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ddykim
Ike Is Best(teddykim)
California 블로거

Blog Open 06.30.2017

전체     26919
오늘방문     135
오늘댓글     2
오늘 스크랩     0
친구     3 명
  달력
 
진주 만으로 가는 길 과거가 미래의 선생이될 수 있다
12/07/2017 13:26
조회  205   |  추천   3   |  스크랩   0
IP 108.xx.xx.181

진주만의 미 해군 함정을 기습 공격하는 일본 함재기들



진주 만으로 가는


당시 미일 관계 보면서 북미 관계 전망


과거가 미래의 선생이될 있다


미국은 중국이 고와서가 아니라 강력한 일본 앞에 


무력해서 도울 밖에 없었다


오늘이 진주만 기습 76 주년 기념일


역사를 보면 틀림 없이 일어날 전쟁을 피한 경우도 많고, 생각지도 않았지만 엉뚱한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지금부터 76년전 일본이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로 태평양 상에 있든당시 미국의 식민 영토 (Territory)였든 하와이 제도의 오하우 섬에 있는 태평양 함대 모항인 진주만 (Pearl Harbor) 정박중인 함정과 주변 비행장에 있든 비행기를 격파하는 기습 공격으로 일반 미국민 으로서는 그렇게 피하고 싶었든 세계 대전에 말려들게 되었다.


무엽 유럽에서는나치 독일이 서구를 휩쓸어 프랑스의 항복까지 받고 영국 침공에 앞서 공습을 감행하다 호라호락 넘어가지 않자 불가침 조약까지 맺은 있는 소련을 침공하여 질풍노도와 같이 모스코바 주변까지 쳐들어 가든 중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국과 일본 관계가 악화해져서 일본이 미국을 기습 공격하게 되었는지 배경을 살펴보자.   독자 여러분들은 글을 읽어시면서 동맹관계는 영원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 변화에 따라 어제의 동맹이 적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적이거나, 관심 밖의  나라가 촉망 받는 동맹국이 되기도한다. 그렇게 결정하는 기준은 당시의 국가 이익이 무엇이냐에 달렸다.


일본은 아시아 대륙에서 떨어져 태평양을 면하고 있어서 우리나라보다 훨씬 먼저 서양인/국가와 접촉을 하게되어 서양화가 빨랐고, 서양인들이 타지에서 하든 (식민 지배) 배워 가까운 곳에서부터 활용하여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성공하는데, 이를 위해 청일 전쟁과 노일 전쟁을 치뤘고, 영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어서 뒷힘이 되어 주었다.


일본은 노일 전쟁 승리로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든 다음에 (1905) 바로 미국의 승인을 받았다. 마침 미국의 전쟁상 (지금의 국방 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카츠라가 교섭을 통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도 일본이 조선을 지배 (식민지화) 하는것을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기로 합의하여 비밀에 붙이기로 하였고, 이를 태프트-카츠라 밀약이라 부른다.


우리가 없으면 죽고 못사는 것처럼 신주 모시듯하는 미국도 당시에 그렇게 하는 것이 국익에 유익하다고 판단하여 조선을 헌신짝처럼 일본에 던져줬다밀약이 체결되고부터 20여년 뒤에 학자의 연구 과정에서 우연히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사실을 알게된  이승만 박사가 수차례에 걸쳐서 미국 정부를 비난하였다.


1910 드디어 조선을 병탄한 일본은 1 세계 대전 연합국측에 가담한 보상으로 태평양상에 있든 독일령 여러 섬들을 위임통치령으로 차지하게 되었다그래서,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본과 가까이 마주하는 미래의 적대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무렵 영일 동맹이 해체 되었다. 일본은 조선을 삼키고 그기서 만족하지않고, 압록강 건너 만주 땅에 청조 마지막 황제 (부의) 데려다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1931) 때까지 세계 열강이 이를 말로만 비난했지 막지 못하는 것을 보고 간이 부어오른 키작은 무리들이 중국 본토를 넘나보게되어 베이징 부근에 있는 노구교 (영어로는 Marco Polo Bridge) 에서 중국군과 충돌하는 사건을 일으켜 중국과 전면 전쟁에 돌입해 이를 2 중일 전쟁 (vs 청일 전쟁) 일어났다. (1937.7.7)


20세기 초에는 일본을 후원하든 미국이 , 일본이 아시아에서 힘을 길러 약한 이웃을 마구 삼키려하자 이를 그냥 보고만 있을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는 중국을 그대로 두면 조만간 무너질 것으로 우려하여 원조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중국이 일제침략을 방위하기 위해 미국 무기를 구입하는데 필요한 차관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또한 일본은 미국과 맺은 통상조약을폐기시켰다.  (40.1)


무렵 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이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약한 이웃을 삼키는 같이 오스트리아, 체코 등을 협박해서 삼키고 있는 상황을 보고, 초록은 동색이라고, 의기 투합하여, 독일, 이태리 그리고 여기 일본이 합쳐서 삼국 동맹 (Tripartite Pact) 맺어 공동의 적에 대항해 협조하기로하였다. (40.9.27) 이로 인해 미국은 추축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하게되고 중국이 일본을 막는데 도움을 동맹국으로 보게되었다.


