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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프 - 피아노트리오 제1번 C minor, Op.102
04/06/2020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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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Joachim Raff  -  Piano Trio No.1 in C minor, Op.102
라프  -  피아노트리오  제1번  C minor, Op.102




Trio Opus 8
Michael Hauber, Klavier 
Eckhard Fischer, Violin 
Mario de Secondi, Violoncello


I. Rasch


II. Sehr rasch


III. Mabig Langsam


IV. Rach bewegt



요제프 요하임 라프는 1822년 5월 27일 스위스 취리히 호반의 작은 마을 라헨(Lachen)에서 태어났다. 
혈통을 정확히 말하자면 독일인의 피가 절반 섞인 스위스인이다. 
독일인 아버지는 오르가니스트이자 학교 교사였다. 집안은 몹시 가난했고 아버지는 엄했다. 
아들에게 조기교육을 시킨답시고 수시로 회초리를 들었다. 
아버지의 안목이 맞긴 맞았다. 어린 라프는 라틴어를 읽고 바이올린과 오르간을 연주하였다. 
열 살부터는 아버지를 대신해 교회 오르간 주자로 일했다. 
열두 살에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포기하고 예수회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1840년 18살에 교사로 채용되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라프는 취직되자마자 어린 시절의 관심사였던 음악으로 눈을 돌렸다. 

1843년 독학으로 쓴 피아노곡을 라이프치히에 있는 멘델스존에게 보내 고견을 청하였다. 
멘델스존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당시 최고의 음악 출판사인 브라이트 코프 운트 헤르텔에 소개해주었고 출판이 성사되었다. 
슈만은 자신이 발행하는 <음악신보>에서 “장래가 촉망된다.”고 라프를 평하였다. 
이에 고무되어 전업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한 라프는 온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교를 사직하였다. 
고난의 시작이었다. 두 차례 연주회를 열었으나 커리어는 더 진전되지 못했고 
쌓인 빚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 선고를 받은 라프는 취리히에 일자리를 구하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잘 곳도 없어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1844년 6월, 당시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자자한 리스트가 
바젤에서 연주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폭우를 맞으며 75km를 걸어갔다. 차비가 없어서였다. 
티켓이 전석 매진되었지만, 리스트의 비서는 비에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된 청년을 
연주회장에 들어가게 했을 뿐 아니라 리스트에게 인사를 시켰다. 
“나와 함께 있지 않겠나? 독일로 가게 해주지.” 
리스트는 라프를 나머지 연주여행에 데리고 다니며 잡무를 맡겼으며 
쾰른에 있는 악보 가게에 취직까지 알선해주었다.

1847년 멘델스존에게 작곡을 공부하기 위하여 라이프치히에 갔으나 
그의 우상은 그해 11월 타계한 뒤였다. 
라프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작곡 활동을 하면서 
평생 지기가 된 당대의 마에스트로 한스 폰 뷜로를 만났다. 
바이마르의 궁정악장으로 부임한 리스트는 1849년 라프를 불러들여 조수로 고용하였다. 
그는 하루에 11시간씩 일하며 리스트의 악보 사보나 교향시의 오케스트레이션 편곡 작업을 도왔다.

1851년 라프는 오페라 <알프레드 왕>을 작곡하여 
리스트의 도움으로 바이마르 궁정극장에서 두 차례 공연하였다. 
반응은 좋았지만 다른 도시에서 공연될 정도는 아니었다. 경제 형편도 나아지지 않았다. 
스위스에 남아 있던 채무 문제로 몇 주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해가 지나면서 라프는 리스트에 음악적 자아가 종속되어 있는 자신과, 
과중한 일을 시키는 리스트에게 환멸을 느꼈다. 
게다가 라프는 리스트의 사위인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의 에세이를 발표하여 물의를 빚었다. 
라프는 리스트와 일군의 바그너 추종자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1856년 라프는 ‘이 저주받을 도시’ 바이마르를 떠나 비스바덴에서 피아노 교사를 일하며 독립했다. 
1859년에 결혼한 아내가 지혜로워 살림이 안정되었다. 
<알프레드 왕>의 재공연도 성공을 거두었다. 
1861년 라프는 빈 악우협회가 주최하는 작곡 콩쿠르에 교향곡 1번 ‘아버지의 땅으로’를 제출하여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등을 차지하였다. 
이듬해 빈 무지크페라인 잘에서 열린 교향곡 1번 초연 콘서트는 대성공이었다. 
청중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했고 박수가 그칠 줄 몰랐다. 
그의 나이 마흔 살 때였다. 
비로소 실력 있는 작곡가로 인정받은 라프는 작곡에 전념, 
속필로 다양한 장르에 걸쳐 엄청난 수의 작품을 양산하였다. 
그의 명성은 브람스와 바그너에 필적할 만큼 높아졌다.

1877년 라프는 비스바덴 시대를 정리하고 프랑크푸르트로 거주지를 옮겨 
새로 개교한 호흐 음악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음악원을 관리하느라고 작곡의 펜은 무뎌졌지만 
슈만의 아내 클라라 슈만을 피아노 교수로 초빙하여 
독일 최초로 여성 작곡가 클래스를 여는 업적을 세웠다. 
1882년 6월 21일 아침, 라프는 숨진 채로 가족들에게 발견되었다. 
의사는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로 진단하였다. 예순 살에 맞이한 죽음이었다.

라프는 멘델스존, 슈만, 리스트 등 1810년대 출생한 대가들과 
차이프스키, 브람스 등 1830-40년대 출생한 대가들 사이에 위치하는 작곡가이다. 
시대적으로 또 내용적으로 그의 음악은 중기 낭만파 음악이라 말한다면 그럴싸할 것이다. 
라프는 피아노 소품에서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작품을 남겨 놓았는데, 
이들 중 핵심을 이루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11편에 달하는 교향곡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교향곡 1번 ‘아버지의 땅으로’를 쓴 해는 1861년이고, 
교향곡 11번 ‘겨울’을 쓴 해는 1876년경이다. 
슈만의 교향곡 3번 ‘라인’이 1851년,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과 
‘단테 교향곡’이 1857년에 초연되었고,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이 1876년,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4번이 1878년에 초연되었으니, 
대작 교향곡의 공백기에 라프의 주요 교향곡이 출현한 셈이다. 

작곡 측면에서도 라프는 리스트와 바그너로 대표되는 표제음악 양식과 
2관 편성의 고전적 교향곡 스타일을 종합하고자 하는 입장을 취했다. 
일부 비평가들이 라프를 가리켜 이도저도 아닌 절충주의자라고 혹평한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작곡 연대를 꼼꼼히 쫓아가면, 
라프의 음악에서 자신만의 확고한 예술관을 찾아볼 수 없다는 비판은 부당하다. 
오히려 그가 내놓은 아이디어를 후대 작곡가들이 작품에 활용함으로써 
나중에는 보편적 또는 상투적인 정석 서법으로 굳어져 절충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닐까. 
라프의 작품들이 후대에 끼친 영향은 차이코프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드보르자크,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부소니 등 매우 넓은 범위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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