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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띄운 그리움
04/16/2018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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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운




  







장기려 박사의 가슴적시는 

감동 글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 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학회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 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 그는 언제나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살아왔다.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수당은 있었 지만,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는 가불이 많았다.여기에서 그의 수수께끼가 

시작 된다.그에 대해 떠도는  미신에 가까운 풍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다른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말기 암 수술 환자들이  부산  복음 병원으로 몰려 들었던  

것이다. 겨우 입원을 하고  수술을받아 병이나으면 그 다음

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 없었다 이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 

이었다.원래, 잇속이   밝지 않아 셈을 잘 할 줄

모르고, 바보  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그에게  "시골 우리집은 논도 밭도

없고 소한 마리도 없는 소작농 

이어서 입원비나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

"라고환자들이 

 하소연 하면, 

그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고는 눈물겨워했다.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겠느냐는 환자들의 제안에  그는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

하고는 했다.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보니

장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

지게 되었다.결국, 병원 회의

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부장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환자들이그를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어려운 환자들이 생기면 야밤에 탈출

하라고 알려주고는 하였다. "내가 밤에 살그머니 

나가서 병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탈출 하라.

"는 것 이었다. 장박사의  이러한 '바보 

이야기' 는 일 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북녘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

가슴에 묻고 지낸그는 

평생에 걸쳐 묵묵히 


사랑을 


실천한, 진실로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이었다.

유엔군과 국군이 평양을 탈환 하게 되었을 때, 

당시 김일성 의과대학 외과의사였던 장기려는 

대학 병원과  야전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

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군이  평양을  철수 하게 되면서 장기려를 

남으로 데려가기 위해 야전병원 환자 수송용 

버스에 타게 되었다.그것이 가족과의 45년에 

걸친 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 몰랐다. 그는 

언젠가 가족들을  만날  거라는 희망 하나로

부산에서  피난 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다시 가족을 만날  거라 했던   그의 바람은 

길고 긴 분단의 세월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장기려의 인생은 헤어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

으로바쳐진 사랑과 기도였다.의사 장기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황무지나 다름 없던 우리 

의료계에‘가난한 사람도 치료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박애 정신의 꽃을 피워 냈다.


의사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허락한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의사한번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 고 하나님 앞에 서약

했다

.장기려는 경정의전에 들어가면서 한하나님 

앞의 이 약속을 생이 다할 때까지 지켜나갔다.


그는 초창기 복음병원을 운영할 때 모든직원의 

월급을 식구 수대로 나누었다. 식구 수가 많은 

직원이 제일 많은 월급을 받았고,아들 하나만 

데리고 있던 장기려는 ?운전기사와 같은 돈을 

받았다. 이러한 정책에  직원들은 '공산당 식 

분배 정책'이라며 처음엔 어색해 했다.




평생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인술을 펼친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한국의 

슈바이쳐,살아 있는 성자’로 불렸다.이광수는 장기려를 

가리켜 ‘당신은 성자 아니면 바보요’라 고 말했다 고 한다. 

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북에 있는 가족도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하루 2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병원규모가 커지면서 무료진료가 가능 하게 

되자 장기려 박사는 1968년‘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

났을 때 도움받자’라는 표어 아래, 유럽의 의료

보험제도를 본 딴 ‘청십자 의료 협동 조합’을

 탄생시키며한국 의료보험제도의 모태가 

되었다.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 때,

주변의 몰이해와 재정적 어려움

에도 불구하고‘병의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는 것으로도 

슬픈데  가난한 사람

에게 과중한 치료비를

부담시킬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한국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당대 최고 외과의사였던 그는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하고

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 수술에 

성공하는 등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그는 한국 간외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다.




자기 월급 이상의 수술비가 나오면 병원을 탈출 시켜 주고...

평양 시절 때 그의 부인은 남편이 생활비를 가져다 주지 않아

의사 가운과  환자복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갔다고...그는 

평생 자기 집 한 칸을 갖지 않고 병원 옥상의 24평 사택에서 

살았다. 평생 나누고  봉사 하는 삶을 산  그 자신은 분단된 

조국의 피해자이기도 했다.1.4후퇴 때 환자를 돌보는 와중에 

부모, 부인,5남매를 평양에 남겨두고둘째 아들만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 이산가족이 된 그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고향의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

그런 그가 85년 정부의 방북 권유를 거절했다.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다른 사람이 모두 만날 수 있을 때,

나도 가족을 만나겠다고...


그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종을앞둔 

1995년 10월  가족들에게 

통일과 민족의 만남에 대해 묻자,

“이 땅에서 지금 만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짧게  만나느니 차라리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만나야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그는 부산시민상, 막사이사이상, 국제적십자상,

국민훈장,  호암상 들을  수상했다. 특히 그는 지난 

95년 부터는 당뇨병과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청십자 병원에서 

영세민 10여명 씩  진료해  주다가

그해  성탄절  새벽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

묘지에 안장

되었다.

 

그의 비문에는 그의 유언

대로“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이라고 적혀있다.그는 ‘가난하고 

소외 받는 이웃 들의 벗’  임을  자처 

하며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철저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간,‘이 땅의 작은예수’로 칭송받는 

사람이다.그에게 붙은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 있는 

푸른 십자가’라는 찬사에 한점도 부끄럼 없이 평생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 했다. 절대 빈곤의 ‘천막 무료 진료

부터미래를 내다본 의료복지 정책인‘청십자 의료조합’

까지,  그것은 그의 ‘사랑’이 이뤄낸 기적이었다.

그는 예수처럼 살고싶어했고, 그렇게 살았다. 

분단의 아픔을 환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한 의사 장기려의 삶은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다 .



일제 치하 때 의대 입학시험을 보면서 

“하나님, 이 학교에 입학시켜주시면 

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을 했다고...

졸업 후 당시 가장 뛰어난 수술 실력을 

소유한 백인제 박사 밑에서 수련을 받았고...

자신의 서원대로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위해 

무료 진료소인 복음병원을 개설해 영세민

의료구호사업에 전 생애를 바친 그...

29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이기도

했던 그는 정작 집 한 채 없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살다 갔다.

그의 개인적인 외로움을 뒤로 한 채...

모든 세상의 크리스천들이 장기려 박사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늘을 가슴에 품고 한평생 남을 위해 살며 

일평생 그리운 북녁 식구들 얼굴 그리며 

봉사하다 떠난  장기려 박사의 삶이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적십니다

 

출처;바람에 띄운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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