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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최욱경 작가론 4
05/10/2020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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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

 

한국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조형언어

추상표현주의 화가 최욱경의 작품세계

崔郁卿, 1940-1985

 

: 장소현 (미술평론가, 시인), 사진: 최욱경 유족 제공


                           ▲<경산산>, 1981, 캔버스에 아크릴


최욱경의 작품세계는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현대미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시기를 거쳐, 이를 극복하고 결국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과정이 그렇다.

최욱경의 경우는 추상표현주의나 그 이후의 미국 현대미술과 문화적 소용돌이를 미국 현지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자기 정체성 찾기에서 혼란과 방황의 힘든 시기를 거쳐야 했고, 그런 어려움이 

귀국 후의 작품 활동에서 한국적 추상미술을 찾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의 산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자기만의 조형언어를 찾아냈다.


최욱경의 작품세계는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미공개 드로잉

 

미국 유학 시기 (1963-1971)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시작한 1963년부터 1971년까지 최욱경은 1950년대 미국 화단을 

휩쓸었던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작가인 잭슨 폴록, 윌렘 데 쿠닝 등의 작품을 접하면서, 잠재의식을 분출하듯 

온몸으로 그리는 액션페인팅에 관심을 가졌고, 자신만의 표현방식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최욱경은 한스 호프만, 마크 로스코, 프랜시스 베이컨 등 많은 작가들의 영향도 받았다.


                  ▲<무제> 1966, 캔버스에 아크릴


유학 초기의 작품들은 구체적인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붓질과 

원색의 색채가 강한 추상표현주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최욱경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만의 형체를 찾으려했다. 이러한 자세는 

그 후의 작품세계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추상화면서 구체적인 말을 거는 것이다.


내 작품은 추상표현주의 범주에 들 수 있는 작품들이지만, 미국에서 수학하며 창작하는 동안 

추상표현주의는 즉흥적이고 표현도 자유스럽지만 일말의 허무감을 안겨다 주었다

그래서 나는 추상표현주의를 염두에 두면서도 형체를 찾아내보려고 하였다.”


나의 작품들은 단순히 무엇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닌 내가 살아온 순간의 경험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다라는 말도 했다.


                  ▲<In Peace>, 1968, 종이에 잉크


문화 충격과 정체성 확립

최욱경이 유학생활을 하던 1960년대 미국은 반전, 반차별 운동이 활발했고여성이나 

유색인종, 성 소수자 같은 여러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가 소용돌이치던 큰 변화의 시기였다.

1965년 미군의 베트남전 본격 참전을 계기로 거세게 타오른 반전운동은 

1967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베트남전 반대를 당당하게 밝히면서 한층 힘을 받았다

반전 사랑과 평화, 자유, 화합과 존중을 추구하던 히피문화가 확산되었고, 비틀즈

밥 딜런존 바에즈 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문화가 사회를 휩쓸었다

1969년에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열기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죽음과 부활>, 1975, 캔버스에 아크릴


물론 미술계에도 팝아트 같은 새로운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같은 변혁의 물결은 동양에서 온 젊고 조그만 아티스트에게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을 것이다

최욱경처럼, 교육열 높고 자녀들의 개성을 존중해주는 부모님의 보호 아래 곱게 자라며 

그림만 그렸던 아티스트에게는 그림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는 계기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낯설고 큰 충격을 어떻게 받아들여 소화하고, 어떻게 작품에 반영할 것인가라는 

정체성 확립의 문제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최욱경은 이때의 정신적 고뇌를 시로 표현했다.

1972년 서른세 살의 최욱경이 한국에 와서 펴낸 시집 <낯 설은 얼굴들처럼>에 수록된 

<나의 이름은>이라는 작품이다. (그녀의 시는 캐나다의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푸른 모자의 자화상>


한 때에 나의 이름은 낯설은 얼굴들 중에서

말을 잊어버린 벙어리 아이였습니다.

타향에서 이별이 가져다주는

기약 없을 해후의 슬픔을 맛본 채

성난 짐승들의 동물원에서 무지개 꿈 쫓다가

길 잃은 아이였습니다.

 

결국은 생활이란 굴레에서

아주 조그만 채

이름마저 잃어버린

이름 없는 아이랍니다.

