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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대로 두었어도 석방될 반공 포로 미리 석방해 애궂은 우리 장병 3만여 전사해
07/11/2019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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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최후의 격전지  (금성 돌출부)


이박사가 외교의 천재라고요? 한번 살펴봅시다


그냥 그대로 두었어도 석방될 반공 포로 미리 석방해


애궂은 우리 장병 3만여 전사하고


국군 포로 돌아오지도 못해


중공군: 한국전쟁 중 가장 포탄을 많이 쏘아대고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금성천 전투


클라크 대장: 북진이 쉽지 않다는 교훈을 줘


아이크: 휴전 지연 5주간 미군5천 손실 애석해해


신사적으로 죽이지 않고 비밀 특사보내 용퇴 권고


4-19이후 그린 주도 이박사 퇴진시키고


권토중래 기도하자 하와이로 납치해가

 

지금 한창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일제 시대 징용 당한 근로자 보상 문제와 위안부 문제로 첨예한 대립을 보이다 일본의 아베 총리가 한국 경제의 약한 고리인 반도체 기초 소재를 차단하는 방법을 택해서 한국을 길들이려는 태세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한일 갈등의 근본 원인은 일본이 한국과의 전후 처리 문제를 매끄럽게 매듭짓지 못한 탓으로 있다.  또한 정부가 너무 반일적 강경 태세를  견지한 데도 일정한 구실을 셈으로 보인다.


이처럼 외교가 꼬일 때면, 국민이 외교의 천재 칭송한 이박사가 그명성의 값어치가 나가는 외교 행보를 취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침 오늘이 7 11일이고, 이틀 뒤인 7 13 (1953) 박사의 용감한 외교 행보로 우리 장병 3 여명이 전사한 한국전 최후의, 최대의 인명 피해를 남긴 7-13 전투 또는 금성 돌출부 전투라 불리우는 전투가 시작한 날이다.


우선 쌍방 10여만명의 전사상자를 내게한 전투가 벌어지게한 배경부터 살펴불 필요가 있다.  먼저 1950 9 15 인천 상륙에 선공한 맥아더 원수는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에 멈추는데 만족하지 않고 북으로 진군을 계속했는데, 이에  약간 불안 감을 느낀 트루먼 대통령이 태평양의 고도 웨이크 섬까지 날아가 장군에게 중국의 무장 개입 가망성에 대해 물어 보자 맥장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하고 목에 힘을줘서 말해서 (1950 10 15), 트루먼 대통령은 이젠 발을 뻗고 잘수 있겠다고 쾌재를 부르면서 워싱턴으로 돌아 갔다.


이에 앞서 중국은 그해 9 말경부터 방송과 인도 대사를 통해 한국군이외의 군대가 38선을 넘어 오는 경우에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경고를 발했지만, 맥아더를 위시한 미국 정부는 괜히 헛소리 한다고 무시하였다.


맥장이 소리친지 불과 나흘 뒤인 (10 19) 중국은 중국 인민 지원군이라는 30 대군을 북한의 산악지대로 파병하여 산속에 숨어서 북상하는 한국군과 미군의 진격을 노리고 있다가, 상대적으로 무장이 약한 한국군을 먼저 치고나서 다시 뒤로 빠져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서  그들의 돌연한 출격과 후퇴를 두고 그들의  의도와 병력 수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이나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든 차에 보급품의 지원을 받고, 미국의 추수 감사절에 칠면조 고기로 배를 채운 군대가 다시 북진을 계속하여 첫날은 나갔으나, 다음날 부터 중국 지원군 (소위 중공군) 평안 북도 산골에서 한국군 2군단에 치명적 타격을 입히고 (군단이 해체됨) 미제 2사단의 퇴로를 봉쇄하여 4 여명이 전사하고 포로가 3천명이 넘었다. 그래서 사단장이 보직해체되는 어이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실은 우리 국민들에게만 바로 알려지지 않아서, 아직도 북진 통일이 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하고 있다.


동부 전선의  장진호 전투는 비교적 알려져 있어서 이부분은 생략한다.  초기의 중공군은 중무장을 하지 않아서, 박격포가 고작이었고, 소총도 모든 군인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고, 당시 보병의 주무기는 막대기 수류탄이었다한다. 이와 같이 경무장한 중공군한테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군이 떡이 되었다는 전선의 보도를 접한 미국민들은 패닉 상태에 들어 갔다.


놀라기는 트루먼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기자회견에서 이러한 사태에서 어떻게 대처하실 계획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의 병기고에 있는 모든 무기를  사용하겠다” 말하자, 그렇다면, 원자탄도 사용한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되묻자, 트루먼은 모든 무기를 사용할 것이다라고 되뇌었다.

