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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의 두 길, 박재삼 이형기의 시
12/08/201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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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의 두 길, 전통의 계승과 도전

-박재삼 이형기 시 다시 읽기  

[한미 문단] 2019 겨울호/ 평론 초대석  /  기청(시인 문예비평가)


 
                

               


    박재삼 시인                                                              이형기 시인

             

시 읽기를 통해서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는가?   우리는 고난의 바다(苦海)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잘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아닌 듯하다

나고 병들어 죽는 일이 그렇고, 그리운 사람과 헤어지고 미운사람과 만나는 일이 그렇다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땅과 물 불 바람으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육신이니 그자체로도 괴로움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중에서도 시인은 더 괴로움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산다  윤동주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이나 ’별 헤는 밤‘에도 심지어 시가 ’쉽게 씌어지는‘ 그런 작고 사소한 것에도 아파하고 괴로워 한다   하지만 시인은 현실을 뒤집어 ’낯설게 만드는‘ 그런 특권을 가진 덕분에 괴롭지만은 않은가 보다 

 고난 속에서도 가끔은 ‘먹지 않아도 배부른 황금빛 종소리’나 ‘바람의 장미꽃’같은 시(이형기 시 ‘이름 한번 불러보자 박재삼’에서) 한편을 건지면 행복해진다 현실은 아프지만 시는 즐거운 것이다.


관점에 따라 해석도 달라진다

시를 보는(해석하는) 시각은 다양하다  따라서 어떤 관점에서 시를 해석할 것인가는 감상의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크게는 ‘작품 그 자체’로서 바라볼 것인가?(내재적 관점), 시를 둘러싼 ‘외적요소’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인가?(외재적 관점)로 구분 된다  전자는 구조주의 혹은 절대주의 관점으로 이는 미국의 뉴 크리티시즘(new criticism, 신비평)과 맥락이 닿아있다  시 해석(감상)의 중심적 바탕이 되는 것이다.


외적요소를 보면  크게 작가, 현실, 독자의 세 가지 측면에 관심을 가진다  시를 작가중심으로 보는 ‘표현론적 관점‘은 작가의 체험 감정 사상 등 전기적 요소와 관련되는 것이다,   작품을 현실세계의 반영이라 보는 ‘반영론적 관점‘은 현실과 작중현실을 비교 검토하여 사회적 요인이 작품형성에 미친 영향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효용론적 관점‘은 독자로 하여금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는 성질이나 요소가 무엇인가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전기적 요소나 시대현실을 무리하게 적용할 때 오히려 작품 자체의 

성과를 평가절하 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리얼리즘 옹호론자들이 자신들의 이념과 결부시켜 무리하게 해석하려는 경향은 성급한 아전인수(我田引水)에 다름 아니다.

    

시를 해석(감상)하는 중심관점은 시 그 자체의 문학성 언어 예술적 성취의 정도를 따져보는 것이다  외부적 요소는 온전한 해석에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적용하되 종합적인 관점이 중요하다  물론 일반 독자와 전문독자(비평가 학자)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 독자라 해도 시 해석의 관점을 이해한다면 보다 품격 있는 ‘행복한 시 읽기’가 될 것이다. 

    

이번에는 우리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두 시인의 작품을 비교 감상해보기로 한다  작품 자체의 내재적 접근과 작품외의 시대적 배경 전기적 요소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감동은 어디서 오는가?’란 물음의 본질을 캐기로 한다

50년대에 나란히 등단하여 생의 대부분을 우리 현대시문학의 중심을 관통하는 주류로서의 업적을 남긴 두 시인 박재삼 이형기 시인을, 그의 시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박재삼 이형기 시인의 삶과 문학

먼저 두 시인의 문단활동 이력과 시대배경을 잠시 더듬어 보자  박재삼 이형기의 첫 만남은 진주 개천예술제(제1회) 백일장에 이형기 장원, 박재삼 차상으로 뽑히면서 시작된다 

두 시인 모두 초기에는 전통적 서정주의에 동승했다  같은 미당의 추천을 받은 ‘이란성 쌍생아’에 비견되어 문단의 화제가 되었다   서로 문학적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나중에는 이형기의 외도로(다양한 실험과 모더니즘 경향으로 기울면서) 또 다른 길을 택하게 된다  그것은 두 시인이 마주한 세계와의 적응방식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이형기 시인의 경우, 세상과의 치열한 부딪침 쪽이라면 박재삼 시인은 마치 바둑을 관전하듯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는 그런 달관의 삶이었다

이형기는 언론인 대학교수라는 공적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정신은 언제나 자유로운 보헤미안이니 현실과 부딪치면서 좌절과 한계를 경험했을 것이다

박재삼은 상대적으로 느긋했다  잡지 편집일이나 바둑 관전기를 쓰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지만 물질의 결핍이야말로 정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무소유의 역설‘이 몸에 벤, 오직 시 쓰는 일을 천직으로 여겨온 백면서생의 처사였다.   

