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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2월 20일 영상선교 시작
08/15/2011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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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2월 20일 영상 선교는 시작하다.
아직도 영상 전도 집회를 계속하고있다.

이제는 멀티 미디어 프로 잭트를 이용하다.

그 무거운 16mm영사기와 필림을 가지고 다니지 아니하여도 가능하다.

문명의 이기 속에 편리하게 잘 활동하고있다.



 



 

이때 사용한 컴퓨터는 286이었다.
컴푸터를 이용하여 찬양 집회및 영상집회를 하다.
 



 

8mm & 16mm영사기 그리고 Video를 가지고 영상 집회를...

교회 학교 활동을 녹화하여 재 상영하면서 시청각 교육에도 한몫을 하다.
 



 

16mm영사기로서 영상 집회를 하다.
 



 


이것은 8mm필림이며, 아래있는 것은 그 영사기이다.
 



 



 



 



 



 



 



 



 



 



 



 



 



 



 



 



 



 



 



 



 



 

부임한 그해 여름이었습니다. 여름 교역자 수련회에 참석한 나는 농어촌을 위한 영화선교회에서 이기풍목사님의 일대기를 전도용으로 상영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우리 교회에 영화 전도를 할 생각에 영화전도 집회를 신청을 하였습니다.

 

구 목사님 신청서를 보니 시골입니다. 우리가 시골에는 저렴하게 5만원의 출자 상영비를 받고있습니다. 그런데 사북이라고하면 춘천에서 60리길을 가야 하는데 춘천에서 60리 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않는 길이며, 우리기사들이 사역을 마치고 서울까지 그날 돌아 오지를 못하기에 그날 1일 숙박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어려우시겠지만 지방 출장에 특별 교통비와 1일 숙박비등을 부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다음에…”

 

미처 말을 끝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달 받는 사례금이 5만원인데 십일조도 때지를 못하고 몽땅 준다고 해도 모자라는 실정이니 어디 더 이상 이야기 할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련회의 집회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하나님께 원망식의 기도를 하게되었습니다.

 

하나님 이게 무엇입니까? 농어촌을 위한 영화선교전도사역이라고하면서 정작 농촌에서 신청한 것이 서울과 거리가 너무나 멀어서 당일 되 돌아 갈 수 없기 때문에 숙박비를 더 달라고하는 일이…”

하면서 하나님게 항의의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기를 몇일을 하고있는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내 마음 속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네가 그 일을 해라.”

 

무심코 지나쳐 버릴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어떻게 합니까? 나는 돈없는 가난뱅이 목사입니다.”

 

혼자서 자문자답하면서 나의 갈등은 더욱 심하였습니다. 농어촌을 위한다는 간판은 거창하였고 서울의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서는 이 말이 해당되고 서울에서 먼 농어촌은 좀 더 비용을 물어야 한다는 것은논리적인 계산적으로는 정답이 나오지만 자기는 한 푼이라도 더 수입을 올리겠다는 속샘이다는 생각에 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갈등 속에서 하는 기도는 계속하여 원망이 가득한 기도뿐이었습니다.

어느날 새벽 기도 시간에

 

고아가 고아의 깊은 사정을 알고 과부는 과부의 사정을 안다. 농어촌의 딱한 심정은 농어촌에서 목회하는 그 목사 전도사가 알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네가 그 일을 해야지 누가하겠는가?”

하나님 그러나 나는 돈이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 중에 답변하는 나의 모습이었다.

 

어느 주일날 설교에 학개서 2 8절의 말씀을 들고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관장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니 우리의 가난을 탓하지 말고 신명기 28장의 말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라고 힘있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가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교인들을 향하여 현관문으로 나가 인사를 못하고 강단에서 나오지를 못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나는 입술로만 설교를 하는 사람이지 나의 삶과 행동은 하나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마음과 몸의 행동이 없는 가증한 목사입니다. 나는 물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순종이 없습니다. 순종이 없는 목사입니다. 나의 불가능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 일을 내가 내 자신으로 하려고하는 교만이었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할 실 수 있도록 맡겨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몸부림치며 회개하는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

그렇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이 능력 주시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순종이 없는 모습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이 가득한 구 경 평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기를 3개월 20일간 하나님께 원망하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던 미련한 기간이었습니다.

 

이제는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결단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결단한 세벽기도가 끝나고 집에왔을때 나는 복음 신문에 영사기 25만원 필림20만원이라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즉시 50만원을 농협에서 대출 받기 위하여 장로님께 보증을 서게 하였습니다.

그동안 장로님도 걱정이 되는 것은 목사님께서 말씀은 아니하시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는가 보다하면서 걱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50만원을 대출 받겠다는 말에 그 고민은 이 돈 때문이었다는 것으로 아셨다는 뒷말이었습니다.

