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hang
로도락(sochang)
California 블로거

Blog Open 07.08.2016

전체     104019
오늘방문     21
오늘댓글     0
오늘 스크랩     0
친구     0 명
  친구 새글
등록된 친구가 없습니다.
  달력
 
화가 최욱경 작가론 3
05/02/2020 17:42
조회  522   |  추천   3   |  스크랩   0
IP 75.xx.xx.232



----------------------------<작가론>----------------------------

 

여성 작가의 위상과 페미니즘 미술

추상표현주의 화가 최욱경

崔郁卿, 1940-1985

 

: 장소현 (미술평론가, 시인)

사진: 최욱경 유족 제공


                        <미처 못 끝낸 이야기>, 1977, 한지에 크레파스

  

대담한 선과 강렬한 색채, 격렬한 붓질로 내면의 열정을 분출한 서양화가, 미국 페미니즘 화가 

조지아 오키프를 좋아했으며, 한국적 미감에 근거한 색채추상을 실험한 여성작가, 두 권의 시집을 

펴낼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시인화가.

45년의 생애를 뜨겁게 소진한 한국 색채추상의 대표작가 최욱경.”

     -<동아일보> 기사에서


             ▲<오후 4시 학의 그림자>, 1976, 종이에 아크릴

 

화가 최욱경은 한국 추상표현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가이며, 동시에 여성 예술가들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최욱경이 독자적으로 성취한 예술 세계와 더불어 

여성예술가로서의 선구적 위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욱경은 나혜석, 박래현, 천경자, 윤석남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여성미술가의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런 선구자들의 노력과 희생 덕에 오늘날 한국 미술계의 여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미국에서의 왕성한 작가 활동과 교수 생활을 접고 1978년 영구 귀국했을 때, 한국 미술계에서 

그가 마땅하게 파고들 자리는 매우 좁았다. 그 무렵 색채 추상화는 이미 한물가고 모노크롬 

미술(단색화)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민중미술이 막 일어나기 시작할 때였기 때문에, 화려하고 

솔직한 색채 표현, 강한 화필로 만들어진 율동적인 형태와 리듬이 특징인 그의 작품이 설 자리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여성 작가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풍토였다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는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는 남성작가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세력도 절대적이었다. 최욱경은 이와 같은 뿌리 깊은 남존여비 사상에 반발했다. 미국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활동해온 터라 그런 차별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30대 중반부터 나는 여성화가들 이름 앞에 붙는 규수’, ‘여류라는 호칭에 조금씩 거부감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남성의 경우는 화가 000’이면 되고 성별의 표기가 필요 없다” 

  -<조선일보> 198372일자


나이가 들어서인지 작품이 더 여성스럽고 섬세해졌다.”는 평가에 대해 

씁쓸함을 느꼈다는 회고도 보인다.


                  ▲<인간의 숙명>, 1975

 

생각해보면, 인간들은 인류의 절반을 무시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짓을 해왔다

물론 한국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인류 전체가 그런 

무지한 짓을 계속해왔다.

물론 여성들은 이런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와 차별에 끊임없이 맞서 싸워왔다

그 결과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루었다.


참고로, 오늘날 한국의 미술계는 여성시대가 열리고 있다. 최근 들어 젊은 여성작가들이 도약하여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2019년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후보 

4명 모두가 여성 작가였고, 58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한 한국 작가들도 전원 여성이었다

서울, 부산, 대구 시립미술관을 이끄는 수장도 모두 여성이 임명돼 눈길을 끌었다

미술계 우먼파워가 경매, 화랑, 화단을 장악했다는 평가가 전혀 낯설지 않은 상황이다.


           ▲<생의 환희>, 1975, 캔버스에 아크릴

 

여성성의 진지한 탐구

최욱경은 작가의 관점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여성성을 탐구한 작가다

여자로서의 감성과 체험에서 걸러져 나온 여성의 의식에 관련된 표상들을 시각적 용어로 표현

전달하는 일에 진지하게 매달렸다. 근본적으로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예술세계, 여자이기 때문에 

느끼고 발생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유학하고, 작가활동을 하며 체류하던 1960~70년대 미국은 반전, 반차별 운동이 활발했고

여성이나 유색인종, 성 소수자 같은 여러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가 등장하던 시기였다.


    ▲<영광(Glory)>, 1960년대 추정아크릴잉크종이 콜라주


여성 고유의 성징을 소재로 하여 표현하려는 페미니즘 아트(Feminism Art)가 성행한 것도 

이 시기였다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의 유명한 글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가 

발표되어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 1971년이었고, 조지아 오키프나 주디 시카고 같은 작가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최욱경도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받았다.


                                              <방관자>, 1975


최욱경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시아인 여성으로서 차별과 해방감을 동시에 체감한다. 미국 시절 그린 

작품 중에는 인종차별에 반대하거나 자신의 성적, 인종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구상화도 보인다.


