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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에서 돈을 번 사람의 노하우-19
08/24/2019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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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배의 사나이’ - 김기현
▲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주가가 오르려면 기업이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합니다. 성장이 필요하단 말이지요. 성장이 필요하단 말은 시간이 필요하단 말과 같습니다. 시장과 기업을 믿고 주식을 샀다면 그 믿음만큼 시장과 기업에 시간을 주십시오. 주식을 살 때 가졌던 믿음과 기다림의 시간만큼 기업이 반드시 수익을 선물해 줄 것입니다.”
   
   ‘3000배의 사나이’로 불리는 재야고수 김기현(45)씨가 개인 투자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며 꺼내 놓은 이야기였다.
   
   김 대표는 한국 주식판의 손꼽히는 ‘고수’ 중 한 명이다. 2000년대 중반 철강주 투자로 수십 배 수익을 올린 것이 그를 주식판의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국내외 주식과 선물·옵션 투자는 물론, 개인투자자임에도 불구하고 원유와 면화, 밀, 커피 등의 상품 거래에까지 뛰어들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여느 재야 고수들과는 다른 투자 행보를 보여 왔다는 점이 그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주식인생만 19년, 김 대표는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주식투자 실패로 깡통을 찬 적도 몇 번이고, 원양어선 어부가 되려던 절박한 순간도 있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 주식투자 자산만 200억여원에 이르는 큰손으로 주식인생의 꽃을 피우고 있다.
   
   
   스무 살의 첫 투자
   
   김 대표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지하철 2호선 삼성역 인근 한 빌딩 15층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 대표는 지난해 8월 ‘글로브너투자문’을 세웠다.
   
   그는 “투자자문사를 만들며 선물·옵션 거래는 물론 해외 주식과 해외 선물·옵션 투자는 중단한 상태”라고 했다. 또 5~6년 전 최고 1억달러 규모까지 거래했던 원유와 밀 등 상품 시장 투자 역시 한발 물러선 상태라고 했다. 지금은 약 200억원 상당의 국내 현물 주식에 집중투자하고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서울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1987년 주식과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그에게 벌어진 두 사건이 그를 주식판으로 이끌었다.
   
   “‘국제경상학생협회’란 동아리 멤버였어요. 우리 동아리가 학술대회를 열었는데 이때 지금 KB금융지주 회장인 어윤대 교수가 강연을 왔습니다. 또 이 학술대회에서 제가 ‘자본자유화와 한국경제’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지요. 투자시장 관련 내용이었는데 제 발표가 흡족했었는지 어윤대 교수가 ‘시장을 읽는 눈이 남다르다’며 과하게 칭찬해 주시더라고요. 그즈음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 증권맨들 이야기를 그린 ‘월스트리트’란 영화가 개봉됐었지요. 컴컴한 극장에 앉아서 그걸 보는데 어윤대 교수의 칭찬이 떠오르면서 가슴속에서 ‘내 인생은 이제 정해졌다’는 느낌이 오더군요.”
   
   서울대 경영학과를 다니던 그는 이후 학과공부 대신 미친 듯 주식공부에만 몰두했다.
   
   “1980년대만 해도 주식투자를 공부할 수 있는 책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영문원서를 구하자’였지요. 간신히 구한 게 마이클 루이스(‘머니볼’의 저자)의 ‘라이어스 포커’란 책입니다. ‘라이어스 포커’가 미국 증권맨들의 필독서 중 하나로 알고 있었기에 이걸 손에 쥐고 얼마나 기뻤는지…. 며칠 밤을 새가며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원서는 이 책이 유일하지요.”
   
   하지만 주식에 푹 빠져 살던 김기현의 당시 투자성적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1987년 당시엔 성장성이 크다는 금융과 건설 기업이 인기였지요. 제 선택은 금융이었습니다. 언젠가 시장이 개방될 테고, 그렇게 되면 한국 금융의 판이 더 커질 거라고 본거지요. 그래서 샀던 게 지금은 사라진 ‘동서증권’과 ‘조흥은행’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제가 사면서부터 제자리걸음이거나 조금씩 떨어졌어요. 못 버티고 팔았지요. 근데 팔자마자 오르더군요.”
   
