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inlkim
자카란다(suinlkim)
California 블로거

Blog Open 01.17.2010

전체     382836
오늘방문     6
오늘댓글     0
오늘 스크랩     0
친구     24 명
Blog News Citizen Reporter
2011 Koreadaily Best Blog

  최근 방문 블로거 더보기
  달력
 
다시 시작하기
01/02/2012 16:43
조회  1351   |  추천   8   |  스크랩   1
IP 76.xx.xx.170

 

다시 시작하기<장영희 에세이>

 



 

 
 
 
 
 

1984년 여름 뉴욕 주의 수도 올바니에 있는 뉴욕 주립대학에서

6년째 유학 생활을 하던 나는 학위 논문을 거의 마무리 짓고

심사만 남겨 놓은 채 행복한 귀국을 꿈꾸고 있었다.

지도 교수 거버 박사가 깐깐하고 정확한 분인데다가 논문 주제가

'물리적 세계와 개념의 세계 사이의 자아 여행'으로 너무나 추상적이라

나는 2년 간 그야말로 각고의 노력 끝에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심사를 얼마 안 남기고 당시 LA에 살던 언니가 아프다는 소식이 왔다.

나는 어차피 곧 떠날 것이므로 차제에 기숙사 방을 비우고 LA로 가기로 했다.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 그 동안 책상 위에 높이 쌓였던 논문 초고들을

과감하게 다 버리고(당시만 해도 워드프로세서가 시작 단계였고

기계치인 나는 모든 작업을 전동 타자기로 해결했다),

내 전 재산 - 옷 몇 벌, 책 몇 십권, 그리고 논문 최종본-

모조리 트렁크 하나에 집어넣었다.

LA에서 마지막 원고 수정을 한 후 심사 날짜에 맞춰 돌아올 셈이었다

 

그러나 내가 LA에 도착하자마자

언니는 한국에 가서 쉬었다 오기로 결정, 서울로 떠났고

같은 날 나는 다시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케네디 공항에서 마중 나와 준 친구는

내가 올바니로 가기 전에 차 한 잔 하자고

그린위치 빌리지에 있는 자기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 친구 집에 들어가서 10분 쯤 후, 막 커피를 마시려는데

친구 딸이 들어와, 도둑이 차 트렁크를 열고 짐을 훔쳐 달아났다고 전했다.

내 논문, 내 논문..... 나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어떻게 올바니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다.

친구가 함께 와준다는 것을 뿌리치고 깜깜한 밤에 기차를 타고

어찌어찌 기숙사로 돌아와서 방문을 잠갔다.

전화도 받지 않고,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꼬박 사흘 밤낮을 지냈다.

 

두꺼운 비닐 커튼은 내가 닫고 간 그대로였고,

8월 중순이었으니 무척이나 더웠을 텐데

더위도, 배고픔도 느낄 기력도 없이 그냥 넋이 나간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목발을 짚고 눈비를 맞으며 힘겹게 도서관에 다니던 일,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꼼짝 않고 책 읽으며

지새웠던 밤들이 너무나 허무해 죽고 싶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외롭고 힘들어도 논문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만 희망으로 삼고 살아왔는데,

이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셈이었다.

 



 

 
 
 
 

닷새째쯤 되는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커튼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스며들어 어두침침한 벽에 가느다란 선을 긋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호기심이 일었다.

 

잃어버린 논문과는 상관없이 사람이 닷새를 먹지 않고 누워 있으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지금의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어지러움을 참고 일어나 침대 발치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에 창백한 유령 같은 모습이 나타났다.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내 속 깊숙이에서 어떤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을 느꼈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기껏해야 논문인데 뭐, 그래, 살아 있잖아...논문 따위쯤이야.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본능적 자기 방어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절체절명의 막다른 골목에 선 필사적 몸부림이 아니었다.

조용하고 평화롭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일어서는 순명의 느낌,

아니, 예고 없는 순간에 절망이 왔듯이 어느새 예고 없이 찾아와서

다시 속삭여주는 희망의 목소리였다.

 

나는 이제 지구상에 내게 남은 단 한 가지 소유물인 내 손가방을 뒤져보았다.

껌 두 개, 조카에게 주려고 LA 공항에서 샀던 레이커스 농구팀 티셔츠,

수표책, 20달러짜리 한 장이 전부였다.

나는 우선 샤워를 하고 레이커스 티셔츠로 갈아입고

캠퍼스 스낵바에 가서 닭튀김을 한 열 조각쯤, 거의 토할 지경까지 먹었다.

 

그리고 나서 거버 박사를 찾아갔다.거버 박사는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아주셨다.

"오늘쯤 올 줄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웨스트부룩 박사와 함께 점심 먹으며

너는 그대로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라고, 곧 올 거라고 얘기했었지.

이제 경험이 많으니까 더 좋은 논문을 쓸 수 있을거야."

거버 박사는 올버니로 오는 기차에서 울다가 잃어버린

콘택트렌즈를 새로 사라고 100달러를 주셨다.

 

거버 박사의 주선으로 과에서는 다시 내게 강사 자리를 주었고,

도서관에서는 잃어버린 몇 십 권의 책 반납을 면제해주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 나는 다시 논문을 끝냈다.

 

 



 

 
 
 
 
 

15년이 흐른 지금 생각해도 다시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힘든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 경험을 통해서 나는 절망과 희망은 늘 가까이에 있다는 것,

넘어가서 주저앉기보다는

차라리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끝낸 내 논문에서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부분은 맨 첫 페이지이다.

거기에 나는 '내게 생명을 주신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께 이 논문을 바칩니다.

그리고 내 논문 원고를 훔쳐가서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적었다.

 

누군가 좌절을 안고 다시 시작하면서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둑에게 헌정한 내 논문을 보여주면서

 

"인생이 짧다지만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1년은 충분히 투자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장영희 에세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Memory of love - Yuhki Kuramoto

 

 

 

 

 

 

다시 시작하기.장영희
이 블로그의 인기글

다시 시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