 

말을 잊어버린 벙어리 아이, 길 잃은 아이, 이름 없는 아이는 바로 화가 최욱경의 유학시절 

심경을 생생하게 그린 내면 풍경이자, 자화상이다.

이때의 좌절감과 문화 충격을 더 강하게 표현한 작품도 있다. <향수>라는 제목을 달아놓은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인적도 끊어진 도보엔 달빛만이 하얗고

나 홀로 여기 이렇게 유배되어

흐르는 피를 두 손을 모으고


<What time is it?>, 1972, 캔버스에 아크릴


말을 걸다, 현실에 대한 발언

이 무렵 최욱경은 정치적, 비판적인 메시지를 과감하게 드러낸 구상화도 많이 그렸다

내면의 고독을 넘어 사회와 정치에 눈을 돌려, 적극적으로 발언을 한 이 작품들은 

최욱경 작품세계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물론 이 작품들은 1960년대 미국의 학생운동과 반전 분위기 등에 심정적, 정신적으로 

동참했음을 말해준다.


<누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승자인가? Who is the Winner in This Bloody Battle>(1968)과 

<인종차별을 멈춰라. Stop Segregation>(1968) 같은 시적인 제목의 작품들은 평화, 사랑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담기 위해 거리의 그라피티나 프로파간다 포스터처럼 대담한 흑백의 대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구상화들은 최욱경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피 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승자는 누구인가?>, 

   1968, 종이에 파스텔

 

미국에서 왕성한 작가 활동 (1971-1978)

최욱경은 1971년 첫 귀국전을 열었으나, 한국 미술계의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했다

스스로도 미술계에서 환영받지 못함을 느끼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78년까지 본격적인 

작가로 활동하면서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무렵의 상황을 미술평론가 이경성 선생은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이경성 선생이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할 당시 <최욱경 회고전>을 마련했었다.


                  ▲<무제>, 1969, 종이에 아크릴

 

그가 미국에서 연구를 하고 한국에 돌아왔다가 또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고독하고 내성적인 그가 복잡하게 얽히고 있던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자기 세계에 골몰해서 주변의 관심에서 초월한 채 살고 싶은 작가에게는 한국의 풍토가 

익숙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이와 같은 방황은 1979년 귀국 후에도 계속됐다. 비록 몸은 한국에 있어도 

늘 이방인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이방인이 된 것은 물론 특수 성격과 기질에도 원인이 있지만

생의 기본이 되는 생활의 속도와 방법이 근본적으로 이 풍토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해결책을 줍니까?>, 1984, 캔버스에 아크릴


최욱경은 두 번째 미국생활을 한 1970년대부터 비로소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하게 되는데, 60년대의 자유분방한 감정분출에서 한층 걸러지고 절제된 감성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귀국 전 해에 제작한 <미처 못 끝낸 이야기>(1977)는 이전의 거칠고 격렬한 붓질에서 

벗어나 우아하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선들과 중간톤이 많이 가미된 색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교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생활환경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두 번째 미국생활에서는 대도시가 아닌 

뉴멕시코 같은 지역에 살면서 활동했다. 자연히 작품 경향도 변화를 거듭했다

조지아 오키프의 영향이 나타나는 것도 생활환경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미처 못 끝낸 이야기>, 1977, 캔버스에 아크릴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이전과 달리 원색보다는 노랑, 분홍, 보라, 파랑 등 밝은 색깔을 주로 사용했으며

형상과 색채, 구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실험이 돋보인다. 뉴멕시코의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본격적인 색채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특히 뉴멕시코에서 활동한 76년 이후의 작품들은 새, , 물고기 등 자연에서 얻은 주제와 색채에 대한 

관심이 결합돼, 율동적인 곡선으로 가득 차게 된다

한국의 단청, 민화 등의 전통적인 색감과 뉴멕시코의 자연에서 얻은 색채가 어우러지면서 

그의 작품세계는 한층 풍성해진 것이다.


                 ▲<>, 1981, 캔버스에 아크릴

 

한국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뜨다 (1978-1985)

완전 귀국한 78년 이후 85년 사망할 때까지는 우리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며 눈 뜬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나이 들어, 오랜 외국생활에서 돌아와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난 동양화에 그려진 산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산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동양화 속에 그려진 것과 같다는 것을 새삼 발견했다.”

