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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의 '사그라 파밀리아 대성당'
01/16/201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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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엘의 꿈 한 가운데에는 교회가 있었다.

가우디가 가장 좋아했던 작업은 콜로니아 구엘 성당이었다.

지하실을 연구실로 이용해 건축과 공사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건축가로서의 가우디는 매혹적이면서도 오만했다.

기존의 모든 건축물들에는 오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딕 양식이었다. 공중 부벽이 필요하기 때문에 완벽하지 못하다고 했다.

목발을 짚어야 버틸 수 있는 오점 투성이 양식이라고 했다.

가우디는 현수선(양 끝이 고정되어 있을 때 선의 무계에 의해서 이루게 되는 금문교 같은

곡선) 형태의 아치를 이용해 지붕이 벽을 밖으로 밀어내지 않도록 했다.

A점과 B점 사이의 쇠사슬이 아래로 늘어지면 어떻게 될까?

자연스러운 현수선 형태로 늘어질 것이다.

그걸 뒤집으면 굉장히 튼튼한 형태가 되는 거다.

가우디는 교회의 도면에 이 원리를 적용해 위에서 거꾸로 늘어뜨린 모형을 만들었다.

끈으로 된 줄로 각각의 아치를 표현했다.

자루에 총알을 넣어서 썼고 무게에 의해 변형된 현수선(목걸이 같은 형태)

거꾸로 뒤집어 아치 형태를 잘 유지하면 무게를 완벽히 버티는 구조물이 된다.

 

 

가우디는 실험 모형의 줄에 돼지기름을 발랐는데 이것이 쥐들을 불러들였다.

몇 개월을 투자해 만든 실험 모형이 결과를 기록하기도 전에 먹혀 버렸다.

남은 것은 가우디가 꾼 꿈의 마지막 흔적들뿐이었다.

그는 대형 교회를 계획했다. 지하실 건축에만 15년이 걸렸다.

실망한 구엘은 공사 중에 사망했다.

 

성당 실내 공간을 보면 현대인의 눈에도 몹시 부실해 보인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다.

기둥들은 가우디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곡선들이다.

그의 자(Ruler)는 제도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연 속에 있었다.

그의 기둥들은 나무의 선을 재현한 것이고 자연의 색들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가우디는 자연에서 관찰되는 기하학적 형태를 고대로 살렸다.

역사 속의 많은 예술가가 자연을 모델로 삼았지만 거의 장식으로만 사용했다.

꽃과 잎으로 기둥을 치장하거나 아루누보 양식의 건물을 꾸미는 식이다.

그런데 가우디는 자연의 장식적 기능뿐만 아니라 건축 형태로서의 가능성에

주목한 것이다. 가장 좋은 기둥은 나무다.

나무는 바람과 눈을 견뎌내는 아주 흥미로운 구조물이다.

우리의 뼈 또한 훌륭한 기둥이다. 최고의 돔은 우리의 머리다.

가우디 현상의 또 다른 수수께끼 중 하나는 그의 자연 사랑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가우디가 늙어가면서 툭하면 화를 내는 광신도로 변해 갔다.

그의 집착은 묘하고도 근사한 결실을 맺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그것이다.

가우디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비범한 사람이었다. 천재인데 단순한 천재가 아니었다.

빛에 대한 열정, 예술에 대한 열정, 건축물, 색깔, 전구와 금속에 대한 열정, 이 모든 요소가

합쳐지면서 폭발적인 효과를 내는 것이다.

 

 

바르셀로나 곳곳에는 가우디의 흔적이 있다.

가로등, 벤치와 예배당에는 물론 19세기 부자 상인들의 궁전에도 남아 있다.

가우디는 신앙심이 깊었다. 가우디는 의욕적이었다. 가우디는 까다로웠다.

가우디는 결단력도 강했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업적에 묻혀 버렸다.

 

구엘 공원에 사는 동안 신앙심은 점점 더 커져서 이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건축을 시작했다.

