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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의류 생활 향상시킨 문익점 선생 독점으로 때돈 벌 생각않고 무료로 나눠줘
07/10/201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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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선생 기념 우표

(문익점 목화 전래)


백성들의 의류 생활 향상시킨 문익점 선생


독점으로 때돈 벌 생각않고 무료로 나눠줘


종 대왕 한글 창제와 버금가는 역사적 공헌


동시대인과 후대에게 배푸는 정신 키워야


여느 사람 같았으면  그냥 지나칠 일을


알뜰살뜰 살펴서 백성들에 도움주려


귀양살이 도중에 발견해서 붓뚜껑에 담아와


장인과 함께 애써서 길러 키워 전국에 보급


후세가 모두 고마워하고 칭송해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빛나리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면 맨 처음 생긴 조선 (고조선) 에서부터 일제 강점기 시작 (1910) 직전에 있었든 조선 (이씨 조선) 까지 왕조 국가였기 때문에 나라의 최고 권력자는 왕이었다. 물론 그들 (왕들) 이 세종 대왕 같은 명군이 나와서 문화적 업적을 크게 이룬 분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조상 잘 둔 덕분에 그 자리에 올랐고, 백성들에게 전대보다 특별히 잘 한 일도 없이 지낸 임금들이 더 많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러한 임금이나, 정승 같은 고위 관리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사람들이나 (Contemporaries) 후대 (Posterity) 를 위해서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우리 선조들도 많이 있다.


이처럼 왕들보다도 더 많은 백성들의 생활과 살림에 더 큰 혜택을 준 선조들을 찾아보고 그들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며, 우리 역시 비록 여러면에서 그들의 백분의 1 (1/100) 에도 못 미칠지언정, 우리 나름으로 그들이 행하신 업적의 만 분의 일 (1/10,000) 이라도 이웃과 후손을 위해 베풀려는 마음세라도 가져보자는 뜻에서 기려야 할 위대한 보통 사람이라는 새로운 기획 기사 시리즈를 시작하려합니다.


오늘은 이 시리즈의 첫회로 이 땅에 의류 혁명을 일으켜서 후세 명사들이 두고두고 칭송하는 문익점 선생을 소개 드리려합니다. 이분이 하신일은 세종 대왕의 한글 창제와 버금하는 만백성이 추운 겨울을 솜이불을 덮고 겨울을 지내개 하고, 가볍고 튼튼한 무명 옷을 입어서 종래의 삼베 옷에 비견할 수 없는 만족스런 촉감과 의류계의 일대 혁신적 패션을 불러 일으켰으므로, 우리 모두가 초등학교 교과서를 통해서 일찍암치 배웠읍니다.


때는 고려 왕조 말엽인 공민왕대에 원나라에 가는 외교단원의 일행으로 문익점이 서장관 (문서 관리 책임자) 으로 파견되어 갔다가 (1363), 원과 고려간에 외교 분쟁이 있어서, 멀리 중국 남부 지역 (현재운남성)에 귀양 살이를 약 1년간 하는 동안에 목화가 그 지방에서 재배되고, 목화를 실로 뽑아서 베를 짜서 옷을 지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솜을 이불에 넣어서 솜 이부로 만들어서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낸다는 점을 알아내었다.


여느 사람들 같았드라면, 먼저 귀양 살이가 힘들어서, 목화가 있는지 없는지에도 관심이 없이 하루 빨리 지겨운 귀양 살이에서 벗어나기만 고대했을테지만, 문익점 선생은 이 목화를 발견하자마자, 고국에 있는 동포들이 이목화애서 실을 뽑아 옷을 만들어 입고 추운 겨울에 솜 이불을 덮고자서 따뜻하게 지내면 그들이 얼마나 좋아할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뛰기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은 자체적 특산물은 수출품 (완제품)으로 팔아서 외화 획득에 큰 부분을 차지했으므로 비단의 원료인 누에고치나 목화 씨의 대외 반출을 불허하여서 문익점 선생은 래 가져나가는 방법을 고심한 끝에 그 당시 필기구 였든 붓 뚜껑에 목화씨를 넣어서 감춰서 귀국하였다. (1367)


문익점 선생은 원래 지금으로치면 경상남도 산청 분으로 과거에 뽑혀서 서울 (개경 =개성)에서 중앙 정부 관리도 하고 지방 관서에서도 근무하였는데, 원 나라 파견에서 귀국한 다음에 잠시 낙향해 있는 동안 고향에서 장인 어른 (정천익 )과 목화 씨를 재배하였는데, 첫해에는 열개 가운데 겨우 한개만 꽃을 피워 성공하였고, 그 다음해부터는 수확이 훨씬 나아졌다.


목화 재배에는 성공하였으나, 솜으로 실을 뻬내는 법은 몰라서 고민하든 차에, 포교차로 그 지방을  둘러보든 가운데  장인 정천익댁에 머물든  중국 스님(홍원)에게 강권하다싶이 물어서 씨를 빼는 씨아 (取子車)와 실을 뽑는 기계(?絲車)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왔고,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에게서 이를 배워 다시 시중에 보급시켰다. 이후 이를 근거로 옷과 이불을 만들게 되었다.


문익점은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9년에는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무료로 나누어 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고 목화 재배를 교육하였다.

 

목화가 널리 전해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귀족 권문세족 과 왕족들만이 입고 덮던 솜이불과 솜옷이 시중으로도 확산된 것이다.

 

후일 조식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后稷同).”며 그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한편 문익점의 손자 문래(文萊)와 문영(文英)실 잣는 기구를 개량했다.[4] 이 기구를 '물레' 라고 부르는데 바로 발명자 '문래'의 이름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4]

 

문래가 발명한 실잣는 기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문래라 부르다가 말이 와전되어 물레가 된 것이다.

 

그의 고향인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19631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8 《산청 목면시배 유지》(山淸木棉始培遺址)로 지정되었고, 이곳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졌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후대의 학자 남명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에 수록되었다.

 

후대의 학자인 조식, 김육, 윤휴, 이익, 정약용 등은 그가 목화를 보급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남명 조식(曺植)은 후일 문익점의 공로를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后稷同).”라는 시를 지어 찬양하기도 했다.

 

 

 

지금 같은 자본주의 사회였드라면, 문익점은 종자를 그냥 나누어주지 않고, 특허를 신청해서 얻어낸 다음 목화 씨를 비싼 값에 팔아서 때부자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문익점 선생은 백성들의 의류 생활 개선과 월동을 편히하도록 모두 무료로 나누어 주셨다.

 

우리 모두도 문익점 선생의 숭고한 애민 정신 (愛民 精神)을 이어 받도록합시다!

 

후기: 문익점 때보다 800여년 앞선 백제 면직물 발견 보도가 있으나, 이것은 분명히 중국에서 수입한 물품이었을 것임이 틀림 없다당시 백제에서 재배했다면, 왜 대대로 내려오지 않았을까?


과거를 되돌아보면 미래를   있다 (관왕지래觀往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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