이튿날 모든 신문에 미국 한국전에 핵폭탄 사용 고려라고 대문짝만하게 제목의 기사가 나왔고, 영국과 프랑스등 유럽 각국이 놀라서 이는 바로 3 세계 대전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놀라서 동독에 주둔한 소련군이 T-34 탱크를 앞세워  2~3 안에 유럽을 바로 유린 것으로 전전긍긍하였다.


이에 영국 수상 애트리는 르네 플레방 프랑스 수상이  당신이 유럽의 대변인으로 미국에 가서 3 대전을 막아달라 요청을 받아서 당장 워싱턴으로 날아 갔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과의 장기 협의을 통해, 한국에서의 무력 통일 방침을 철회하고, 전쟁을 중국으로 확대하지 않으며, 원자탄을 사용해야하는 경우에는 영국과 사전 협의하고, 한국 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한다는 트루먼-애틀리 선언 발표하였다. ( 1)


그뒤로 한국전과  한국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면 그들의 선언대로  이루어 져서 우리는 트루먼-애틀리 선언 체제에서 살아간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한국전에서 참패를 당해서 얼굴에 똥칠한 맥아더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생각은 않고, 모든 것을 본국의 정책 때문으로 돌리고, “전쟁에서는 승리 이외에는 다른 대체물이 없다 (No substitute for victory in war.)” 외치면서, 전선을 만주와 중국 해안지방 나아가 중국 본토까지 확대하고 원자탄을 사용하자고 주장하였고, 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한만 국경에 코발트로 방사능 띠를 만들어 중공군의 증원을 막겠다는 안까지 내놓았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진공에 너무 놀랐는지, 아예 한국을 포기하고 철수하자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크리스마스 직전에 어이 없는 교통 사고로 8 사령관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이 떨어진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서울 다시 수복하고 38선까지 거의 회복시키자 트루먼 대통령은 휴전을 제안하려고 초안을 맥아더에게 보냈는데, 이를 맥장은 공산군 사령관들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사실상의 최후 통첩을 발표하자, 대통령의 지휘권을 무시한데 화가 치밀은 트루먼 대통령은 측근 참모들과, 국무, 국방 장관 그리고 합참의장의 동의를 얻어서 맥아더를 모든 직위에서 파면시켰다.


그렇다면, 이박사가 트루먼-애틀리 선언 몰랐을 리도 없고, 그의 멘터 (Mentor) 였든  맥아더 원수가 해직정도가 아니라 파면당한 상황에서 자신이 그토록 읊어대든 북진 통일 가능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의문 스럽다.


트루먼은 애틀리와 합의한대로 휴전을 논의하기 위해 에치슨 국무 장관에게 하명하고 에치슨은 주소 대사관에서 근무한 있는 캐넌을 당시 소련의 유엔 대사인 말리크 첩촉하여 본국 (소련) 동의를 얻어서 유엔 방송을 통해 말리크가 교전 쌍방에 휴전을 제의하였다. 때문에 지금 까지  휴전을 소련이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것은 트루먼의 구상인 것이다.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포로 송환 문제로 질질끌고 있었는데 1952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나온 2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 원수는 선거일 불과 2 전에 나는 (당선되면) 한국에 가겠다 (휴전방도를 강구할 것이다)” 공언하여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다.


그는 약속대로 한국에 가서 전선을 시찰하고 중부 전선의 산악 고지전이 전장인 것을 확인하고 아무작에도 쓸모 없는 비탈의 한줌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미국의 자제들이) 피를 흘린다는 것은 넌센스라고 판단하고, 하루 빨리 전쟁은 휴전으로 끝내야 한다는 그의 복안이 옳다고 확신하였다.


마침 취임 첫해 (1953) 3월에 소련의 스탈린 수상이 사망하여 하나의 걸림돌이 없어져 휴전 협상에 박차를 가할 있었다. 이어 상병 포로교환이 합의되어 성시되었고 , 6 8 가장 걸림돌이었든 포로교환 문제가 타결되어 휴전 협정이 오늘 내일로 점쳐지고 있든 상황에서, 느닷 없이 이승만 박사가 반공 포로 석방하는 사건이 발생해서 휴전 협상이 뒤엎어지지나 않을까 세계를 놀라게하였다.

이날 석방된 반공 포로들은  6 8일의 합의에 따라 그날 석방되지 않았드라도, 휴전 조인 후에 중립국 관리 지역에 수용된 다음에도 자신이 북한 송환을 거부하면 강제로 보낼 없고, 남쪽으로 보내지게 되어있었다.