일본은 유럽 대륙이 거의 모두 독일 군화에 밟히는 상황을 보고 자신들도 동양에서 흉내를 내고져했다. 뻔뻔스럽게도 일본은 서양 사람들의 식민 지배를 받는 동양인들을 그들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며 대동아 공영권 (大東亞 共榮圈: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건설하겠다고 나서서  (40.8) 동남아로 향한 침략의사를 만천하에 노골적으로 표명했다.


그리고, 1941 들어 일본이 취한 중대한 외교적 조취는 소련-일본 중립조약 체결로 상호 불가침을 약속할 뿐만아니라, 나라가  3국과 전쟁 관계에 들어가도 다른 나라는 중립을지킨다는 양국간조약으로 (41.4.13) 5년간 유효하며, 나라가 일년 전에 통보하지 않으면 5년간 자동 연장하도록하였고, 조약은 소련이1946 8 8 일본에 선전포고 때까지 양국에 많은 도움을 주게되었다.


일본이 북방 진출을 포기하고 남방 진출하게된 계기는 두차례에 걸친 대소 충돌에서 (-- 국경의 장고봉 사건 (38) 몽고-만주 경계의 노몬한 사건 (39)) 통해 소련의 기계화 부대에 처절한 참패를 당해서, 일본 침략의 선봉인 관동군이 소련군이라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전쟁말경에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하자 관동군은 거의 싸우지도 않고 일주일 동안에 물경 65만명이 항복하여 소군의 포로가 되었다. 일군이 소군에 떡이된 전력이 있어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것을 모르는 미군들은 탸평양 전쟁에서 도쯔게키 (돌격)” 죽도록 싸우다 하라키리 (할복)” 으로 목숨을 버리든 일본군이 그렇게 많이 포로가 것에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당시 진행되고 있든 중국 침략에 더하여 독일에 항복하고 나치 독일의 괴뢰국으로 전락한 프랑스 (비시 정부) 압박하여 일본군이 당시 불란서 식민지였든 인도지나 (월남 + 캄보디아 + 라오스) 진주하게 허용하였다.


일본의 침략을 이상 방관할 없다고 판단한 미국의 로즈벨트 행정부는 일본에 대해 중국과 인도지나에서 철군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미국이 중국에 대한 군원을 중단하면 철군하겠다고 응대했다. 이에 미국은 일본이 침략을 중단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여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 수위를 높이기로 하여 대일 석유, 고철등 군수품 생산에 중요한 품목의 금수 조치를 실시했다. (41.3) 이에 더하여 미국은 자국 은행에 예치된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버마의 산허리 (Burma Road) 넘어 중국에 군원을 지속했다.  (: 석유 금수, 재산 동결, 적국에 군원은 사실상 전쟁 일보 전까지 나아간 상황으로 사실상 미국은 일본의 공격을 초대/기대한 셈이다.)


금수 조치가 시행되자 일본 해군은 당시 석유 재고로는 일본 함대를 6개월 동안만 운용할 분량이라고 내각에 통보했다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취할 있는 방안은 가지 밖에 없었다. 첫째는 미국의 요구 (중국과 인도 지나에서 철군) 수용하여 전쟁을 피하느냐와 둘째는미국과 전쟁을 불사하고 남방 (당시 네더랜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가 석유와 고무등 일본이 필요한 자원이 풍부했음) 으로 진출하고 가능하면 영국의 시민지인 인도까지 진출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1 수용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수년간 공들여 와서 얻은 전리품을 한발  쏘지 못하고 미국의 요구에 사실상 항복하는 셈이어서 그당시 주도 세력인 군부 강경파에게는 받아들일 없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해오든 길을 계속해나갈 밖에 없고 남방 진출의 걸림돌은 미국, 특히 미국 해군력이었다.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일본 정부는 양동작전을 펴서 미국에 특사를 보내 교섭을 통해 양국간의 이견을 조정하려하면서도  미국의 태평양 함대의 본거지인 진주만 (Pearl Harbor) 공격 계획에 착수하고 일을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 山本 五十六) 맡았다. 그는 끝까지 대미 전쟁을 반대했으나 일본 왕이 승인을 하자 마지 못해 최선을 다했는데, 승기 (勝氣) 기껏해야 6 개월 내지 길어야 일년 밖에 못간다고 내다 봤다.


