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부부가 귀농을 하였습니다. 농사를 지어 그것을 가공하여 부가가치를 높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작물은 참깨였습니다. 신통치는 않았지만 마침내 참깨를 수확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참깨로 100% 진짜 참기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진짜 참기름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부부는 그 참기름이 그렇게 계속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얼마 후에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유인즉슨, 그 참기름이 진짜 참기름이라는 걸 믿지만 그 참기름 맛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가짜 참기름 맛에 길들여진 입맛 탓에 정작 진짜 참기름이 맛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참깨 농사를 직접 지어 진짜 참기름을 만들어 팔겠다는 부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착향제와 조미료를 가미한 강력한 가짜 참기름의 강력한 맛은 본래 참기름의 맛을 잠식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입맛이 가짜에 중독된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교회 안에서도 발생했습니다. 언제나 가시적이고 강력한 것을 원하기 마련인 인간의 종교적인 심성은 기독교 복음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여 종교적 카타르시스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체험이라는 단어로 각색하여 그런 체험이 없거나 그런 체험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압박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은혜를 받아 불같은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자신에 넘치는 그 사람들을 설득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큰 믿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납고 거칠어진 그 사람들에게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설명해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그런 그들의 강압적인 주장에 설득되어 합류함에 따라 그런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게 되고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기독교는 정말 대책이 없는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김 정주라는 분이 쓴 "교회에선 '주여, 주여' 교회 문 밖에선 '죽여, 죽여'"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거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찬송도 불이 꼭 들어간 찬송이어야 하고, 말씀도 불같은 말씀이어야 하고, 기도도 불이 임하는 기도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부흥회의 열매는 불 받은 사람들이 나타나야 했다. 그렇게 불같은 부흥회가 잘 마쳐지면 그 부흥 강사 목사님에게는 불의 종이라는 칭호가 하사된다. 그분들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그런 불의 종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신기한 현상을 보았다. 이러한 부흥회의 불이 지나가고 나면, 사람들의 겉은 엄청나게 뜨거워진 것 같고 당장 오대양 육대주라도 복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달려갈 것 같은 기세를 보이는데, 교회 주차장에서는 겉이 노릇노릇 익은 얼굴로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다투기 시작한다. 주차 안내를 하는 나는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열불을 낸다. 여전히 같은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이간질하고 미워한다. 이간질하는 모습을 보는 나는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세상이 아닌 가정에 돌아가서 불(?)을 쏟는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볼 때는 “주여 주여” 하는데 교회 밖에서 사람들이 안 볼 때는 “죽여 죽여” 한다.

 

강력한 종교적 카타르시스에 중독되어 복음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자만의 특별하거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가짜 은혜의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열매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분들은 진짜 은혜의 맛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가짜 참기름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진짜 참기름이 안 팔렸던 것처럼, 이제는 진짜 은혜가 외면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은혜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 1:12)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줍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14)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바라본다면, 우리는 은혜를 볼 수 있고, 그 은혜는 우리에게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울고 웃게 만들 수 있습니다. 때론 실망을 시키거나 담대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또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도전하여 믿음을 풍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일상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주어지면 무엇보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됩니다. 원래 의도된 본연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거룩하고, 평화롭고, 너그롭고, 친절하고, 온유하고, 그리고 있는 그대로 은혜롭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받고 또 받았다는 은혜라는 이 말은 추상적이어서 감을 잡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은혜란 무엇일까요?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리스어로 '카리스'인 은혜는 감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란 감사하는 마음에서 드러납니다. 감사는 내 능력과 상관없이 내게 주어진 것에 대해 우러나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러난다는 말에 조금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은혜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은밀합니다. 때론 강력한 쓰나미와 같이 밀려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잔잔한 파문으로 마음속에 전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생명이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마리아처럼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눅 1:38)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주어진 삶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존재 전체를 그분에게 돌려 맡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눅18:13)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고해(苦海)같은 인생이 선물이고, 주님의 은혜라는 것, 못난 자신이 은혜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책의 글들은 바로 그런 깨달음의 글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혜에 항복한 사람들의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을 번역하며 때때로 그들이 느꼈던 은혜가 제게도 전달되어 혼자서 눈시울을 붉히곤 했습니다. 보지 못했던 제 삶 속의 은혜가 오버랩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을 통해 제게도 은혜를 전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책의 글 가운데 한 저자는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이는 자신의 인생을 은혜의 "수증기"로 가득 찬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짜 은혜를 맛보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진짜 은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진짜 은혜는 교회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짜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꼭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