휴전을 결사 반대하는 이박사를 유엔사에서는 클라크 대장 지휘하에 그를 체포, 감금하고 계엄령을 내리고, 군정을 실시할 게획까지 세워 두었다 (Ever-Ready Plan).  미국에서는 이때 이승만의 대체 인물로 백선엽을 선정하여 그를 미국으로 보내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상견례까지 하였다.  (가증스런 친일파 백선엽!!!) ( 2)

이승만의 만용으로 엄청난 국군 인명 피해 입었음

(미 8군 통계: 미군 전사에서 옮김)



그런데, 이번에 박사에게 교훈 (Lesson) 쪽은 미국이 아니라 중공군이었다. 박사가 집권하고 있는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이참에 혼을  단단히 내줘야 한다고 믿은 중공측은 반공 포로로 석방한 군인수 (27,000 )만큼의 한국군을 죽여야 한다고 그들의 최후의 결전 지역으로 중부 전선의 금성돌출부 (Kumsong Salient) 선정하고 7 11 저녁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금성 돌출부는 금성천 북쪽으로 한국군 점령지가 불쑥 쏫아 있기 때문에 삼각형의 양측 아랫 부분을 공격하면 쉽게 포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공 포로 석방 이후에 중공군의 공세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이박사나, 한국군 지휘부가 전략적 개념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기껒해야 연대장급 밖에 된지 않는 백선엽, 정일권 무리가 어찌 중공의 원대한(?) 작전을 미리 짐작이라도 했을 있을까?


가장 실수 중의 하나가, 적의 공세를 짐작도 못했기 때문에, 7-13 공세가 벌어지기 직전에 사단장 교체를 단행한 것이다. 당시 사단장을 위시한 고위 장성과 영관급을 교대로 미군의 각종 병과 학교에 파견하는데,  마침 무렵에 미국에서 돌아온장성/영관급 장교들을 새로운 보직을 주고 그대신 다른 장성/장교들을 미국에교육을 보내야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공군의 공격이 개시되자 새로 보직을 받은 사단장들이 자기 사단 내부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지휘에 어려움을 격고 엄청난 피해를 입어서 미군측의 건의에 따라 전임 사단장을 다시 불러들여서 지휘하게하여서 사단에 사단장이 둘씩있는 촌극이 벌어졌다.


전투에서 중공군은 전쟁 발발이후 가장 많은 수의 포탄을 날렸고, 유엔군 통계에도 국군 3만여가 전사하였다. (중공측 주장 6 2천명)


한마디로 말해서,  이승만의 유능한 외교가 아니라 만용으로 우리의 국군에 전쟁이후 최대의 인명 피해를 입었고, 당시에 붇잡힌 대부분의 국군 포로들이 돌아 오지 못했다고한다.


휴전을 반대한 이승만을 고갑게 여긴 유엔군은 한국이 고역을 치루는데  별로 지원하지 고  북진"한다고 했으니 한번 당해보라는 자세였든것 같다.


전투를 두고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은 중공군이 한국군을 코피가 터지게 강타한 것은 북진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 박사에게) 교훈을 주려고 것으로보인다.”라는 촌평을 내놓았다.


한편,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으로 휴전 협정 체결이 5주간 지연되었는데, 그동안 매주 1천여명의 미군 전사상자가 생겼다고 이박사를 원망했다고 한다.


아이크는 이박사를 죽이지는 않았고, 1959 10월에 특사 (월터 져드) 보내 하야를 종용하였고 그냥 웃어 넘기자 4-19 이후에 그의 심중을 헤아리는 마샬 그린이 이박사를 권좌에서 물러나게하고 다시 그가 권토중래를 꾀하자 CIA 기에 태워 하와이로 납치해갔다. ( 3)


 이박사는 이때 이미 노망이 들어서 자신이 납치된 사실도 몰랐고, 한달 뒤에 돌아가려했으나, 귀국이 거부됐을 비로소, 알아차린 듯하다.


맥아더의 힘으로 대한민국의 정상에 올랐으나, 북진한답시고 그를 괴롭힌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이상 놓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이박사) 나이가 많아서 고딘 디엠 같은 변을 당하지 않은 것만해도 다행이라 하겠다.

 

필자

1: 한국은 트루먼-애틀리 선언 체제 속에 살지만 뭔지도 모른

        http://blog.koreadaily.com/teddykim/1041981

2: 백선엽은 친일 부역자를 넘어 이승만 자리를 넘본 반역

        http://blog.koreadaily.com/teddykim/1083144

3: 이박사는 내가 하와이로 축출했다 그린

        http://blog.koreadaily.com/teddykim/1059910

 

과거를 되돌아보면 미래를   있다 (관왕지래觀往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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