한편 일본 해군부는 해사 출신 (졸업 당시 전교 수석) 으로 질병으로 수술을 받아 전역한 다케오 요시가와를 다다시 모리무라 라는 가명으로 호놀루루 부영사로 파견하여 (41.3.27 부임) 진주만에 출입/정박하는 미해군 함정과 주변 비행장의 항공기 위치등을 주기적으로 보고를 올리게했다 ( 1)


그해 (1941) 시월에 들어 육군상 도조 히데키 (東條 英機) 수상이되어 (41.10.18) 전쟁은 불가피하게되었다고 보여서 미국측은 일본이 침공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 (Where?) 언제 (When?) 침공할지가 최대 의문점이었다.



진주만이 있는 오아후 섬의 미군 기지들을 두번에 걸쳐 기습 폭격하는 함재기 공격도 


국무부와 교섭하는 일본 특사단은 성의있는 교섭이 목적이 아니라 시간 끌기용이었기 때문에 양측의 거리를 좁힐 없었어서 야마모토가 거느리는 연합함대는 11 26 일본 혼슈 북부에서 출항하여 하와이 군도의 오아후섬을 향해 항진하여 200 마일 인근에서 12 7 새벽 (현지 시간) 항공모함에서 차례에 걸쳐 함재기 비행단을 출격하여 진주만에 정박중이든 해군 함정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인근의 비행장 있든 항공기들도큰 타격을 입었으며, 2,335 명이 사망하고 1,143명이 부상당했다. ( 2)


기습에 놀란 미국은 다음날 (12 8 월요일) 로즈벨트 대통령이 의회에 대일 선전 포고 동의를 요청했고, 의회는 일차 대전 때도 참전을 반대한 한명의 반대외에는 전원이 동의하여 대일 전이 공식화되었다.


- 전쟁이 정식으로 시작하자 나치 독일이 -- 삼국 동맹 규정에 따라, 대미 선전 포고를 하여, 기다리고 기다리든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에게는 가뭄에 단비를 기다리든 농부들 처럼 속으로 즐거워했다. 그래서 미국이 쓰러져가는 영국을 구하고 종국적으로 나치 독일을 먼저 멸망시키고, 일본도 패전시켜 70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 영토에 미군이 진주하고 있으며, 그들의 침략의 값으로 미국에 대해 충실한 푸들 (Poodles) 느릇을 하며 지내고 있다.


일견, 야마모토의 진주만 기습이 대성공으로 비춰 있으나, 실제로는 가지 점에서 실패로 있다. 첫째, 함공모함이 한척도 피격 당하지 않았고 (모두 연습으로 진주만 밖에 있었다) 둘째 함정에 기름을 제공해 주는 저유소 (기름 탱크) 파괴되지 않아서 공습에 살아남은 함정들이 바로반격 작전할 있었다. 만일 기름 탱크가 피격을 받았다면 함정들이 모두 서부해안까지 가서 급유를  받아야 하는 불편을 겪었을 것이고 작전이 상당히 지연 되었을 것이다.


한편, 군함 위치를 탐지하여 본국에 보고한 다케오 (가명: 요시무라) 부영사는 동풍, 라는 암호를 단파로 들은 뒤에 진주만 폭격이 임박한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첩보 관련 업무 자료를 모두 파괴해 진주만 공습 후에 다른 영사관 직원들과 같이 FBI  연행되었으나 아무른 용의 점이 발견되지 않아 본토의 (다른 미국적 일본인들과 같이)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양국 외교관 교환시에 일본으로 귀환할 있었다. (42.8)


일본이 진주만 기습으로 나아가는 수순을 보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북한 다루기와 비견해보면 많은 점에서 한반도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가 들리워 보인다.

 

 

필자

1 : 호놀루루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한 다케오 요시가와 부영사 이야기를 앞으로 소개할 스파이 이야기 편으로 소개하려 합니다.


2: 해군 함정 피해 상황

전함   격침:  4               피격: 4

순양함 피격: 3

구축함 피격: 3

기타함정 격침: 2

기타함정 피격: 3


추기: 미국이 일본의 암호를 해독해서 진주만 공격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나, 유럽에서 고군 분투하는 영국을 돕기 위해 일본의 기습으로 유도했다는 설도 있다는 점을 사족으로 붙입니다.

 

오늘의 가장 중요한 뉴스와 해설 

 

 

Copyright 2017 Teddy Kim  All Rights Reserved

진주만 공격, 관동군, 도조 히데키, 로즈벨트 대통령, 요시가와 다케오 부영사
이 블로그의 인기글

진주 만으로 가는 길 과거가 미래의 선생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