하여간 깊은 내용을 말씀하지 않고 50만원을 쥐고 신문에 있는 그곳으로 갔습니다.

8mm 짜리 영사기와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안의숙 여사의 신앙수기를 영화화 한것을 사가지고 돌아 왔습니다.

 

그날이 12 20일이었습니다. 성탄절을 앞두고있는 순간이지만 마을에 방송하고 교회 앰프를 통하여 방송하기를
 
오늘 저녁 8시에 사북교회당에서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영화를 상영합니다. 누구든지 오셔서 영화 감상하시기를 원합니다. 사북교회에서 알려 드립니다.”
 
그렇게 하여 시기에 맞지 않지만 첫 영화 상영을 하면서 영상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뒤에 영화 전도 집회를 농촌 마을 마을을 다니면서 활동하였습니다.
처음에 기동력이 없을 때에 일반 버스를 타고 마을 입구에서 찾아가서 전도 집회를 하였습니다.
한번은 어느 교회에서 전도 집회를 위한 광고를 하고는 시간전에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영화 상영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있으니 마음이 조아리는 심정에 그래도 이시간 저시간 기다리는데 와야 할 버스가 오지 않아 못오는것으로 알고 오신 분들과 의논을 하면서 해어지려고 하는데 경운기 한대가 딸딸 거리면서 나타 났습니다. 그러니까 그 경운기를 타고 이곳 까지 온 것입니다. 물론 경운기의 운전 수는 김용겸 장로님이었습니다.
 
내가 타고 갈 버스가 오지 않는 것을 아신 장로님은 자기의 경운기를 이용하여 전도 현장까지 달렸던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하나님 저에게 이 일을 하게 하셨으니 시간에 구애 받지 아니하고 갈 수 잇는 기동력을 주십시요.”
 
기도하는 가운데
가지게 된 오토바이이었습니다. 그 것으로 주일이면 기도처에 예배하려 갈 수있고 매주 토요일이면 군부대를 방문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있는 기동력이 된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뒤에 영사기를 실고 가는데 비가 오는것입니다.
갑자기 오는 비에 아무 농가에 가서 비니루 비료 푸대 하나를 얻어 영사기를 싸고는 비를 맞으면서 집회 장소 까지 갔습니다. 빗길이기에 좀 늦었습니다.
 
 비에 맞은 나는 먼저 옷을 갈아 입어야 하기에 몸에 맞지 아니한 옷이지만 입고 허급지급 영화 전도 집회 를 위하여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돌아 오면서 생각한다 전천우 기동력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비가 와도 안전하게 비 맞지 않고 갈 수있는 일을 위하여 자동차가 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차에는 전도팀이 함께 동승할수있는 12인승 작은 버스를 한나 주십시요.”
 
오면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는 오직 기도 제목이 12인승 버스가 기도의 전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게 기도하던 저에게 허락한 버스가 사북교회에서 제 2의 기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이용하여 전도 집회때 성도들과 함께 전도할 수있는 일이 되고 영화 전도 부흥회에 갈때는 영사기 등 전도팀까지 동원하여 함께 가게 되니 하나님께 할렐루야 찬양이 입에 가득하기만하였습니다.
 
활동을 하면서 8mm 영사기에서 16mm영사기를 구입하게 되는 일도 되었습니다. 이미 사용하던 8mm영사기는 고장도있고 낡아진 상태에 16mm영사기로 성장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던 순간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이제 12인승 버스를 이용하여 고성까지 가서 어머니를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 자식을 위하여 기도하신 그 결과 이렇게 성장하여 왔습니다.”
는 인사를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에 오후 1시경 사북을 출발하였습니다. 춘천-서울 경부고속도로-대구-마산-고성까지 장장11시간이 소요되는 여행길이었습니다. 도착하니 밤12시이였습니다.
고성을 떠난지 몇년만인지 모르지만. 어머니께서 기도하시고 키우시던 은혜를 기억하며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어머니는 이것을 보시기 위하여 숫한 어려움과 고생을 극복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나의 이 행동과 마음의 인사가 결코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어머니에게 미치려면 까마득히 먼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는 나는 자기과시의 마음이었고 교만의 거드름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나를 알게 하시려고 갖가지 사건들을 주신 것입니다.
하여간 어머니께 그 밤에 인사를 드렸습니다.
 
어머니 저의 아내입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저의 선물 진일이입니다.”
 
한없이 기쁘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가 정성을 다하여 키운 결과 이렇게 찾아오는 이들의 모습을 보시고 즐거워하심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드리고 피곤에 못이겨 잠이들었습니다.
 