바르셀로나의 상징이 된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한 책장사의 아이디어였다.

가난한 자를 위한 대성당을 원했다.

처음에는 다른 건축가가 있었지만 그가 해고된 후 1883년부터 가우디가 건축을 맡았다.

가우디의 삶은 영적인 삶이었다.

가우디가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칠 수 있는 기회인 것이었다.

건물의 동쪽 파사드를 짓는 데 50년이 걸렸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의 새 주교가 건축 자금을 다른 곳에 쓰기 전에 모금된 금액을

다 써 버려야 했다. 가우디로서는 반가운 주문이었다.

돈 많고 고집 센 후원자들에게서 벗어난 가우디는 끝없는 모금 행위에 계속해서

동원되어야 했다. 건축 현장 주변의 파티장들을 찾아다니며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했다.

아무리 모금해도 부족했다. 신자라면 모두가 헌금을 내서 이 성당을 완공해야 했다.

이 정도 가지고는 턱도 없어요. 좀 더 내세요.“하고 다그쳐서 돈을 더 받아냈다.

가난한 사람들의 한 푼도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번은 거지로 오인 받기도 했다. 그의 기행은 192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구엘 공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성당 건축 현장의 작은 방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제외한 외부 세계와는 점점 더 단절되어 갔다. 건강 상태도 엉망이었다.

그래도 아직 성 펠리페 네리 성당까지 매일 왕복 15km걸어 다닐 힘은 있었다.

조각상 앞에서는 모자를 벗고 신부와 대화도 했다.

 

 

교통이 혼잡한 그랑비아 대로를 매일 지나야 했던 그는 짜증나는 전차를 향해

지팡이를 마구 흔들기도 했다. 가우디는 그랑비아 대로를 제때 건너지 못했다.

이 쇠약한 노인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차에 치었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그는 실내화를 신고 끈으로 기운 속옷을 입고 있었다.

홀리 크로스 병원에서는 가우디의 이름을 안토니 산디라 적었지만 이 이름은 나중에

정정됐다. 그리고 가우디는 사흘 만에 사망했다.

가우디의 비참한 죽음에 죄책감이라도 느낀 듯 수많은 바르셀로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의 종교와 기행, 부담스러운 독창성에 대한 모든 논란이 사라졌다.

한 신문은 성자의 죽음을 선포하기도 했다. 어마어마한 사람이 참석한 장례식이었다.

건축가 가우디를 모두가 좋아한 건 아니지만 많은 엄마들과 평범한 사람들 노동자와

공장 직원들이 그의 예술이나 작품과는 별개로 가우디를 추모했다.

가우디는 건물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의 사후 75년이 지난 지금도 건축공사는 계속되고 있다.

유일하게 가우디의 설계를 따르지 않은 부분은 전문 조각가 조셉 마리아 수비라치가

건축을 지휘하고 있다.

 

 

수비라치가 맡은 수난 파사드는 녹색 청동 문이다. 대체로 찬사를 받는다.

수비라치는 가우디가 시대를 앞섰다고 말한다. 가우디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로마인들이

발명한 아치형 건축이다. 그 구조를 정점까지 끌어올렸다.

20세기에 유행한 콜라주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난해한 건축물은 20세기에 등장한 헨리 무어 등의 추상적 조각을 예견하고 있다.

하지만 신자들은 여전히 대가의 손길을 그리워한다.

가우디가 있든 없든 성당은 건축될 것이다.

하지만 가우디의 천재성과 정신은 논란이 분분하다.

대성당이 완공되려면 앞으로 100년은 더 걸릴 것이다.

독실했던 건축가에 대한 존경심도 높아져 간다. 가우디는 신과 특별한 관계였다.

그는 일상 속의 성직자였다. 그리고 건축의 성인이었다.

성인이든 아니든 가우디는 도시와 시민들에게 분명한 흔적을 남겼다.

수백만 명이 그의 흔적을 쫓아 바르셀로나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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