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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희舞姬의 화가' 에드가 드가를 만나다.
06/09/201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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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가치와 과학의 가치는 만인의 이익에 대한 사욕이 없는 봉사이다. 
                                                                           - 존 러스킨 - 


사색으로의 여행 (Norton Simon Museum)- 2

                            

                                         ----Edgar De Gas를 만나다.


노턴 사이먼 뮤지엄의 19세기 전시관에 가면 에드가 드가의 작품세계가 펼쳐져 있다. 유난히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음이 내겐 놀라움이었다.

'무희의 화가'라는 에드가 드가 Edgar De gas


   

에드가 드가의 초상  ---  출처: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데생화가 중 한 명인 에드가 드가는 고전주의 미술과 근대 미술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화가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가 아들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차려 집안에 작업실을 두게 했고, 그런 부모의 후원으로 회화와 드로잉, 그리고 조각뿐만 아니라 189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진술에도 정통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 Dominique Ingres. 신고전주의 초상화가이자 서사화가로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터키의 욕탕'으로 유명하다)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프랑스 낭만주의 미의 대표화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드가는 1855년에 앵그르를 만났는데, 그는 드가에게 "선에 충실하라"라는 유명한 조언을 해주었다. 드가는 파리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고 그후 이탈리아에서 3 년간 공부했다. 그리고 1865년에는 파리 살롱전에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했다. 드가는 무명미술가협회의 회원이었는데, 이 협회는 1874년부터 계속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첫번 째 협회전에는 드가, 클로드 모네, 베르트 모리소,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나중에 평론가 루이 르루아가 이 전시회에 대해 야유섞인 의미로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불충분한 세부묘사와 두드러진 붓질, 색을 혼합하지 않고 사용하는 등의 회화양식 때문이었다.

참조 : 네이버 지식백과.


드가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화랑 주인 폴 뒤랑 뤼엘은 드가가 활동하는 내내 그를 후원해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드가의 작품을 이해하거나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1880년에 색다른 시점의 구도와 자유롭고 빠른 붓질로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밀랍 모형(이후 청동으로 주조됨)에 다른 요소들인 실제 천으로 만든 발레용 치마, 인형 머리카락, 새틴 리본 등을 결합하여 만든 그의 걸작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1880~1881경)]에 대해서는 열광, 분노, 혐오감 등 여전히 의견이 분분했다. 

1886년에 드가의 작품들이 뉴욕에서 전시되었고, 1905년에는 런던에서 드가와 다수의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가 열렸다. 그에 대해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어느 정도 여성혐오증이 있었고, 여자보다는 자신의 미술 세계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대다수는 여자 무용수, 여자 세탁부, 재봉사, 목욕하는 여자와 같이 여자와 여성노동자들을 묘사하고 있다. 말년에 드가는 시력이 나빠졌으나,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는 능력은 그럭저럭 계속 유지해나갔다.


인상주의 화가들속의 드가.
드가는 여덟 차례 열렸던 인상주의 전시회 중 일곱 번을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식과 인상주의 미술 사이에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그는 "내가 정부라면 야외에서 실물을 직접 보며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들을 감시할 특수 경찰부대를 조직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외광회화'를 비판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에도 휘말렸다. 이 사건은 유대인 군인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반역죄로 잘못 기소당했고, 드레퓌스의 지지자와 반대파 간의 논쟁으로 프랑스가 양분되었던 사건이다. 드가는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주장하여 그의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 결국 이 일로 그는 많은 동료 인상주의 화가들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참조; 네이버 캐스트

*드레퓌스 사건(1895년); 스파이라는 누명을 쓴 유대인 대위였던 드레퓌스를 지지한 좌파로는 에밀 졸라가 유명하다. 드가는 반유대인파. 1995년에서야 무죄로 인정되었다는데,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처음 알게된 역사였다.




목욕 1886, 루브르 박물관 소장.

여성을 성적인 면으로 그린게 아니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노턴 사이먼 박물관 소장.

목욕 1886-1889


이 청동 조각의 원형 밀랍 조각은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드가는 경마장에도 자주 갔다는데, 역동적인 말의 모습보다는 경마장 주위를 관조하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The false start.









노턴 사이먼 뮤지엄 소장



    The Belleli Family

드가가 그림공부를 하러 이탈리아에 갔을 때 그린 그림으로 벨레리 훼밀리는 드가의 고모네 식구라 한다.


이젠 드가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자. 

