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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 화가, 조각가 황하진
06/23/2017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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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 작가론>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조각가, 화가 고() 황하진(1936-1999)의 예술과 인생



                                                        장소현 (극작가, 미술사 전공)

 

조각가이며 화가 황하진 선생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새천년을 앞둔 199964일이었다. 향년 62세라는 아까운 나이.

올해로 18주년, 20주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2014, 15주기를 맞아 후배들이 마련한 회고전이 열려, 그가 남긴 유작을 감상할 수 있어서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존재가 그리워진다.

성실하고 우직스러운 조형작가 황하진의 예술과 인생을 되살펴본다.


 

생 각

 

말랑한 점토로

불면상을 큼직하게 만들고 싶다,

길고 시원한 선으로.

살짝 웃고 있는 부처님의 얼굴.

 

하얀 석고분으로

모자상을 예쁘게 만들고 싶다,

직선으로 돋아진 선

끝만 조히 다독이고.

아들 안은 엄마 모습 성모자상.

 

박달나무 통나무로

한개 십자가를 만들고 싶다,

자를 대고 줄을 그어 십자를 만들어 긋고.

다시 오실 주님 모습 예수님 초상.

19996

 

작가 황하진이 죽기 몇일 전 병상에서 쓴 짧은 글 중의 하나다. 신의 참 모습을 만들고 싶다는 작가적 소망과 열정이 담긴 간절한 시다. 죽음을 앞두고 신의 모습이 한결 생생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작가 황하진은 실제로 신앙이 깊었고, 생전에 성모자상이나 십자가를 많이 만들었었다. 그러나 죽음의 검은 그림자와 함께 본 신의 모습은 한결 선명했고, 그래서 그 모습을 만들고 싶다는 강한 소망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도 자신의 종교에만 매이지 않고 불면상, 성모자상, 예수님을 다 만들고 싶다고 쓰고 있다.


한편, 이 짧은 글 속에는 황하진의 예술세계가 간단명료하게 압축되어 잘 드러나 있다. ‘말랑한 점토’ ‘하얀 석고분’ ‘박달나무 통나무는 그가 즐겨 다루던 조각의 재료들이다. ‘길고 시원한 선’ ‘끝만 조히 다독이고’ ‘자를 대고 줄을 그어등의 표현은 그의 전형적 조형방법들을 말해준다.


작가 황하진은 199964일 오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

작가는 가고, 작품들만 남았다. 그가 오래 활동했었더라면 이 글에 나온 것 같은 신실한 작품을 많이 남겼을 텐데라는 안타까움이 짙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창 일할 나이, 이제부터 제대로 농익은 작품을 만들기 시작할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에 아쉬움이 더욱 크다.

새로운 작품 제작을 위해 매우 많은 양의 스케치를 끝내고, 캔버스 등의 재료를 잔뜩 준비해놓고, 의욕적으로 막 그리기 시작할 무렵 병마가 그를 덮쳤다. 그리고는 얼마 버티지 못 하고

그가 손수 짜 만들어 놓은 캔버스는 하얀 공간으로 남아있다, 눈부시게 흰 절대공간어쩌면 그는 지금 저 세상에서 그 캔버스에다 심혈을 기우려 그가 소망했던 불면상, 성모자상, 예수님 등 신의 모습을 기도하듯 간절한 자세로 그리고,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작가는 가고, 작품만 남았다. 남긴 작품들마저도 사방에 흩어져 있고, 그의 작품세계도 한갓지게 정리되지 못 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남아 있는 자의 도리로 그의 작품세계를 간단하게 정리해본다. 그가 겪어온 이민1세 예술가의 삶 속에 우리의 모습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것 같아서 못내 마음이 무겁다.

 

<1>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가

조각가이며 화가인 황하진의 작품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단순함의 아름다움” “순진무구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림에서나 조각에서나 마찬가지다. 형식이나 내용에서 꼭 필요한 요소만 남기고 군더더기를 모두 짤라 없애고 본질만 남기는 일, 작가 자신은 이것을 잔가지 치기라고 표현한다.


평생 잔가지 치기를 해온 덕에 이제 거의 다 쳐냈는데


작가가 유언처럼 읊조린 말이다. 그가 말하는 잔가지 치기란 조형세계만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네 살림살이의 온갖 잡스러운 잔가지도 두루 포함하는 말이다. 이런 저런 욕심으로 뒤얽힌 일상생활에서 잔가지를 쳐내고 본질만 남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병마의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가며 자신의 예술과 인생에 대해 설명하던 그 치열하고 진지한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삶의 잡다한 요소들을 다 짤라내고 오로지 예술에만 정진하고 싶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작가 황하진은 본질적으로 조각가였다. 이민생활이라는 어려운 현실 때문에 제대로 조각을 하기가 어려워 차선책으로 그림을 열심히 그려,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조각가였다. 그의 회화 작품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조각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작가 자신도 조각에다 색깔을 입힌 작품들이라고 표현한다.

