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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애수의 어릿광대
07/16/2017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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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애수의 어릿광대

 

                            장소현 (극작가, 시인)


 

어릿광대는 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웃기고 있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나무 밑에서도, 앙상하게 헐벗은 나무 아래서도아무리 가슴 찢어지게 슬퍼도 광대는 웃는다. 광대는 광대일 수밖에 없으니까, 턱없이 헤프게 웃어야 광대니까· 광대는 언제나 찢어지게 웃는다, 광대는·

어릿광대 장 피엘을 처음 만난 것은 그러니까 3년 전 어느 가을날이었다. 별달리 계절의 변화가 없는 이 동네에도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 친구는 미술관으로 통하는 공원 한구석에서 열심히 광대짓을 하다가, 문득 쇠피리를 꺼내 구성지게 불고, 또 광대짓을 하고그랬다. 사람들이 보든 말든 무지하게 열심이었다. 그 진지함이라니· 웬만한 연극배우는 지레 놀라서 뺑소니 칠 수준이었다.

 

하긴, 이 친구를 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 공원에는 이런 종류의 자칭 예술가들이 흔하다. 그래서 그저 그런 친구겠거니 하고 지나치는 것이 보통이다. 기껏해야 25전짜리 동전이나 1달러짜리 종이돈 한장 던지는 것이 고작이다. 광대가 어디서 온 누구이든, 왜 이 황량한 벌판에서 아까운 천재성을 낭비하든 그런 것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알 필요도 없다. 광대는 그냥 광대니까

 

그날도 우리의 어릿광대 장 피엘은 그 자리에서 열심히 놀고 있었다. 아무도 봐주는 이 없는데도 그는 어릿광대짓에 깊이 빠져 있었다. 울긋불긋한 피에로 의상이 가을바람에 휘날리고, 짙은 화장 속의 얼굴이 온갖 모습을 지어내고 있었다.

주위를 휘둘러보았지만, 정말 구경꾼은 하나도 없었다. 마른 나뭇잎들만 그를 비웃는 듯 팔랑거릴 뿐이었다.

허허, 이 친구 미친 거 아냐· 구경꾼 없는 광대라니.

그 친구의 광대짓거리는 광대답지 않게 우스꽝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무슨 사랑 이야기를 팬터마임으로 엮어가는 모양인데 슬픔의 그림자가 한껏 드라워 있었다. 슬픔을 이야기하는 광대, 애수의 어릿광대·.

문득, 그의 눈물을 보았다. 찢어지게 웃는 분장 속에서 그는 울고 있었다. 언뜻, 그냥 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 친구. 우리 따끈한 코피나 한잔 합시다 

  고맙소! 하지만, 보시다시피 난 지금 바쁘오. 일 하는 중이라서

  일이라구? 구경꾼도 없는데?”

  구경꾼? 구경꾼 때문에 이 짓을 하는 건 아니라오 

그 친구가 엷게 웃었다. 그 웃음이 피에로 분장과 묘하게 어울렸다.

  이따 오후 늦게 다시 오시겠오? 해질 무렵에 말이요. 그때 한잔 합시다 

  글쎄시간이 어떨지

  그렇다면할 수 없지만


 

광대는 다시 팬터마임을 시작했다. 여전히 구경꾼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광대는 열심이었다. , 구경꾼 없는 광대여, 애수의 어릿광대여.

나는 그 자리를 떴다. 나 혼자 외롭게 구경꾼이 되는 것이 부담스럽고 싫었다.

그때 광대는 나의 매몰찬 뒷모습을 향해 쇠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귀에 익은 우리의 유행가였다. 이봉조가 지은 그날 밤 그 자리에 둘이서 만났을 때, 똑같은 그 순간에어쩌구하는 그 가락이었다. 놀라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광대가 웃으며 말했다.

  이따 봅시다. 기다리겠오

낙엽만 뒹구는 황량한 공원에 젖은 서양쇠피리 소리가 아스라히 스며들고 있었다. 떠날 때는 말없이 말없이 떠나리다

  오케이! 이따 봅시다. 기다리쇼

 

그렇게 해서 어릿광대 장 피엘과 다시 그날 저녁 술집에 마주 앉았다.

분장을 지운 그 친구는 꽤나 잘 생긴 사내였다. 알랭 들롱과 장 폴 벨몽도를 합쳐 놓은 듯한 인상의 프랑스 사내였다.