       

두 시인이 문단에 뿌리 내리던 50-60년대 시대배경을 떠올려보자  50년대 남북 민족전쟁의 비극은 정신적 피폐, 극도의 궁핍으로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말 그대로 텅 빈 폐허였다  60년대로 넘어가면서 한국의 시문학은 모더니즘 경향과 현실참여의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 결과 순수와 참여라는 양극단의 가치가 화두로 떠오르고 일군은 문명 비판적 경향과 부조리 시가 등장한다  이 시기에 마치 ‘낙원의 섬‘처럼 떠오른 것이 전통적 서정의 불길이다.


초기 두 시인의 주요작품 한편을 감상해보자  ‘대표작’이란 말을 쓰지 않는 것은 그 말의 위험성 때문이다  말은 이미지로 고착화시키는 위력을 지닌다  누구의 대표작 하면 그의 다른 작품은 묻혀버린다  끊임없이 새로움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시인에게 엄밀히 말하면 대표작은 없다  또 타인(비평가나 독자)이 말하는 대표작과 시인 자신이 뽑은 것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울음이 타는 가을 강-박재삼       

 

박재삼 시인은 한국적 전통서정의 맥을 잇는 주요 서정시인 중 한명이다  박재삼은 한국인다운 감성을 한국어의 토착적 묘미를 살려 언어 예술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한 업적을 인정받고 있다     

그의 초기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고향에 가면서 떠올리는 친구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삶의 무상(無常)을 노래한 것이다. 

 

우선 제목에서 시의 주제가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가을 강을 ‘울음이 타는’이라 하여 청각의 시각화라는 공감각 심상을 통해 화자의 감정(슬픔)을 이입시킨다  화자의 안타까운 심정은 순진무구의 구어체 ‘저것 봐 저것 봐’에서 극적 전환을 가져온다  전반부 개인적 경험을 통해 인생무상의 허무를 일반화시키는 것이다.


한미문단 2019 겨울호 평론 초대석


포장은 서정 내용물은 무상(無常)

그것은 처음 ‘첫사랑’(산골 물소리-청년)->사랑 끝(울음-중년)->소리 죽은(가을 강-노년)처럼 ‘소리’라는 청각심상의 변주를 통해 삶의 과정을 은유한 것은 특이한 구조다  마지막 바다에 다와 가서는(죽음을 앞둔) 소리마저 무화시키는 경건함은 숙연하게 한다

전체적으로 물(강 눈물 바다)과 불(타는 불빛 가을 햇볕)의 이미지가 어울려 주제(삶의 무상에 대한 깨달음)를 구현하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박재삼 시의 포장은 서정이지만 내용물은 무상이다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근원의 슬픔인 것이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낙화-이형기

 

 이형기 시인은 초기에 전통서정으로 출발했다  자연을 통해 자아와 존재의 궁극을 추구하는 서정의 계보에 동승했다  그러다가 70년대 이후 다양한 실험을 통해 모더니즘 경향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모험적 도발적 양상으로까지 변모한다  모방 상투성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위한 시적 방법론을 모색하며 스스로를 혹독하게 채찍질 한다  시와 시론 평론을 병행하며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아 문학적 만행(萬行)을 이어갔다.


시 ‘낙화‘는 초기의 낭만주의 색채가 풍기는 서정시다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처럼 감각적 묘사가 아직 덜 익은 풋과일처럼 풋내를 풍기기도 한다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어찌 보면 그에게 가장 덜 어울리는 작품일 수 있다  그의 현실을 초극하는 방법론으로서의 치열한 실존의식에 비하면 가볍고 덜 ’성숙한‘ 것인지 모른다.


무욕과 놓아버림의 미학

첫 연에서 자연의 이치에 순명의 태도를 보인다  낙화를 통해 결별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일깨운다  어떤 구차한 변명과 미련을 남기지 않는 것은 불교의 ‘놓아버림’처럼 집착을 싹둑 끊어버리는 무욕(無慾)의 정신과 닿아있다  삶의 괴로움은 집착에서 비롯되고 그걸 놓아버림으로서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는 한국시사에서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 미학’을 구축한 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형기 시인은 박재삼 시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허탈한 심정을 시로 써서 남겼다


너와 나는 많이 다르게 살았다 

너는 처음부터 

전통의 결 고운 슬픔을 가다듬어 

비딘을 짰자만 

나는 비틀비틀 갈지자 걸음 

마냥 어지럽고 위태위태하다 

(중략)

평생 시만 써온 너의 그 계산법은 

나도 시를 쓰지만 모르겠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던 시 

그것이 이제는 

먹지 않아도 배부른 황금빛 종소리 

또는 바람의 장미꽃이 되어 

너의 무덤 위에 찬란하고나 

이름 한번 불러보자 

아아 박재삼!