조각가 황하진은 깎아내는 작가다. 덧붙여 형상을 빚어내는 조소보다 깎아내고 또 깎아내 최소한의 본질만을 남겨놓는 조각 작품에서 그의 청교도적 정신이 한결 빛을 발한다. 그의 조각에는 군더더기가 거의 없다. 가장 본질적인 사랑만이 씨알처럼 고집스럽게 남아있다. 이런 고집은 그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순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황하진의 작품세계는 그의 스승인 김종영 선생의 가르침에 맥을 대고 있다. 회화에서는 장욱진 선생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그는 김종영 선생의 글과 그림을 모은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라는 책을 읽고 또 읽고, 주위에도 열심히 권했었다. 김종영 선생의 글 중 황하진의 예술관에 그대로 맥이 이어지는 구절을 몇개 옮겨본다.

 

나는 복잡하고 정교한 기법을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숙달된 특유의 기법이 나의 예술 활동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표현과 기법은 단순하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것이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미를 알려고 하거나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허황한 일이다. 절대적인 미를 나는 아직 본 일도 없고 그런 것이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다만 정직하고 순수하게 삶을 기록할 따름이다, 그것이 희망이고 기쁨이기를 바란다.

나는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드는 것- 이런 따위의 생각은 갖고 싶지 않다. 기술과 작품의 형식은 예술을 위해서 사용되는 방법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단순한 게 좋다.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




  

<2> 황하진의 작품세계

미국으로 이민 온 이후 황하진의 작품들을 내용별로 간추리면, 동요적이고 목가적인 세계를 다룬 그림들, 예수의 일생을 독창적 조형언어로 재현한 그림들, 매우 단순화된 형태의 인물 조각들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그의 그림과 조각은 조형적으로 같은 세계다.

 

1981년 미국에서 가진 첫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인 것이 향수를 자극하는 목가적인 그림들이었다. 그가 미국으로 이민 온 것이 1970년 정월이었으니, 이민생활 10년이 넘어서야 첫 전시회를 마련한 셈이다.

이어서 1982년에도 같은 소재를 좀 더 발전시킨 그림들을 모아 개인전을 열었다. 매우 단순화된 초가집, 나무, , 피리 부는 아이, 소를 탄 아이 등이 마치 정겨운 동요를 듣는 듯한 푸근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그림들이다. 이 주제들은 아마도 이민 초기의 고달픈 삶과 이에서 비롯된 정신적 목마름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들은 그림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측면에서도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 시도였다. 작가의 이런 뜻이 큰 공감대를 이루었는지, 첫 전시회의 작품들이 모두 팔리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참고로 그 당시의 전시회 평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현대미술은 쓸데없이 어려워서 뭐가 뭔지 이해도 안 가고 골치만 아프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불평이다. 자꾸만 그렇게 어려워져만 가서는 어쩌겠다는 것인가라는 의문도 생겨나고 있다.

황하진의 그림은 쉽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리고 인간의 어떤 근본적인 세계를 소중하게 보듬어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어린 시절에 즐겨 부르던 동요의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현대미술이 논리와 철학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잊어버렸던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황하진은 작년의 개인전에서 보여줬던 목가적인 분위기보다 훨씬 더 음악적이고 서정적인 세계를 화면에 담고 있다. , 호수, , 달과 계수나무, 초가삼간 등의 소재를 다루면서도, 이번에는 훨씬 더 어린 시절의 풋풋한 냄새를 풍겨준다.

그의 화면을 밝고 명랑하게 감돌고 있는 것은 동요적 음악성이다. 이 음악성은 극히 단순화된 형태들을 꾸밈없이 반복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얻어지고 있다. 동요는 단순한 음절을 반복하므로 순수한 정서를 이끌어 내는데, 황하진의 그림들도 이런 방법을 취한다.


