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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상의 7 언.♥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1.♥민중의 소리가 이기다.♥누구에게 낙원을
01/30/202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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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상의 7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1.민중의 소리가 이기다.누구에게 낙원을 허락하나.십자가의 사랑.M.T.M.구경평.Rev Dr Th D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갈보리를 저주의 장소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신 곳이다.

그분이 세상의 모든 죄를 홀로 담당하신 곳이다.

마귀가 기뻐하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던 곳이다.

죽임을 당할 사형수가 마지막 모습을 남긴 곳이다.

 

자기 죄로 죽어가던 두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갈보리에는 두 부류의 사형수가 있다. 한편에는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남에게 선을 보이는 삶이 아니라 악한 죄인으로 살다가 죽임을 당하는 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은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판결에도 불구하고 처형을 당하는 자이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두번째 말씀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 한편의 강도 사형수에게 낙원의 안식을 약속하셨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23:13-16).

 

빌라도는 심문 결과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했다. 헤롯도 사형에 해당될 일이 없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므로 매질하는 정도로 처벌하여 석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중의 소리가 이겼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3:1823).

 

빌라도는 계속하여 사형 언도를 요구하는 민중의 소리에 세 번씩이나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말하지만 결국 민중의 소리가 진실을 이겼다.

오히려 죄 없는 예수를 죽이고 성내에서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하고 혼란하게 하던 바나바를 석방시켜 달라고 외치는 무리의 소리가 이겼다.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맹점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의결을 다수 가결로 매듭짓는 일을 보고 민주주의적 결의라고 한다.

민주주의는 각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존할 수 있고, 한 인간으로서 성장 발전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원리는 첫째로 개인 간의 관계에 관한 도덕적 확신들로 이루어진 체계, 둘째로 개인의 권리와 권력의 사용뿐만 아니라 자유와 전체에 관한 정치적 원리로 이루어진 체계, 셋째로 재산의 소유와 재화 등에 관련된 경제적 확신에 관한 체제를 말한다(참조글①).

평등의 개념, 인간 존엄의 개념 등에서 민주주의는 인간 개인에게도 그 존엄성을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통치 형태 속에서는 자유 선거를 통하여 지도자의 교체가 평화롭게 이루어진다. 시민들은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의 지시에 따라 투표를 한다. 합법적인 차기 선거가 있기까지는 투표에 의한 결정이 결정적으로 효력을 지닌다.

민주주의는 사회적인 면에서 볼 때 시민의 자유가 보장된다. 즉 각 개인이 가능한 한 충분히 발전시켜 개방된 사회를 창출할 뿐 아니라 각 개인의 고결성과 존엄성을 보호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적 투표 결과 반대하던 자가 수적으로 밀리면 패하게 된다. 그렇게 패한 자는 승자에게 굴욕을 당하는 일이 종종 있다. 오늘 빌라도의 판결이나 헤롯의 판결은 민중의 소리에 밀렸다. 바른 말이 고개를 숙이고 뒷전에 서야 하는 상황이다.

 

침례 요한 시대에 의를 외치고 회개를 촉구하던 자는 참수당하는 인물이 되었다.

침례 요한(참조글②) 한 사람이 외친다고 할지라도 올바른 소리에 귀를 귀울이는 아름다움이 요구된다. 비판과 반대를 위한 반대의 소리가 온 군중의 소리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 소리가 승리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② 침례 요한 - 아론의 자손, 제사장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 태어난 자이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다( 1:5).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수태할 것과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는 천사의 예고를 듣고 사가랴는 아들을 낳기까지 입이 봉하여졌다( 1:1122).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친척지간이다( 1:36).

침례 요한은 성경에 등장하는 최후의 나실인으로서 광야로 나가 낙타 털로 만든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예언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3:4).

침례 요한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1:3). 당시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된 구원자라고 하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 건설을 꿈꾸는 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침례 요한의 삶은 전연 그러한 삶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명성이나 권리 주장을 하지 않고 회개를 외쳤다( 3:2).

요한은 담대하고 힘있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였다( 1:18).

요한이 외치는 회개의 표시는 침례를 받음으로 입증되었다( 3:7-14, 21).

예수님도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3:13).

요한은 예수님을 회개의 상징인 침례에 포함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간청에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었다( 3:14-15).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자기 동생의 아내를 취하였다. 침례 요한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침례 요한은 참수형을 받게 되었다( 6:14-29).

 

요한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도록 길을 열어 준 선지자로, 회개를 외치던 그가 예수님을 만난 뒤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외치기 시작하였다( 1:29).

예수님은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침례 요한을 칭찬하셨다( 11:11).

-《비전성경사전》에서.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참과 진리가 사라진 무리의 소리가 승리하였다. 그날 빌라도가 무리의 소리에 참혹하게 무너진 그 모든 것의 결과는 인류의 종말이 이르기까지 가장 끔찍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지상의 온 교회 성도들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신앙고백의 소리를 외치고 있다. 올바른 진리의 외침이 있다면 침례 요한같이 참수되는 일이 있을지라도 외쳐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무리의 외침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할지라도 진리의 소리에 귀를 귀울이고 그것을 따라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갈보리의 사형수 가운데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매달리는 자 있으니,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죽임을 당한 갈보리의 상징이었다.

 

죄 없으신 분에게 세상의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운 곳이 갈보리이다.

 

이곳은 반드시 죽임을 당할 사형수들이 마지막 모습을 남기던 곳이다.

그곳은 예수님의 약속이 있는 곳이다.

 

세상에는 많은 약속이 있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약속은 지켜질 때 가치가 있다.