   
   성수대교 붕괴와 첫 깡통
   
   1992년 그는 SK증권에 입사해 제대로 된 ‘증권맨’이 됐지만 그때부터 그의 증권맨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입사 1년 만인 1993년 ‘금융실명제’가 도입됐다. 차명으로 자금을 맡겼던 투자자들이 돈을 회수해 갔다. 계좌를 폐쇄한 것이다. 이건 그나마 버틸 만했다. 자기 돈을 투자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94년 진짜 투자 실패를 경험한다. 그는 “고객 돈을 굴리다 보니, 꿈이었던 투자가와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1994년 10월 가진 돈에 신용대출과 증권사 미수금까지 써서 몇몇 건설사 주식을 샀습니다. 그리고 10월 19일쯤 예비군 훈련을 갔어요. 예비군 훈련 마지막날인 10월 21일 아침에 성수대교가 무너진 겁니다. 예비군 훈련장에선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도 몰랐어요.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나온 그날 저녁에야 알았지요. 앞이 캄캄하더군요. 건설주가 폭락했습니다. 신용대출에 미수금까지 레버리지가 컸기 때문에 조금만 하락해도 손실이 매우 커지는 상황이었죠. 손도 써보지 못했습니다. 다음 개장일에 팔려고 내 놔도 매도 물량이 워낙 많아서 제대로 팔리지도 않더군요. 성수대교 무너지고 3일 만에 제 주식계좌도 같이 무너졌습니다. 처음으로 깡통이란 걸 차 본 겁니다.”
   
   다행히 직장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1995년 주식거래를 할 수 없는 본사 감사부로 발령이 나자 사표를 냈다. 그리곤 강남구 대치동에 요즘 말로 ‘부티크’라 부르는 작은 사설 투자사를 차렸다. 그가 꿈꾸던 본격적인 ‘투자가’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퇴직금 등을 모은 1000만원이 그의 종잣돈이 됐다. 1년 후 1000만원은 1억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주식판에서 ‘좀 하는 친구’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투자를 의뢰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1996년쯤 지수가 폭등하기 시작했어요. 제 눈엔 그게 더 불안하더군요. 조심스럽게 운용해야겠단 생각에 투자 대상을 ‘앞으로 뜰 회사’가 아니라 ‘절대로 안 망할 회사’로 교체했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게 제일제당(현 CJ와 CJ제일제당)이었지요. 가진 돈 2억5000만원과 신용대출과 미수금까지 써서 제일제당 주식 몇억원어치를 주당 2만6000~2만7000원에 샀습니다. 얼마간 좋았던 주가가 곧 빠지기 시작하더니 1만원대 초반까지 떨어졌어요. 그래도 이 회사는 버티면 된다는 생각에 추가로 더 사기도 했지요.”
   
   그는 이게 주식인생 최악의 패착이었다고 했다. 얼마 후인 1997년 말 한국의 IMF구제금융 신청이 발표된 것이다. 주가는 폭락했고 신용대출 만기와 미수금 반환 날짜가 겹쳤다. 거래 증권사들은 빌려 준 돈을 회수해 간다며 그의 계좌에 있던 주식 모두를 반대매매로 처분해 버렸다. 그의 계좌는 깡통이 됐고 그는 알거지가 됐다.
   
   “돈도 없고, 할 일도 없어졌지요. 수중에 딱 20만원이 남았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머릿속에 딱 5000만원만 있으면 재기할 수 있을 텐데’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때 우연히 원양어선 어부 모집광고를 봤어요. 순간 ‘한 2년 원양어선을 타면 몇천은 벌 수 있겠지’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 길로 가방 하나 메고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어업훈련소’라는 곳에서 선원 훈련을 받았습니다. 항해사 자격증을 따면 돈을 더 받을 수 있단 말에 내친김에 항해사 자격까지 땄지요.”
   
   
   막노동판서 미국 유학까지
   
   그때 참치잡이배보다 현대건설 바지선을 타면 돈을 더 준다는 말을 들었다. 덜컥 현대건설 바지선 선원에 지원해 합격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후폭풍에 현대건설이 약속했던 입사를 취소하며 일이 꼬였다. 이미 교육생 중에서 선원을 뽑은 원양어선들은 바다로 떠났고 그가 탈 배는 남아있지 않았다. 막노동판을 전전해야 했다.
   