소재와 형태들의 조형성이 동요성과 무리 없이 어우러지고 있는 것 역시 황하진의 독특한 세계다.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린 연작들이나 운동회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들에서 그의 음악성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비록 웅장한 교향악이나 화사한 실내악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우리가 즐겨 불렀던 소박한 동요나 민요의 세계가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아련하게 떠오른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잔잔한 노랫가락들, 고달픈 타향살이의 이국땅에서 만났기에 더욱 가슴에 와닿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어린이 같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많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자면, 장욱진 화백이나 백영수 같은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과 비교해볼 때 황하진의 작품세계는 반복의 음악성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동심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단순히 그런 소재를 다룬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화가 자신이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순수해져야 하는데, 바로 여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화면을 조형적으로 다듬으려는 노력이 동심의 세계를 밀어내치기 때문에 어린이 흉내에 그치기가 십상인 것이다. 화가 황하진이 극복해야 할 지점도 바로 이곳이다


  황하진은 어린아이들이 나무토막 쌓기 놀음을 하듯 똑같은 형태들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방법을 통해서 어른스러움이 끼어들 여지를 막아내려 하는데, 이런 노력이 이번 전시회의 작품들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자칫하면 만네리즘에 빠지기 쉬우므로 늘 긴장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형태들을 너무 비슷한 방법으로 쉽게 처리하는 흠 역시 그가 극복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무튼 황하진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오랜만에 푸른 들에 울려 퍼지던 어린 시절의 동요를 듣는다. 그리고 그림 앞에서 당혹하거나 화가에게 그림 설명을 요구하는 번거로움에 빠지지 않고, 바로 그림과 대화를 나눈다.“

          -장소현의 전시평 <음악성으로 엮은 어린 시절>, 1982310일자 한국일보 미주판


이 작품들이 보여주는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유지하는 일은 곧 작가가 말하는 잔가지 치기와 이어진다.

이어서 몇 년 뒤에 선보인 것이 예수의 일생을 소재로 한 종교적 그림 시리즈였다. 이미 확립한 조형의 기본 구조를 지키면서 종교적 소재를 개성적인 시각으로 소화해낸 작품들이다. 자신의 작품세계와 신앙을 조화시킨 것이다

황하진에 있어서 미술과 신앙은 하나인 것이다. 작가 황하진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잔가지 치기를 열심히 해왔다.


그리고 작가 황하진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 조각 작품들이다. 조각 역시 지극히 양식화된 형태로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 선과 점으로 이루어진 인체(人體)나 가족상, 나무 덩어리에 최소한의 칼질로 묘사한 모자상 등은 그야말로 잔가지를 모두 쳐버리고 본질만 올곧게 남아 있다.


작가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원래는 양괴(量傀)를 소중히 여겨왔는데, 이민 온 이후 재료의 궁핍과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풍부한 공간을 받아드리는 대신에, 무척 소중하게 여겼던 양괴를 포기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경우 이민생활의 궁핍함이 오히려 작가적 변신의 좋은 계기가 된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이민을 오지 않았어도 어느 시점에서는 최소한의 수평 수직의 단순한 선과 점으로 이루어진 인체 표현에 도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조형은 단순히 재료의 궁핍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정신의 소산이라고 보여 진다.

 

황하진의 조각을 꼼꼼히 살펴보면, 조형적으로 단순함단조로움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의 작품이 단조로움에 빠지지 않고 계속 김장감 있는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팽팽하게 지켜나가는 힘은 마음의 눈에서 나온다. 인체를 단순한 물질이나 도상학적 기호로 보지 않는 마음의 눈이 항상 깨어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십자가는 지극히 단순한 조형이지만, 그것이 갖는 종교적 의미는 엄청나게 크다. 작가 황하진은 그 깊고 큰 의미를 제대로 보는 심령의 눈을 소중하게 여기는 엄격한 예술가였다.




 

<3> 황하진 미술의 미덕

작가 황하진은 자신의 세계를 고집스럽게 지키면서도 보는 사람과의 관계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초지일관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쉬운 작품을 만든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다. 그는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해하지 못 하는 작품은 아예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리를 해서 큰 작품을 만들지도 않았다.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 했을 뿐이다.


단순화를 깊게 추구하다보면 추상미술로 발전하기가 쉽다. 조각가 브랑쿠지나 김종영 등이 좋은 예다. 그러나 황하진은 끝까지 구체적인 형상과 인체를 다루었다. 그런 고집은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그의 관심은 끈질기게 인체에 집중되어 있다. 그가 남긴 글의 한 구절을 옮겨본다.

 

인체는 아름답다.

