다. 오바마는 외할머니 매들린 던햄(85)의 손에서 자랐다. 사실상 어머니 역할까지 했던 매들린이 대선 기간 중 낙상으로 중병을 앓게 되자 오바마는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외할머니를 찾아 이틀간 간호하는 애정을 보였다.

오바마는 71년 크리스마스 때 하와이를 찾은 아버지를 만났다. 케냐 재무부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농구공을 선물로 줬고 아프리카 음악을 들려줬다. 그때가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명문 사립학교 푸나후(초·중·고 과정)에 다녔다. 자카르타 학교에서 푸나후의 5학년으로 전학한 오바마는 백인 아이들의 인종 차별적인 놀림을 받았다. 오바마는 운동장에 동전을 던지며 분노를 삭였으며 백인 아이들을 기피했다. 고교 시절엔 피부색에 대한 번민 때문에 술과 담배·마리화나를 입에 댔다.

◆학업과 시민운동에 몰두=79년 로스앤젤레스의 옥시덴털대에 입학했으나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는 대학 농구 선수로 활약하면서 흑인 학생들과 정치 동아리를 만들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는 당시 “인종이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오바마는 81년 아이비리그 소속(동부의 8개 명문 사립대) 컬럼비아대에 편입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어 그랬다”고 한다. 그는 그때 마약을 끊었다. 정치학과 외교학을 전공한 그는 “수도승처럼 공부했다”고 회고한다.

오바마는 83년 졸업을 앞두고 “흑인 중심의 풀뿌리 조직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겠다”고 마음먹고 민권운동단체 등에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컨설팅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다 85년 시카고 남부의 빈민지역을 돕는 단체가 운동가를 모집한다는 얘길 듣고 그곳으로 갔다. 그는 3년간 쥐꼬리만 한 급여(연봉 1만3000달러)를 받으면서도 주민들을 가르치고,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운동을 열심히 했다.

오바마는 88년 9월 하버드대 법과대학원에 입학했다. 이듬해 여름방학 땐 시카고의 작은 법률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다 아내 미셸을 만났다. 오바마는 자신에게 법률 실무를 가르친 하버드 법과대학원 출신 미셸에게 호감을 느껴 데이트 신청을 했다. “버락 오바마란 이름이 이상하다”는 첫인상을 지녔던 미셸은 데이트 신청을 뿌리쳤으나 금세 그와 사귀기 시작했다. 둘은 92년 결혼해 두 딸 말리아(10)와 사샤(7)를 낳았다.

오바마는 90년 권위 있는 법률 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의 편집장으로 뽑혔다. 하버드대 탄생 104년 만에 첫 흑인 편집장이 된 그는 당시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의 선출은 미국의 진보를 뜻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 법과대학원을 우등 졸업했다. 그러나 높은 연봉의 대형 법률회사에 가지 않고 시카고로 돌아가 6개월간 유권자 등록운동을 했다. 그는 소수민족과 저소득층 시민 10만 명 이상을 투표권자로 만들었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측 유권자 등록자가 공화당을 압도한 건 오바마가 과거 경험을 살려 캠페인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91년 시카고의 작은 법률회사로 자리를 옮겨 흑인 인권 향상과 주거 환경 개선에 앞장섰고 시카고대의 헌법 강좌도 맡았다.

◆정계에 진출=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나가 당선됐다. 그는 저소득층 노동자 세금 경감과 복지 향상, 정치윤리 개혁에 초점을 맞춘 입법활동을 했고 98년 다시 선출됐다. 2000년엔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으나 2년 뒤 주 상원의원 3선에 성공했다. 2004년 7월엔 대통령 도전의 초석이 된 기회가 찾아왔다. 당의 대통령 후보를 공식 선출하는 전당대회의 기조연설자로 뽑혔기 때문이다.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존 케리는 한 선거자금 모금 행사장에서 오바마가 연설하는 걸 보고 맘에 들어 그런 부탁을 했다.

무명의 오바마는 전당대회 연설로 일약 스타가 됐다. 미국의 꿈과 희망, 그리고 자긍심을 강조한 그의 연설은 언론과 대중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오바마 바람’은 그때부터 불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오바마는 연방 상원의원 선거(일리노이주)에 도전해 가볍게 당선됐다. 흑인으론 사상 다섯 번째로 연방의 상원의원이 된 것이다.

상원에서 오바마는 개혁적이고 초당적인 활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가장 먼저 발의한 법안 중 하나는 불법 체류자를 구제하는 이민 개혁 법안이었다. 그는 법안 발의 과정에서 이번에 치열하게 싸웠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협력했다.

◆‘담대한 희망’에 도전=그는 지난해 2월 다시 한번 ‘담대한 희망’을 품었다. 흑인에겐 불가능해 보이는 대통령에 도전하겠다는 꿈, 그래서 미국과 워싱턴을 바꾸겠다는 꿈을 밝혔다. “상원 경력이 겨우 2년인 애송이가 무모한 생각을 하는 것”이란 지적도 들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공동체 운동을 한 그는 대중의 마음속을 간파했다. 그가 전파한 ‘변화’의 메시지는 대중의 열망을 압축한 것이었기 때문에 위력적이었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공화당 매케인 후보는 ‘경험’과 ‘준비’라는 깃발을 들고 오바마의 무경험을 공격했으나 다수의 대중은 ‘변화’를 선택했다.

중앙일보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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