이렇게 고성을 방문하고 돌아온 나는 계속하여 열심히 복음 사역에서 일하였습니다.
계속하여 나는 바울의 사상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일하는 전도자 자급 자족하면서 복음전하는 전도자의 길을 걷고 살아가는 그 일에는 상당히 익숙해 진 샘이 되었습니다.
농촌을 떠나려는 젊은이가 있은때 마다 저들을 붙들고 간하여 말하기를
농촌을 젊은이가 지키지 아니하면 누가 지키겠습니까?”
하면서 권유하던 나는 벌써 퇴색된것일까? 농촌을 떠나려는 젊은이를 보고
젊은이 떠나려는 크나큰 꿈이 있으면 가십시요. 큰 물에는 큰 고기가 있습니다. 박 대통령도 시골 출신이었지만 그에게는 대통령이라는 큰 꿈을 가지고 군대를 이끌고 서울을 진주한 혁명군이었지만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젊은이가 가면 분명히 나의 고향을 잊지는 말고 고향의 발전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자가 되어 주십시요.”
 
이렇게 사상이 변한것이 농촌운동 속에 사북화 운동을 하시던 김장로님과 의견이 반대된 가운데 교회를 담임할 수 없다는 마음에 갈등이 시작된것입니다.
하나님 이곳에 머물러 더 열심히 일하고 싶습니다.”
나의 기도에 나 자신이 거부되고있으면서 머물고 싶은 생각이 가득하였습니다.
마음에 갈등과 주위의 상황은 좋게만 연결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세벽 기도회를 마치고 기도하는 가운데 도저히 기도를 할수없습니다. 혼자 잡다한 생각 속에서 번민만 가득하였습니다. 이런 저런 잡다한 생각들이 하나씩 정리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사북교회에 와서 첫 설교에서 한말이 생각의 큰 촛점이 되었습니다.
 
나는 3년에서 5년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가 부흥되면 갑니다.”
라고 말하던
네가 지금 더 있겠다는 이유는 무엇을 원하고있는 생각인가?”
 
라는 크나큰 질문을 나 자신이 자신을 향하여 던저졌습니다.
나는 아무른 말을 못하고 말았습니다.
 
네가 더 있겠다는 이유는 무었인가?”
이 질문이 연속하고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3년에서 5년이라고하였는데 벌써 네가7 7개월이란 세월이 이곳에 있었지 않은가?
그리고 네가 올때에는 월 사례금이 5만원짜리이었는데 지금은 월급이 25만원짜리 봉급을 받는자 아닌가? 그기에다 봄한철 가을 한철 보너스를 100%씩 받고있다. 즉 년 14봉을 받는 봉급자이다. 이제는 이곳에 누가 와도 배고픈 교역자는 아니다. 그리고 네가 올때에는 첫주일 출석 교인이 34명이었다. 그런데 지금 150명이 넘는 성도가있다. 이제 네가 더 큰 부흥을 위한다는 것이 이유인가? 더 큰 사례금의 돈을 위한 것인가? 지역 사회에 더 무었을 인정받는 일군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지역 사회를 위하여 춘천KBS방송국에 찾아가서 시작한 일을 생각해봐 그만하면 지역사회를 위하여 일한것이 있으니 됐지안는가?
 
잠간 이 사건의 이야기를 하고싶습니다.
이지역은 TV전파가 들어오지 않는 난시청지역이었습니다.
텔레비젼을 보기 위하여 공동 안테나를 산위에 세우고 유선 방송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그것도 잘 보지를 못하여 성화성화하는 곳입니다. 내 조그만한 지식으로 그것을 관리하면서 지역을 위하여 봉사를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한곳이 잘 보게되면 다른 한 곳에는 보이지 않느다고 야단입니다.
결국 나는 이 화근을 춘천KBS벙송국으로 찾아간것이다.
방송국장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답을 듣고 싶어 온 사람입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십시요 듣고 잘못된일이라면 시정하는 일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노력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물건도 주지 아니하고 선전을 짠득하고는 돈을 챙겨 간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안된일입니다. 누가 그런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수사 기관에 의례해서라도 시정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예 바로 KBS가 그짓을 하고있습니다.”
 
당황한 국장님은 격한 어조로 반문하셨습니다.
 
아니 KBS가 그런 짓을 한다고하셨는데 무슨 말씀을…”
예 텔레비젼을 보기 위하여 TV를 구입하면 시청료를 받아갑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시청료를 받아갑니다. 그런데 전파를 보내 주시는데 그 전파를 받지도 못하고 시청한다는 명목으로 시청료를 달라는것은 물건도 주지 아니하고 물건 값을 달라는 도적인지 사기군이지 아뭏던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표현이 좀 심하였던것은 사실입니다. 갑자기 대화의 상황을 변하고 다른 직원이 와서 나를 끌어 내었습니다. 나는 그날 그렇게 말을 하고는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춘천에 가는 일이 있으면 방송국에 찾아 갔습니다. 이제는 방송국장님을 면담 할 수 없는 상태이었습니다. 아무라도 붙들고 그이야기는 꼭 같은 이야기를 계속한것 뿐이었습니다.
 