화가이면서 스스로가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29년이 걸렸다는 회고가 29세 때 제작한 

<자화상 시리즈>에 등장하기도 한다.

최욱경은 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이 자화상들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자기성찰을 담고 있다.


                              ▲<자화상>, 1969, 종이에 콘테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그에게는 여성이자 예술가라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1979년의 한 기고에서 

“(여성의 적극적 변화란) 남성과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 자신이 가진 아주 자연스러운 힘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를 

되찾은 일,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데 수줍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오늘의 고등교육을 받는 

여성들에게 있어서 오히려 하나의 의무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최욱경의 작품에는 페미니즘에 토대를 둔 인간성 자체에 대한 연구로 가득하다

스스로의 페미니즘을 어느 정도 긍정한 30대 후반에는 이를 작품에 녹이고자 했지만

외부로부터의 반응은 그를 위축시키고 괴롭혔다. 그것은 매우 힘겨운 싸움이었다.



  ▲<열리기 시작>, 1978, 종이에 색연필


최욱경의 여성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구체적인 조형언어로의 표출된 작품은 <열리기 전>(1978), 

<열리기 시작>(1978), <만개>(1981) 시리즈였다. 여러 겹으로 된 타원형이 미묘하게 변형되어 가는 

형상은 여성성을 상징하고, 마치 꽃붕오리가 터지는 과정을 그린 듯한 이중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

이런 작품들에서는 대표적 페미니즘 작가인 주디 시카고의 영향이 보인다.


       ▲<성난 여인(La femme fache)>, 1966, 캔버스에 유채

 

최욱경이 귀국한 1978년에서 사망한 1985년까지 그녀의 작품상에 나타나는 가장 큰 변화는 

'여성으로서의 자각'과 그것을 작품에 반영하는 문제였다.

최욱경은 자신이 작가인 동시에 한 여성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음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 여자로서의 감성과 체험에서 걸러져 나온, 여성의 의식에 관련된 표상을 창출시켜 

직접적으로 구사한 시각적 용어로 표현, 전달하고 싶다.”-<공간> 19822월호


최욱경이 재직하던 영남대에서 덕성여대 교수로 옮긴 것도 여자들만의 세계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학생들과 친구처럼 격의 없이 지내는 인기 교수였다고 한다.


 

               ▲<빨간꽃>, 1984, 캔버스에 아크릴


한편, 최욱경이 즐겨 그린 꽃 그림들도 여성성의 표현으로 읽힌다. 대표적인 것이

죽기 일년 전에 제작한 <빨간꽃>(1984) 같은 작품이다. 화면을 꽉 채운 한 송이의 

꽃을 살아 움직이는 강렬한 색채로 묘사한 이 작품은 색채화가 최욱경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동시에 여성 인체를 상기시키는 곡선을 사용하여 꽃을 그린 

페미니즘 화가 조지아 오키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환희> 1977, 캔버스에 아크릴


최욱경의 말년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꽃, , 산과 바다처럼 생명력 넘치는 

자연에 대한 탐구는 한국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작가적 열망이기도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여성성의 탐구이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확대되면 결국 모성(母性)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작품을 내 새끼들이라고 부르며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제자 사랑도 

그렇게 지극했다. 제자들은 그를 화가로서 교수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그림엄마.

그 그림엄마의 사랑이 한국의 산과 들 같은 자연을 품어 안은 것이다.

 

                  ▲<>, 1981, 캔버스에 아크릴


아마도 여성에 대한 자각이 그녀 안에 잠재해 있던 인간적인 번민과 고독, 상실감을 

일깨웠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팽팽한 긴장감, 생생한 감정을 담은 

리듬감, 강한 생명력으로 나타났고, 또 그것이 한 치열한 작가가 겪은 투쟁과 극복, 희열과 

좌절을 담은 연대기로 남은 것이다.


하지만 그림엄마최욱경의 모성은 끝내 완성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독신으로 작품에만 몰두하다가 4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에, 그것도 작가의 화력에 있어 눈에 띄는 

조형적 변화의 길목에서 사망한 탓에 큰 아쉬움을 남긴다.


 

화가 최욱경 (1940~1985)

어려서부터 미술에 천재적 재능을 보여 김기창, 김병기, 김흥수, 장운상, 정창섭 같은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에게 교육받으며 서울예고와 서울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963년 서울대 미대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그해 미국으로 유학, 클랜브룩 미술아카데미

브루클린 미술관 미술학교, 스코히간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귀국할 때까지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프랭클린 피어스 대학, 뉴햄프셔 대학, 애틀란타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78년 귀국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는 한편으로 영남대학과 덕성여대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1985년 작업실에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5.



가나 아트 개인전, 2013


<무제>, 1969













.....................................

이 블로그의 인기글

화가 최욱경 작가론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