아름다운 인체는 최상의 작품 표현 대상이다. <중략>인체는 하나의 좁혀놓은 우주이고, 내게 있어서 이 소우주는 광대하고 위대한 대상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대상을 가지고 있는 한 또 다른 대상을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인체에 대한 관심은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일 것이고, 인간에 대해 깊게 파고들다보면 결국 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이미 자신의 종교를 확고하게 가진 사람이라면 그 종교적 바탕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파악하게 될 터이다. 황하진의 경우 이 두 가지의 관점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작품으로 나타난다. 축복 받은 경우다.

그런 점에서 황하진의 작품은 넓은 의미의 <종교미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매우 소중한 작가적 덕목이다.

 

작가 황하진이 전시회를 꾸미는 자세는 특이하다. 그 동안 그린 것들 중에서 골라서 전시회를 꾸미는 것이 아니고, 전시회 전체가 하나의 흐름이 있는 작품이 되도록 꼼꼼하게 계획하여 작품을 제작한다. 그래서 어떤 전시회는 모든 작품이 똑같은 크기의 캔버스에 같은 색조, 같은 질감으로 꾸며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때로는 대량생산 그림 같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오해다.

꼼꼼히 살피면 실제로는 전시회 전체를 동어반복적음악성으로 채우려는 것이 작가의 의도임을 알 수 있다. 그림과 그림이 서로 울림을 주고받으며 공명현상을 일으키도록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는 것이다.

 

<4> 황하진 미술과 문학

황하진의 그림이나 조각은 음악적이면서도 문학적 요소가 매우 강하다. 조형적 표현은 지극히 단순화되어 있지만, 속으로는 말하고 싶은 것이 매우 많기 때문에 문학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미술은 운문이다. 시다. 시 중에서도 단정한 정형시다. 동요나 민요처럼 단순함 속에 큰 울림을 갖도록 짜여져 있다.


실제로 황하진은 문학적 욕심도 있었고 필력도 좋은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에 이미 동료들과 <하나 둘 셋>이라는 제목의 3인 공동 수필집을 낼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생활철학인 잔가지 치기에 의해서 문학적 재능은 숨겨져 버리고 말았다. 문학적 재능이 미술의 밑거름이 되어버리고만 것이다.

또한 그는 서예에도 관심이 매우 많았고 번뜩이는 재능을 발휘했지만, 이 역시 잔가지 치기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황하진의 작품들은 이민생활의 투쟁이 낳은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눈물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작업과정은 싸움이다. 이 싸움은 미주에 이민 와서 더욱 격심해졌다. 생활의 변화로 혼돈과 시간의 단절로 절망과, 재료의 빈곤으로 체념과, 끈질기게 싸우며 작업은 이어졌다. 이 처절한 싸움의 와중에서 낭의 완만한 곡선은 경직된 곡선으로 바뀌고 부드러운 곡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잘 다듬어진 덩어리는 그것이 자리하고 있던 그림자처럼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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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하진의 삶

“1936년 나는 벌교에서 태어났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장소다. 1944년에 벌교남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3학년 때 담임이 미술교사 강덕언 선생이었고, 5학년 때는 또 한분의 미술교사 변영섭 선생이 계셨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도 담임이 서양화가 김흥남 선생이었다.

1956년 서울 미대에 입학했다. 40년 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밤을 지새며 젊음을 불태웠던 꿈 많은 대학시절의 실기실, 젊은 날의 꿈나래를 한없이 펼치던 그곳, 정겨운 보금자리를 잊을 수가 없다.“

 

황하진이 쓴 자기소개의 한 부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스승인 김세중 교수를 도와 제2한강교 유엔탑 등 당시 초창기인 환경 조각의 제작에 참여하며 실력을 발휘했고, 대광고등학교와 진명여고 교사로 봉직했다.

미국으로 이민 온 것은 1970110.

미주 한인미술계 발전에 큰 관심과 사명감을 가진 그는 78, 88, 98년에 10년 터울로 <남가주한인미술가협회> 회장을 맡아 열심히 봉사했고, 88년과 98년에는 <미술계 년감>을 펴내는 등의 열성을 보이며 좋은 선배노릇을 톡톡히 했다.

작가 황하진은 결코 실험정신이 강한 화제의 미술가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혼란스러운 실험과 새로운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미술의 본질을 복원하는 일에 힘쓴 청교도적인 작가다.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정직하고 성실한 자세로 이민문화의 소중한 한 귀퉁이 땅을 묵묵히 다져온 한 작가의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가 남긴 단순함의 아름다움과 함께

새천년을 앞둔 199964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

15주기를 맞아 후배들이 마련한 회고전이 2014412일부터 51일까지, 엘에이의 <갤러리 웨스턴>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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