 

내 그림 속에는 생명체들의 생명이 숨 쉬고 있다

그 생명체들이 숨 쉬는 색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색상들은 찬란한 태양광선에서 찾아보았다.

이런 작업들은 자연과의 만남에서 추려 내어진 경험들로서

아무래도 자연은 내 그림의 고향이다.”

  -최욱경의 작가노트에서


                          <무제>, 1983, 캔버스에 아크릴

 

최욱경은 한국의 산과 자연에서 자신의 추상표현주의의 완성을 본 것이다

물론 자연에서 출발하지만 그 자연의 질서를 자기 내면에서 해체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신과 감각으로 다시 구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한국적인 회화에 뜨거운 집착을 가졌던 그는 특히 대구 영남대 교수로 있을 때 보았던 

경상도 지방의 산의 능선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경산산에 경의를 표하며>(1981) 같은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최욱경 특유의 섬세하고 여성적인 감성이 잘 나타난 이 작품들은 강렬한 태양광선과 

광선에 의해 달라지는 사물의 색채를 밝은 파스텔 풍으로 표현하고 있다

안정된 수평구도를 바탕으로 한 간결하고 압축된 화면구성에 유려한 선의 흐름과 

공명(共鳴)하는 색채가 매우 시적인 감흥 자아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학동마을>, 1984, 캔버스에 아크릴


그 지역의 자연은 미국에 살던 시절 뉴멕시코에서 받았던 인상과 비슷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그는 거제도 학동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어서, 학동에다가 친구들과 돈을 모아 

집 한 채를 사둘 정도였다고 전한다. 미래의 자신의 집에 달아 놓을 <무무당(無無堂)>이라는 

이름을 지어 놓고 있었다고 한다. (<무무당>이라는 당호는 여의도 화실에도 사용했다.)


김영태 시인이 그녀를 위해 쓴 조시(弔詩)의 제목도 <무무당의 새>.


 

                     무무당의 새

 

                               김영태 시인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살면서

                              그는 자기 화실을

                              무무당(無無堂)이라 했다.

                              그림 마른 꽃 담배 냄새 테레핀유()

                              마흔 다섯 살 처녀의 냄새

                              쑥을 뜬 진한 독약(毒藥) 같은

                              정신이 벽지에 밴 방이 있다.

                              그는 양파를 대충대충 썰어

                              어설픈 저녁을 만들어 주었다.

                              그의 3백호 그림 마사 그래함은

                              춤추는 흑백(黑白) 열병 같았다

                              푸른꽃이 분홍 회색으로

                              분열 쪼개지는 혹은 겹치는

                              농담(濃淡)의 사나운 뒤척임도

                              강렬한 그의 것이었다.

                              그의 그림 속의

                              외침을…… 나는 들었다.

                              무대 위에 까망 의상을 입고

                              며칠 전 저녁 초대에 푸성귀만 한 접시

                              먹던 그를 보았다.

                              우린 피차 가깝게 살았다

                              정신의 통로 발화(發火) 지점의 거리.

                              제헌절날 조간(朝刊)에 그가

                              유명을 달리한 얼굴로 웃고 있다.

                              그는 무무당(無無堂)에서 죽었다

                              무채색 거품같이 이렇게 급히 뛰어가다니!

 

최욱경은 1940년생이므로 살아 있다면 올해 80세이다. 살아서 계속 한국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며 

그림을 그렸다면 과연 어떤 세계가 펼쳐졌을까?



화가 최욱경(1940~1985)

어려서부터 미술에 천재적 재능을 보여 김기창, 김병기, 김흥수, 장운상, 정창섭 같은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에게 교육받으며 서울예고와 서울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963년 서울대 미대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그해 미국으로 유학, 클랜브룩 미술아카데미

브루클린 미술관 미술학교, 스코히간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귀국할 때까지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프랭클린 피어스 대학, 뉴햄프셔 대학

애틀란타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78년 귀국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는 한편으로 영남대학과 덕성여대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1985년 작업실에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5.


<줄타기>, 1983, 캔버스에 아크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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