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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魯會燦)은 전형적인 빨갱이 (노동운동가) 였습니다
07/23/201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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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魯會燦)은1982년 용접 기술을 배워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89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구속돼 3년 수감되었다.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제17·19·2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13년 독수독과이론에 의거해 의원직을 퇴직당했다가 2016년 20대 총선에서 창원시를 지역구로 삼아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원외에 있을 때에는 유시민진중권과 함께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진행자로 활동하였다.[1][2][3]

2018년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특검의 수사가 진행되던 중 7월 23일 오전 9시 38분 신당동 한 아파트의 17층과 18층 사이에서 투신해 사망하였다.


어린 시절[편집]

1956년 부산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중학생 시절부터 첼로를 배웠으며 고교시절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축제에 초청을 받고 첼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는 한 해 개봉영화를 모두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영화광이었다.[5] 중학시절부터 펜싱과 육상에 뛰어났으나, 구기종목은 전혀 하지 못하는 소년이었다. 또 고등학교 2학년때 무술을 잘한다고 학내에 소문이 퍼져 노지심이라는 별명도 생겼다.[6]

1972년 부산고등학교 입시시험에 떨어지고 재수를 하여 1973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한다.[7] 이때부터 고향인 부산 떠나 서울에서 삶을 보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3년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제작하고 배포하면서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씨알의 소리》, 《다리》와 같은 잡지를 읽게 되었고, 함석헌백기완선우휘 등 저항적 지식인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경기고에서 함께 운동을 했던 동기들이 정광필 이우학교 교장, 이종걸 민주당 국회의원 등이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입시에 떨어졌다. 노회찬은 재수를 하지 않고 바로 군대를 지원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197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청년기[편집]

노동운동[편집]

대학에 입학 한 뒤 학생운동에 전념하던 노회찬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는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거리로 나온 민중들을 보면서 "노동자들이 조직화, 세력화되어 앞장 설 때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한다.[8] 이때부터 노회찬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1982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 했다. 그 뒤 서울부천인천에서 용접공으로 위장취업하게 된다. 첫 직장은 기아자동차였으나, 대학생 신분인 것이 탄로나 해고 당한다. 그 뒤 여러 공장을 전전하면서 알게 된 노동자들과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은 정치적인 서클로 발전하게 된다.

원래는 대공장 들어가려고 기아자동차에 시험 쳐서 붙었는데 실수를 해서 예비군 때문에 대학출신이라는 게 밝혀져서 떨어졌어요. 그래서 인천에 있었던 현대정공 하청 회사에서 아주 초보적인 운동을 하고 있었죠. 그때만 해도 저희는 변혁을 위해서 노동자가 되어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기술도 배웠어요. 청소년 직업학교 다녀서 용접기술을 배웠죠. 그러고 있는데 83년쯤 되니깐 1명 2명 현장에 대학출신이 생기더니 84년 되니깐 더 많은 수로 학교 졸업한 위장취업자들이 오는 거라. 자연스럽게 그 전에 알고 지내던 후배들이 같이 하자 해서 써클을 만들었어요. 그 써클이 그 당시로서는 내가 알기로는 전국에서 젤 컸어요. 그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컸지. 인민노련이 인천주안부천팀이 모여서 만들어지는데 그중 한 축이 되죠.[9]

대학생 노회찬은 이렇게 노동운동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노회찬은 1982년부터 각종 시위를 주도하고 불온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수배되었다. 긴 수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편집]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다. 뒤이어 터진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전쟁 이후 억눌려왔던 노동자와 노동운동이 시민권을 얻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인민노련)이 출범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변혁 지향적 노동운동은 일종의 '장기 매복'노선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의 의식 수준, 공안 기관의 감시 등을 이유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매우 신중한 활동 노선을 맞이한 듯했으나 대개는 인맥, 학맥에 따른 서클주의적 노동 운동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첫째로 가내 수공업 적으로 노동운동을 하던 분산된 서클들을 모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동 운동으로 새롭게 개편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둘째로 과학적인 정치 노선과 조직노선으로 노동운동을 통일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셋째로 현장 노동자의 소모임 활동이나 일회적인 경제투쟁을 넘어선 공공연한 정치 선전과 선동 활동이 필요했고, 넷째로 전국적인 노동자 정치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동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인천 지역에서 지역정치 조직을 먼저 만들기로 했던 것입니다.[10]

인민노련은 80년대 운동의 유행이었던 주체사상파와 제헌의회파를 양 극단의 교조주의로 즉, 정치적 신념을 현실변화에 대한 인식이 없이 맹신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실사구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87년 6월 10일 인천 부평에서 창립을 선포했다. 결성 직후 내부 논쟁을 통해 NL진영이 이탈하면서,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의 운동 방향과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인민노련은 민중 민주(PD)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인민노련은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즉, 진보정당을 조직의 목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1987년 대선에서 백기완을 대선후보로 추대했으나, 백기완이 야권단일화를 위해 후보를 사퇴하게 된다. 이후 인민노련은 <노동계급>, <삼민동맹>[11], <안산노련>등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거듭났다. 인민노련은 당시 존재했던 진보적인 사회운동 조직 중 현장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가장 큰 전위조직이었다.

노회찬은 인민노련 중앙위원, 격주간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인민노련 활동을 주도하던 중 198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체포된다. 노회찬은 법정에서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 받고 1992년 만기 출소한다. 옥중에서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의 원고를 구상하기도 했다.[12]

체포 1년 전인 1988년 12월, 인천해고노동자협의회 사무국장 김지선(현 여성의 전화 연합 조직위원장, 사단법인 서울강서양천여성의전화 소장, 가정폭력상담소 소장)과 결혼했다.

노회찬과 함께 인민노련 활동을 했던 사람으로는 송영길 민주당 국회의원신지호 한나라당 국회의원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 조승수 진보신당 국회의원 등이 있다.


촛불시위[편집]

총선 이후 진보신당은 내부적으로는 총선용으로 만들어진 정당을 재창당하여 본격적인 틀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앙당 측은 당 홈페이지를 통해 재창당에 대한 일반당원들의 의견을 물었으며 이런 작업의 일환으로 지난 2008년 5월 16일에는 재창당에 대한 평당원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인해 광장에 나간 시민들을 당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재창당 논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노회찬은 촛불시위 초기부터 활발하게 참여했다. '진보신당 칼라TV'에 리포터로 자주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촛불시위 초기 시위 배후에 대한 보수진영의 공격이 이어지자 "촛불시위의 배후가 있다면 이명박 정부"라며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협상 때문에 건강을 걱정하는 국민들이 순수하게 모여서 시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30]

진보신당은 촛불시위를 지원하기 위해 '진보신당 칼라TV' 방송 이외에도 연행자 면회 및 경찰서 항의 방문, 연행 과정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에 대한 법률적 자문, 중간에 참여하고자 하는 시민들을 위한 중앙당 상황실 개설 등의 활동을 했다. 진보신당의 촛불시위는 총선 이후 지못미 효과와 이어져 당원수의 증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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