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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 로트레크의 빨간 풍차
05/24/2020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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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 그림>--------------------

 

       빨간 풍차는 돌고 돌고

           -로트레크의 그림

 

                      장소현 (미술평론가, 시인)


<물랭루즈에서> 1892, 캔버스에 유채

 

나의 오랜 벗 난쟁이 귀족 화가 로트레크가 휘갈기듯 재빠르게 토해낸 그림들 사이를 숨죽이고 

어슬렁거리는 동안 나도 모르게 깨달았네.

그림은 구원이다.”

그림 덕에 그 이는 살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꽤 오래 전부터 나는 그 이를 친구나 형님으로 가깝게 모셔왔다. 그 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제법 이해한다고 믿었다. 언젠가 빨간 풍차 도는 술집에서 좋은 술 한 잔 나누며

정신없이 엉망으로 취해 비틀비틀 서로 부축하며 어깨동무하고 뒤뚱뒤뚱 빨간 풍차처럼 눈물 나는 

신파조 노래라도 고래고래 부르며 그 이가 잘 가는 여자집에라도 함께 가고 싶었다. 정말이다.


로트레크가 그린 반 고흐, 1887, 판지에 파스텔


그 이가 그린 소박한 고흐 초상화 보면서

비로소 알았네, 그 깊고 따스한 눈길, 가까스로 알았네

그림은 사랑이라는 걸...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형님.

쉬엄쉬엄 가야 꿈꾸는 대로

멀리까지 갈 수 있어요.

부디 자중자애하세요, 형님!

 

경쾌하게 재빨리 그어댄 선마다

짙게 배어난 외로움

어딘지 수상쩍고 흥청망청 질퍽한 곳

으슥해서 아늑한 곳 찾아서

꽃처럼 키운 외로움.

돌아서서 남몰래 닦는 눈물



춤추는 사람들 튼튼하고 날렵한 다리 그리며

무도장에서 경마장에서 서커스장에서

건강한 다리들 요란한 움직임

그 속도를 재빨리 그리면서

움직이는 것 그리는 일은 슬프고 외롭다고.

 

그 속도 그리다 지쳐

맥없이 퍼질러 앉아 꾸는 안타까운 꿈

당당하게 걷고 빨리 달리고 말처럼 힘차게 뛰고 껑충껑충 춤추고 넘어져도 

재빨리 일어나 다시 뛰고 그러는

 

그 외로운 꿈의 힘으로

빨간 풍차는 빙글빙글 줄기차게 돌고


로트레크가 제작한 물랭루즈(빨간 풍차)를 위한 포스터

 

-내가 만약 몸이 성했다면 그림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꺼야!

-알아요, 그 마음 잘 알아요, 형님! 그렇지만, 형님 그림은 무심한 듯 간절해서 좋은 거예요

그러니 행여 함부로 다루진 마세요, 형님!

 

빨간 풍차 하염없이 돌고 돌고

세월은 덧없이 흐르는데

내 오랜 친구 또는 형님이 사랑한, 남몰래 사랑한

여인은 몇 명이나 될까,

말도 못 꺼내고 속으로만

사랑한 여자들

빨간 풍차 빙글빙글 돌고, 석탄백탄 타는데


-그렇게 자학하지 말아요, 형님. 그림을 썩 잘 그리시잖아요, 형님은! 그거면 됐어요

충분해요

자자, 우리 시원하게 한 잔 합시다, 형님!


다양한 모습으로 가장(假裝)을 즐긴 로트레크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촉촉한 눈길 따스한 손길

 

-너무 조바심치지 마세요, 제발.

타박타박 걸어야 오래오래 걸어야

끝까지 갈 수 있어요, 형님!


로트레크 16세 때 <자화상>, 1880, 판지에 유채

 

지친 몸 이끌고 어머니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내 친구 또는 형님의 짤막한 그림자 쓸쓸하게

휘청휘청 흔들릴 때마다 은총처럼 울리는 소리

 

-빨간 풍차 오늘도 돌고 있네요, 형님!

이거 저거 다 잊어버리고

한 잔 합시다요, 형님!

그래도 잊지 마세요, 그림은 구원이라는 거.


로트레크의 포스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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