  난 당신이 뭘 물어보고 싶어 하는지 다 알아요. 어째서 멀쩡한 놈이 구경꾼도 없는데 애수의 어릿광대 노릇을 하느냐? 도대체 무슨 신파조의 사연이냐? 한국노래는 어떻게 아느냐? 뭐 그런 것들이 묻고 싶은 거죠?” 

맥주잔을 시원하게 비우더니 놈이 불쑥 말했다. 나쁜 짓 하다 들킨 어린아이 같은 낭패감이 부끄러웠지만, 아니라고 잡아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물어보실 것 없어요. 내가 다 말해 드릴 테니까대신 술이나 넉넉히 사슈, 술이나

광대는 술을 마시며, 노래하듯 웅얼거리며, 쿨쩍거리며· 스스로의 슬픔을 털어놓았다.


 

  벌써삼년째요. 주말마다 그 자리에서 어릿광대 노릇을 했지구경꾼이 있든 없든구경꾼! 그런 건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죽은 내 아내에게바치는 몸짓이니까아내가 내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니까내 귀엔 생생하게 들려요. 아내가 깔깔대며 손뼉치는 소리가

내 아낸 한국여자였어요. 은령이실버벨이라는 이름이었지. 은방울 말이에요, 짤랑짤랑대는 은방울우린 바로 그 자리에서 만났지요. 그리고 곧바로 친해졌어요. 헤어질 수가 없었어요. 아내가 플루트를 불면 난 팬터마임을 했지.

겨울바다, 달빛에 부서지는 태평양· 파도와 모랫벌이 만나는 그곳에서 난 팬터마임을 했어요. 아내의 피리소리에 맞춰길에서도, 아우성치는 갈대밭에서도, 선인장 숲에서도아내와 나는아시겠어요, 아내의 피리소리에 내 몸은 나도 모르게 움직여요.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내는 거예요.

우린, 그렇게 꿈처럼 살았어요. 물론 가난했지만, 부러울 게 없이 그림처럼 살았어요. 그런데그런데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쓰러졌어요. 우리가 만났던 바로 그 자리에서의사 말이 암이랍디다. 백혈병! 젠장, 더럽게 흔해 빠진 신파지하필이면 내 사랑하는 아내가너무 행복하니까 신이 우리를 질투한 거예요.

아내는 끝내 이기지 못했습니다. 죽기 전에 그럽디다, 우리가 만났던 그 자리에 가보고 싶다고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설레는 마음으로 당신과 만나고 싶다고.

거기서아내는 휠체어에 앉아 마지막으로 피리를 불었어요. 끊길 듯 끊길 듯바람에 나부끼듯견딜 수가 없었어요. 견딜 수가난 미친듯이 팬터마임을 했어요. 죽음의 사신을 쫓아내는 팬터마임을.

그러나 아내는 끝내한 마리의 작은 새가 되어 포르르 날아가버리고 말았어요한 마리의 하얀 새가 되어아내의 몸뚱이는 공기처럼 가벼웠지요. 은빛피리보다도 훨씬 가벼웠지요.

그래서난 주말마다 거기서 아내를 만납니다, 어릿광대의 모습으로

하지만, 난 거기서 똑똑히 들어요. , 조금만 더 해주세요, 제가 피리 불어드릴께요. , 좋아요, 아 멋있어요! 깔깔대는 웃음소리, 신나는 박수소리

그리고, 다음 주에도 또 오시는 거죠? 기다릴께요. 왜 그렇게 시간이 더디 가는지 모르겠어요. 그럼, 안녕 나의 사랑하는 장

난 똑똑히 들어요, 거기서우리 만난 그 자리에서.

어떠세요, 내 신파 같은 이야기가?

벌써 3년이로군요. , 한국에는 3년상이라는 게 있다죠?"



젠장, 아직도 이런 인간이 멸종하지 않고 생존해 있다니부끄럽고 부끄러워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날 우리는 정말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마셨다. 비틀거리며 골방으로 돌아온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여보 우리 다시 시작합시다! 우린 멋지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남들은 3년상도 지내는데 말이야!”

  “3년상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죠? 암튼 알았어요. 제가 곧 그리로 갈께요

그리고 나는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또 애수의 어릿광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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