 

약속(참조글③).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 ‘약속한다’는 말을 우리는 쉽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약속을 하였지만 내 형편과 사정이 달라지면 언제 그 약속을 했느냐는 식으로 잊어버리고 파기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 결과 엄청난 혼란을 초래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된 이야기이다. 한 군인이 군대에 입대하기 전 사귀던 여성과 제대하면 곧바로 결혼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런데 군사 우편으로 서로 열렬한 사랑의 편지가 오가다가 어느 순간 편지가 뚝 끊어졌다.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도, 되돌아오는 편지도 없었다.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된 소문에, 사랑하던 여인이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이었다. 그가 휴가를 받아 부산 남포동 거리를 지나가다가 극장에서 다른 이와 짝을 지어 나오는 여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배신감에 분노한 그는 허리춤에 있던 수류탄을 던지고 말았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다친 일이 있었다.

 

약속이 물거품이 되고 배신감 속에 분노가 가득한 결과 엄청난 혼란을 야기시킨 것이다.

 

오늘 한평생을 죄와 함께하던 자가 죽어가면서 예수님께 요청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23:42).

 

어떻게 보면 이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살아온 과거가 어떠했는가? 삶에 의로운 행위나 선행이 있었던가? 지금 누구의 죄로 인하여 죽어가는가? 본인의 과거 죄악으로 그렇게 된 것 아닌가?

분명 그에겐 감히 내놓을 만한 어떤 선한 모습이 없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께 부탁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고 싶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는 어떤가?

이 강도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어떤 면인가?

그 강도는 사형을 받아 죽었지만 나는 감옥에 간 적이 없고 전과가 없으니 의로운 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즉 그는 죄인이고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구별하는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3).

 

사람의 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죄가 드러난 죄인은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되고, 죄가 드러나지 않은 죄인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법망에는 걸리지 않아 죄가 없는 척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죄가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은 차이는 있지만 죄인이라는 점은 같다. 어떻게 보면 처벌을 받은 자가 오히려 처벌받지 아니한 자보다 의롭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죄의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십계명을 살펴보자.

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는 신륜(神倫)에 대한 계명이며, 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는 인륜(人倫)에 대한 계명이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는 것들이 있다면 역시 우상을 섬긴 것이다.

때로는 어떤 일에 나의 진실을 말하기 위하여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느니 하나님도 무심하다는 등등의 말을 함부로 한다.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은 자가 될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그날을 내 즐거움을 위한 사사로운 날로 바꾸어버렸다면, 역시 안식일을 범한 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수직관계를 잘 이루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수평관계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인간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라는 뜻이다.

수직관계가 잘 이루어진 사람은 필히 수평관계를 잘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를 이루는 것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는데 시집가고 장가들어 둘만의 즐거움에 부모님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되겠는가? 시집갔으니 시댁 식구와 잘 어울리면 될 것으로 보지만 나를 낳으신 부모 없이 어찌 시댁이 있겠는가? 친정 부모님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부모님 앞에서 형제들이 어떤 사소한 말싸움이라도 한다면 부모님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역시 부모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런 작은 일부터 잘해야 할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람을 죽이는 일 또는 남의 인격을 손상시키고 매장시키는 일도 살인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살은 어떻게 보는가? 자기 생명을 스스로 마다하는 일을 살인이라고 보는가?

 

남의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살인이라고 한다면 자기 생명을 스스로 죽이는 일 역시 살인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내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내 것으로 착각한 가운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분명 살인이다.

남의 인격을 매장시키는 일을 우리는 매순간 수없이 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역시 살인이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사회에서도 강간을 하고, 성회롱을 하고, 부적절한 행동을 한 자는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발각이 되거나 고소가 있어야 처벌이 이루어진다. 숨겨진 죄인은 처벌에서 제외된다.

그런데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5:28)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지나가는 예쁜 아가씨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면, 섹시한 몸매를 보고 흑심을 품었다면 이미 간음한 자라는 사실을 면할 수 없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자.

남의 물건을 주인 허락 없이 나의 것으로 삼았다면 도적이라고 본다. 이 계명은 남의 소유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물건을 허락 없이 가지고 가는 것이나 다른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을 무단 복제하거나 다운 받아 사용하는 등 남의 상표를 도용하는 일 역시 도적질이다.

 

거짓으로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면 어떤가? 우리는 내 편리를 위하여, 나의 체면 유지를 위하여, 사소한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사실이 아닌 말을 하면서 어떤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경우도 있다. 과분한 칭찬을 늘어놓는다면 역시 거짓 증거가 된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이 계명은, 이웃 집에 있는 모든 것, 즉 가구라든지 그 집의 여자나 자녀를 유괴하는 사건 등을 말하는 듯하다.

이웃 집에 있는 것은 그 집에 잘 있도록 보호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하지만 여기에 어느 하나라도 걸려들지 아니한 자 있는가? 외부로 드러났든지 드러나지 않았든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니 나도 죄인이고 너도 죄인이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그 강도나 나나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드러난 죄인이고, 나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죄인이라는 것뿐이다. 나 역시 조금도 나을 바 없는 죄인인 것이다.

 

예수님이 예수님께 요청하는 그 강도에게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이 베푸시는 은혜(참조글④)이다.

 

이 은혜가 이 시간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도 임한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 중심에서 시작된다.

④ 은혜 - 복음의 중심적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받을 자의 자격, 공로를 생각하지 않고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 특히 죄에서 구원하시는 은혜이다.

허물 있는 자를 용서하고 축복하시는 무상적인 하나님의 사랑, 특히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구속적인 사랑을 말한다( 17:9).

- 《성서원어대사전》 p.266.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8:42)

Salom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

살아 역사하시는 주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가운데 그분이 사용하시고 귀한 역사를 이루는 그 일에 등반 되는 인물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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