   김 대표는 “정말 눈물 젖은 빵을 먹던 때”라고 했다. 고시 대신 증권사행을 택하며 부모님 뜻을 거슬렀던 그였지만 이번만은 버틸 수가 없었다. 어머니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의 어머니가 유학자금으로 1만달러를 내 주었다. 1998년 8월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의 미국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미국에서 한국 시장을 보니 외환위기 이후 최고의 상승장을 연출할 분위기였어요. 코스닥 열풍이 불면서 500원짜리 주식이 한두 달 만에 2만~3만원짜리가 되는 걸 본 겁니다. 그걸 보니 미국에 있을 수 없더군요. 다섯 달 만에 돌아왔습니다.”
   
   후배와 함께 1999년 다시 부티크를 열었다. 그는 당시 한국 주식시장에 대해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폭등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1999년에서 2000년을 넘어서면서 1998년 300포인트대까지 내려앉았던 지수가 800~900포인트까지 올랐습니다. 당시 제약기업들의 주식을 집중적으로 샀다가 2001년 3월 모두 처분했지요. 수익률이 종목당 150~200%까지 났습니다. 2001년 3월에 종잣돈이 1억5000만원으로 늘었습니다.”
   
   이 종잣돈 1억5000만원으로 그는 좀 더 공격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2001년 4월부터 선물·옵션에 손을 댄 것이다. 그런데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벌어진 ‘9·11’ 사태가 그를 또 한번 강타했다.
   
   “모든 지표가 좋았어요. 당연히 지수가 상승할 거로 봤지요. 콜옵션(특정 시점에 미리 정해진 가격으로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로 지수 상승 시 수익을 거둘 수 있다)에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9·11이 터진 겁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불가항력이었지요. 지수가 폭락하면서 손실이 커졌어요. 다행인 건 예전 성수대교 붕괴 때 당한 손해를 떠올리며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는 것이지요. 그나마 손실을 줄이면서, 현물 주식시장에서 낙폭이 큰 대형주 위주로 매입을 했어요. 이 선택이 좋았던 겁니다. 당시 세아제강을 샀는데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지요.”
   
   2001년 말 선물·옵션에 다시 투자했다. “7000만원으로 1계약에 500만원짜리 선물 14개를 샀습니다. 이번에도 지수 상승에 베팅하는 ‘콜옵션’에 투자했지요. 9·11 같은 돌발상황만 아니면 한국지수는 분명히 상승한다는 게 제 분석이었습니다. 그게 적중했어요. 총 7000만원이던 선물·옵션 종잣돈이 2003년 카드사태에도 불구하고 2004년 약 400계약, 총 36억여원으로 불어나 있더군요.”
   
   선물뿐 아니라 현물 주식도 대박이 났다. 2000년대 초 14만원대에 매입했던 삼성전자가 2004년 60만원대로 치솟은 것이다. 그는 자신감이 붙었다.
   
   더 큰 투자를 시작했다. 해외 투자시장에까지 뛰어든 것이다. “2004년 말부터 입니다. 특정 국가, 특정 상품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미국·유럽 시장의 주식은 물론, 외환과 채권에도 투자했습니다. 특히 당시 세계적인 투자가가 되기 위해서는 상품거래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모험 한번 해보자’란 마음으로 겁 없이 세계 상품시장에 뛰어들었지요. 덕분에 원유며, 밀, 면화, 구리, 커피까지 주요 상품거래를 경험해 봤습니다.”
   
   
   시장 경험해보고 싶어 직접 상품 거래
   
   그는 상품거래를 하며 레버리지 거래(차입거래)에 눈을 떴다. 그의 상품거래 종잣돈은 35억원이었지만 레버리지를 통해 그 10배인 350억원어치의 상품 거래도 부지기수로 했다. 그는 최대 1억달러까지 거래를 한 적도 있다고 했다.
   
   “상품거래는 ‘돈을 벌겠다’보단 진짜 세계 투자시장을 느껴 보고 싶어서 뛰어든 겁니다. 수익 역시 크지 않아요. 수백억원 이상을 거래했지만 수익은 7억~8억원 정도였으니까요.”
   
   김기현 대표에게 인생 최대의 대박을 안겨준 건 2005년의 철강주 투자였다. 당시 약 20억원쯤으로 포스코, 세아제강 등 철강사 주식을 매입했다. 이 주식들이 2007년 최소 15배에서 최대 20배까지 폭등했다. 이때 투자자들 사이 그가 산 주식은 수십 배가 오른다는 말이 돌며 그에게 ‘3000배의 사나이’란 별명이 생겼다.
   