그가 남긴 작품과 그에 대해 세상은 왜 호기심이 많은지 전반적으로 그의 가십이라는 것은 그가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와 그 이유가 여성을 혐오스러워 했다는 것인데 왜 이런 이야기가 있는 것인가?

그럼에도 그의 그림을 이야기하자면 많은 발레의 무대와 발레리나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말이다. 세상은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 그의 그림들속에 있는 여자의 얼굴이 전혀 예쁘지 않게 그려진 것과 대다수의 발레리나를 그린 그림들은 여성의 얼굴이 뚜렷히 그려지지 않은 점, 혹자는 뭉개진 듯 보인다는데...., 

드가가 어느 유명 작가 부부를 그리며 그의 부인을 예쁘게 그리지 않아 작가가 화를 내며 부인의 얼굴이 있는 부분의 그림을 찢어버린 것을 예로 들며 드가의 여성 혐오증을 설명한 TV프로도 있었다.(SBS)

드가가 여성 혐오를 가지게 된 이유는 어린시절 뛰어난 미모의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동생, 즉 드가의 삼촌과 불륜관계를 가진 것에 있다고 한다.(신비한 TV 서프라이즈, MBC) 더구나 드가에 대한 글들 중에서 그의 아버지는 그런 사실을 알고도 부인을 사랑하여 그러한 사실을 묵인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부정과 그 사실을 묵인하는 아버지,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아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가 여성을 혐오한게 아니라 어머니의 부정으로 인한 여성에 대한 불신과 사랑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그가 그린 발레리나와 여성들의 초상화를 보자. 노래하는 여가수나 발레리나의 얼굴이나 표정이 아름답지는 않다.

 장갑 낀 여가수





그러나 그가 여성을 혐오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드가의 그림에서 발레가 주제인 경우, 드가는 남자 무용수를 그린 적이 없다. 그는 남녀가 같이 만드는 예술 장르로서의 발레에 관심이 있던게 아니고, 여성 발레리나에게 관심이 있었고 그들의 몸이 환상과 환멸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화가로써 여성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찾기보다는 여성의 움직임을 그렸던 그에게 사람들은 여성을 혐오했다는 낭설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고생각해 보았다. 

그것을 보여주는 예로 발레 주제 그림에서 무대위의 모습이 담긴것은 그의 수백여점의 발레 주제 그림 중에 20%도 되지 않는다. 드가의 발레리나들은 대게 리허설이나 공연이 끝난 직후의 모습인 경우가 많다, 그에게 '무희의 화가'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가장 큰 수입원이 되어준 발레리나 그림들 중 유명한 그림인 [무희, The Star], 여기에서도 그의 관심은 무희뒤에 있는 검은 옷을 신사의 모습이 드가 특유의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당시 파리 오페라하우스에 부설되어 있었던 발레 스쿨에는 10대 초반의 소녀들이 등록해서 춤을 배웠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노동자 가정 출신이었다고 한다. 오페라하우스의 부유한 고객은 이 소녀들을 공연 전후에 따로 만날 수 있었는데, 놀라운건 이런 만남이 종종 매춘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드가의 그림[스타]의 소녀는 요정같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환상의 대상이지만, 곧 검은 옷을 입은 신사가 암시하는 난잡한 현실, 환멸의 세계에 속하게 되는 안타까운 대상의 보여짐이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드가는 발레 스튜디오를 너무 많이 드나들어 발레의 기본 스텝을 거의 외웠다고도.....,

근대적인 조각, 조각의 사실주의를 시도하다.

드가는 30대 부터 시력이 나빠져서 30대 후반에는 아예 한쪽 눈의 시력을 상실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그림말고 관심을 가진 곳이 조각이다. 그는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으로 화가였다가 조각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각가이기 보다는 화가이기를 원했다. 그저 조각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림을 대신하고자 한 일이라 여겼다고 한다.

당시 기존의 살롱 제도의 운영에 불만이 많았던 드가는 ‘리얼리스트를 위한 살롱도 하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드가는 카페 게르부아의 친구들과 모임을 조직해 1874년부터 열게 된 이 ‘새로운 살롱’은 1886년까지 8번 개최되었는데 포스팅의 윗 부분에도 언급했지만, 드가는 7번째 전시를 빼고 모두 참여했고, 이 전시에 출품을 하게 된 이후로는 살롱에 작품을 내지 않았다. 이 전시회에는, 1회 때 전시된 모네의 [인상, 해돋이]때문에 인상파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드가는 한 순간의 인상을 그대로 작품화한 적이 없고, 기억과 상상력을 동원해 화면을 구성했던 '인상파'라는 이름을 싫어했다. 그는 ‘사실주의자’로 불리길 원했고, 작업실에서 완성된 그의 작품은 야외에서 그려지곤 했던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인상파전에 선보인 작품 중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그가 평생 단 한번 전시한 한 점의 조각 [14세 소녀 발레리나 Little Dancer Aged Fourteen]였다.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 청동ㆍ모슬린 스커트ㆍ실크 리본, 24.5×35.2×98cm, 1880~1881, 노턴 사이먼 미술관.