아마 7번째 간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방송국 기술부장이라는 분이 정중하게 나를 맞이하면서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부장님 저가 이렇게 찾아 온것은 저가 살고있는 마을은 어느 지역 보다 반공 교육이 잘되어야 할 지역입니다. 그리고 저의 놀리가 틀렸다면 틀린점을 지적해 주십시요.”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그 해결책을 어떻게 간구하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작 이러한 말씀이 되면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습니다. 일은 간단합니다. 이곳에서 송출하시는 전파를 시청자들이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 방법은 중계소를 설치해 주시는 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마을 주민들이 유선을 이용하지만 시원한 해결을 얻지 못하고있는 딱한 이야기를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우리가 선생님의 도움으로 전파를 잡아보는 일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도와 주실 수있습니까?”
물론 도와 드리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언제 그 일을 위하여 오시겠습니까?”
지금 같이 가시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북에 온 기술부 직원들이 내가 전파를 잡아 세운 안테나 있느 곳에서 부터 산 봉우리를 이곳 저곳을 헤메이면서 가장 유력한 곳을 찾았습니다. 그곳은 XX부대가있는 뒷산이었습니다.
 
선생님 이곳에 우리가 안테나를 세운다면 이지역에는 난시청을 면하시게 됩니다. 그러니 이곳에 안테나를 세우고 철망을 하는데 약 15평의 땅을 사용해야 합니다. 땅 주인으로 부터 사용 승락서를 받아 주실 수있습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면 사무소에 찾아와서 그 땅 주인을 알게 되고 땅 주인에게 찾아 가서 이 사정을 말씀 드릴때 그 분은 더 이상의 설명도 없이 사용 승락서를 쓰 주셨다. 이것을 춘천kbs방송국에 가지고 갔습니다.
 
몇일이 지났습니다. 어느날 저를 찾는 방송국 직원이
 
오늘 부터 방송을 보시게 됬습니다. 즐거운 시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는 인사를 드리고는 헤어졌습니다.
이일이 되었지만 나는 그 감사의 인사를 마을 주민들이 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송병문면장님을 찾아갔습니다.
 
면장님 KBS가 이렇게 마을을 위하여 한 이일에 감사하여 마을 일동으로 감사패를 하나만들고 직원들을 위하여 떡을 좀만들었으면 합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여 새마을 지도자 송병철씨를 비롯하여 면장님 면 부녀회장 몇분의 리장님과 함께 춘천KBS방송국을 찾아가서 감사패를 주민 일동으로 면장님께서 드렸습니다.
그때 방송국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저분이 처음에 오셔서 하시는 말씀에 귀찮은 인물 또 무슨 때를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싫었습니다. 알고 보니 교회 목사님이라고 하시는데 목사라는 표시를 내지도아니하고 마을과 주민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는 많이 감동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피곤하게 일을 하였던 보람을 느끼면서 피곤을 모두 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있습니다.
떠나야 항 일 중에 큰것은 네 사상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것은 농촌운동의 개념이 달라진 것입니다.
어느날 호수 변에서 큰 잉어를 잡는 노인을 보았습니다.
 
할아버지 큰 잉어를 잡으시고는 그냥 더 고기 잡이에 흥미가 없으신지 챙겨 떠나시려고하시네요.”
더 잡기는 그냥 가는것이 좋아 이것이면 됬다네.”
할아버지 옛날 춘천 땜이 있기 전에도 이런 고기가 있었나요?”
아니 목사 양반 땜이 있기전에 이런 고기가 있을수있는가? 겨우 크다면 내 손바닥안에 들고말았지큰 물이 되니 큰고기가 있는걸세.”
그렇다. 큰 물에 큰고기있고 작은 고기도있다. 그러나 작은 물에는 송사리가 있다. 좀더 큰 고기 있다. 그러나 큰물에있는 큰고기는 있다.”
 
이렇게 나는 혼자 말을 하면서 농촌에서 떠나려는 젊은이들에게 큰 꿈을 가지고 떠나라고 권하게 된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사북교회 장로님과 뜻을 같이한 농촌 운동에 반대되는 농촌 운동의 개념이 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사북을 떠나야하는 마지막 결정을 내린것입니다.
 
그 동안 사북교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정리해 봅니다.
 
어느 성탄절 축하를 위한 순서에 나는 클라리넷을 연주하면서 성탄 축하노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저기 성가대를 지휘하는 황관중씨는 하나님 앞에 충성 봉사하는 그일이 좋아 열심하던 형제는 지급 서울에서 목사로서 목회에 최선을 다하고있습니다. 이렇게 사북에서 3명의 목사를 베출한 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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