 -이름 한번 불러보자 박재삼 (이형기)


거의 절규와도 같은 그의 시에서 솔직한 고백이 터져나온다  서로 동일 선에서 출발했지만 ‘많이 다르게’ 살았음을 시인 한다  눈치 안보고 전통서정이란 외길을 고집해온 박재삼을 넌지시 부러워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갈지자 걸음’을, ‘위태하고 어지러운’ 행보를 후회하기도 한다  “평생 시만 써온 너의 그 계산법은/ 나도 시를 쓰지만 모르겠다“처럼 융통성 없는 우직함의 안타까움도 내비친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던 시/ 그것이 이제는/ 먹지 않아도 배부른 황금빛 종소리”에 와서는 박재삼 시의 완성을 기뻐하는 진정한 우정, 그 큰 울림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박재삼 시인은 현실 초극의 방법으로 전통서정을 택햇다  그것은 때묻지 않은 순수서정이야말로 본성에 회귀하는 가장 지름길이라 여긴 때문일까?

본성은 처음부터 선하고 순하고 청정한 것, 우주의 근원에 연결된 마음이다


이에 비해 이형기 시인은 치열한 실존의식으로 현실에 맞서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현실 초극의 방법인 것이다  중기의 시 <폭포>에서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국을 아는가”처럼‘ 위태로운 수직의 이미지나, 후기 시 <절벽>에서 “아무도 가까이 오지마라/ 높게/ 날카롭게/ 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것”에서 동일하게 드러나는 수직의 이미지 허무의식은 그것으로 좌절이나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가열한 실존은 서릿발처럼 냉철한 것이다.


그리움 너머, 천진한 신의 낙원

박재삼은 달랐다  현실과 맞서기보다 내면의 근원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항상 그를 따라다니던 가난 슬픔 눈물은 과거지향의 추억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시들도 있다  현실을 넘어선 내세관(來世觀)과 그의 낙원의식을 엿볼수 있는 작품도 있다  지금까지 박재삼 시를 ‘과거지향의 전통서정’으로 이해한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문명에 길든 것은

모두 날카로운

직선을 이루고 있건만,

거기에 때가 묻지 않은 것은

가령 눈 덮인 경치와 같이

얼마나 순박한 곡선을 긋고 있는가.


저 눈을 쓴

자태 속으로 들어가면

그 밑바닥에는 시방

녹은 물이 자기네들끼리 모여

고향의 예닐곱 살 적의,


세상이 즐겁고 기쁘기만 한

노래를 하기에만 골똘한

시냇물 소리를 내느니

그 근처에 신(神)은 늘

높이 좌정(坐定)하기는커녕

공일날처럼 가만히 놀면서

아, 낮게 임하누나.

-신(神)은 낮게 곡선을 그리며(박재삼)


드물게 문명 비판적 시각의 작품이다  ‘문명’->직선 ‘눈 덮힌 경치‘->곡선으로 그 차이를 극명하고도 간결하게 대비 시킨다  문명은 직선, 그것도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운 것으로 그 위험성을 지적한다  그에 비해 자연은 완곡하고 순박한 곡선으로, 모성과도 같은 푸근함으로 위로와 안정을 준다  눈 속 ‘그 밑바닥’은 내면의 절대순수 공간이다  거기에는 오직 ‘노래에만 골똘한’ 시냇물 소리와 ‘천진한 신(神)’이 노니는 낙원이다  신은 ‘좌정‘을 한 근엄한 존재가 아닌 ’낮게 임하는‘ 친근한 동무 같은 존재다  어쩌면 현실의 고난을 초극하는, 그가 꿈꾸는 세계 그만의 낙원일지 모른다. 

          

또 다른 시 <부활의 생각>에서 “땅 밑에 묻혀/ 스미는 물로 변하여/ 그 이파리들을 타고/ 눈부시게 올라오기는 하리라/ 아, 이것이 부활이 아니고 무엇인가”에서 생명의 순환을, <복지를 위하여>에서 “물이 다 모여서는/ 드디어 바다에 이르지만/ 거기에서는 흘러오고 거쳐 온 땅의 일을 못 잊는 것이겠지”에서 그의 순환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박재삼 시의 전통서정 계승은 한국 현대시의 맥을 잇는 크고 도도한 산맥을 이룬다. 이에 비해 이형기 시의 도전은 굵고 박진감 있는 생명력, 그 변화와 다양성의 심곡(深谷)을 의미한다.

이 둘의 조합이야말로  한국 현대시의 유장(悠長)한 강믈의 큰 흐름으로 작용할 것이다. 박재삼 이형기 시의 감동과 울림은 바로 그 가능성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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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90년대 초 어느 겨울, 충무로 작은 주점에서 박재삼 이형기 두 선배시인을 만났다

소박하고 인간적인, 정겨운 목소리가 귀에 쟁쟁한데, 이제 지상에서는 만나 볼 수가 없다.

어디에 계시던지 평화와 자유의 안락을 누리시길, 두 분의 빛나는 문학적 성과에 누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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