   실패와 성공을 끊임없이 반복해 왔던 김 대표에게 실패하지 않는 주식투자 비법을 물었다. 그는 “개인은 절대 한국 주식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주식은 통계와 기업분석 등 경영학은 물론 인간 본성을 연구한 인문학과 공학까지 동원된 아주 정교한 과학입니다. 즉 주식에서 실력만으로 돈을 벌려면 이 모든 것을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 되지요. 그래야 기업의 가치를 알 수 있고, 과거 통계를 통해 미래를 유추해 볼 수 있지요. 또 기업이 만들어낸 제품과 서비스가 얼마나 혁신적인 것이고, 그것이 기업 성장에 어떤 역할을 할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개인이 혼자서 모두 공부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가 개인이 왜 기관과 외국인 투자자에게 질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했다.
   
   “외국인투자자도 사실 기관입니다. 기관투자자들은 한 명이 투자의 모든 것을 담당하는 게 아니지요. 회계나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뿐 아니라 철학과 사학 등을 공부한 인문학도, 수학·물리를 공부한 이학도, 전자나 기계 심지어 의학을 공부한 공학도와 의학도로 구성된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로 무장된 집단이 바로 기관입니다. 이들은 철저히 전문성을 가지고 자신이 맡은 기업과 산업, 시장을 분석합니다. 이 분석을 종합해 경험 많은 복수의 베테랑 매니저들이 매매 시점과 매매 규모를 결정하는 겁니다. 즉 이들이 내리는 주식 매매 결정에는 모든 학문적 지식과 주식시장의 역사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지요. 이들을 상대로 개인이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런 구조의 주식시장에서 개인은 결국 코스닥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장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수히 잦은 거래를 하며 자신들끼리 치고받는 전투를 벌이다 결국 수수료도 건지지 못한 채 쪽박을 차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투자자’가 아닌 ‘투자가’가 되고 싶다
   
   그에게 “그럼 개인은 주식투자를 직접 할 수 없다는 것이냐”고 묻자 “그건 아니다”라며 “기업의 성장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본적인 공부는 돼 있다는 가정에서 말하겠다”며 입을 열었다. “기업을 선택할 수 있는 눈은 주식을 하기 위한 최소한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갖추고 기업을 선택해 주식을 샀다면 자신이 선택한 기업이 역량을 보여줄 수 있게끔 기업에 충분한 시간을 줘야겠지요. 오늘 주식을 사놓고, 1주일이나 한 달 후에 ‘왜 내 주식은 이 모양이야’ 하며 팔 사람이라면 주식을 해서는 안 됩니다. 기업이 성장하고 변신하는 데는 최소 1년에서 3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에 투자한다면 성과가 있을 겁니다.”
   
   김 대표에게 기업 선택을 위한 그만의 방식을 물었다. 김 대표는 “산업이나 시장을 보기보단 기업 본연의 가치를 통해 기업을 선택한다”고 했다.
   
   “시장 상황도 중요하지만 기업의 가치가 좋다면 시장과 무관하게 선택합니다. 경기가 좋지 않아도 성장하는 기업은 있습니다. 또 지수는 하락하지만 주가가 오르는 기업도 있지요. 그런 기업을 찾는 겁니다. 2000년대 초 제약기업, 2000년대 중반 철강기업, 2000년대 후반에서 최근까지 화학기업이 그런 기업들입니다.”
   
   그는 여전히 화학기업들의 가치가 성장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 역시 2005년부터 사들였던 중소형 화학기업의 주식을 보유 중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한국 시장에 대해 “복원력이 탁월한 시장”이라며 최근의 지수 하락도 곧 극복할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 시장의 역사가 지수와 주가의 복원력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한번 폭락했다 해도 2~3년 내 회복했습니다. 한순간 깡통이 될 수 있는 선물·옵션 투자나, 대출 등 남의 돈으로 주식투자를 한 투자자가 아니라면 폭락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업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주가는 회복될 것입니다.”
   
   인터뷰 말미 그가 마지막 말을 했다. “한국 시장에서만 머무는 ‘투자자’가 아닌 세계 시장을 상대로 경쟁하는 ‘투자가’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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