[14세의 어린 발레리나]의 모델은 1878년에 열네 살이 된 마리아 반 구템이라는 소녀였다. 이 작품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화제작으로 관심을 끄는데, 첫째가 화가의 조각품이라는 것이며, 주목할 점은 혁신적인 제작 방식이었다. 이 작품은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청동 조각에 실제 천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허리에는 모슬린 스커트를 두르고 땋아내린 머리는 실크리본으로 묶어 등 뒤로 늘어트렸다. 이는 당시 조각계의 불문율을 깨트린 파격으로 지금도 이런 작품은 없다고 한다.

[14세의 어린 발레리나]의 모델이 된 소녀의 어머니는 세탁부였다. 1880년대에 드가는 패션의 도시 파리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들고 있는 모자가게 점원, 세탁부 등의 여성 노동자에 관심을 쏟았다. 세탁부라는 주제는 드가가 존경한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 근대 생활의 화가, 판화가)가 처음으로 그림에서 다룬 바 있다. 파리 사회의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이전에는 저널에서만 다뤄졌을뿐, 본격적인 회화의 주제가 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드가의  [다림질하는 여인들 Women Ironing]의 주인공은 19세기 말 노동 계급 여성의 상징이라고 불릴 만큼 유명해졌다.

The Laundress 노턴 사이먼 뮤지엄 소장.

그러면 독신남 드가는 평생 로맨스가 없었을까? 아니다. 그가 호감을 가진 유일한 여성이 있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날카롭고 작은 눈에 강인한 턱을 가진 화가 '메리 카사트'(Mary Cassatt)였다. 그녀는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에 정착한 부유한 집안의 미국인으로 드가는 카사트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녀에게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가진 호감으로 그녀를 화폭에 담기도 했다. 드가가 그린 [카드를 쥐고 앉아 있는 메리 카사트], 세상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여성에 대한 환멸로 그녀조차 예쁘게 그리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녀 자신의 초상화와 생김새는 별반 다름이 없는 모습은 그가 여성혐오자라서 여성의 얼굴을 일부러 밉게 그렸다는 설을 부정하는 확실한 면이다. 카사트는 평범한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즐겨 그렸는데 뛰어난 데생과 자연스러운 비대칭 구도는 드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에드가 드가 [카드를 쥐고 앉아있는 메리 카사트]

카사트가 직접 그린 자신의 자화상(아래)과 드가의 그림(위)을 비교해보면, 자화상에 등장하는 카사트는 단아하고 얌전한 모습으로, 드가의 그림에 카사트는 느낌이 중성적이다. 이렇게 개인마다 관점은 틀려지는 것이다. 

여기서 호사가들의 관심부분으로 드가와 카사트의 관계도 과연 마네와 모리소의 관계처럼 분홍빛이었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카사트는 드가에 대해 연정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드가도 역시 카사트와 결혼할 생각은 있었지만, 그 당시 드가는 무일푼이었고, 일정한 수입조차 없었다. 게다가 몰락한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하는 막중한 책임까지 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존심 강한 드가가 선뜻 카사트에게 결혼하자고 나섰을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세월은 지났고, 아무도 ‘만일’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이렇게 카사트와 드가의 숨겨진 로맨스는 인상파의 역사에서 마네와 모리소 못지않게 깊은 연막을 풍기며 궁금증과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미술관에서 미술구경 잘 하기 - J블로그 <---마네와 모리소 이야기. 중앙 블로그 '요세미티'님의 포스팅.


메리 카사트의 자화상<Mary Cassatt, 1844-1926>

위의 것과 같은 동영상. 




Antonio Vivaldi- The Four Seasons- Winter- Adagio

예술의 가치와 과학의 가치는 만인의 이익에 대한 사욕이 없는 봉사이다.
                                                                           - 존 러스킨 - 



에드가 드가, 무희의 화가, 발레리나. 제 2의 인생. 조각, 14살의 어린 무용수,노턴 사이먼 뮤지엄,메리 카사트, 인상주의 화가,블로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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