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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전하기 짝이 없는 2017 성탄절
12/08/2017 12:53
조회  1433   |  추천   11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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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양의 노래를 드리고 싶은데...                     

- 예수 오신날의 특별찬양을 그리워 하다 - 



돌이켜보니,

지난 12~3 년을 한결같이 빼놓지 않은 행사가 있었다.

그 길지도 이제는 짧지만도 않은 세월동안,

성가대 멤버로서 한 가지 신명을 바쳐서 참여한 일이 있다면,

매년 빠짐없이 부활절 칸타타와 성탄절 칸타타 (혹은 특별 찬양)

목청껏 불러 올려드린 일이었다.



2016년 크리스마스 특별찬양을 마치고



하지만 없단다. 

올해는 그와같은 특별 찬양은 계획에 없다고 하니, 그 서운함이 이루 말할 수없다.

보통 칸타타를 준비하는 데는 8~11주 정도가 소요되는 줄 잘 아는터라,

10월 중순부터 늦어도11월초가 되면,

올해는 어떤 곡을 누구와 함께, 어떻게 드리게 될까 기대에 부풀곤 한다.

웬지 마땅히 있어야할 [연습계획]에 대한 광고를 듣지 못하던 차에,

급기야는 11월 세번째 주가 되어, 목요연습 (주일 예배를 위한) 을 마치고,

[2017년 성탄절 행사]에 관하여 문의 하기에 이르렀다.

대답은

'칸타타는 없으나, 모종의 대체행사가 있을 예정이다.'는 것이었다.

확실한 것은 없는 듯했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아니 어떻게?  정말인가? 의문에 휩쌓이면서도, 

한편으로 [사정과 형편]에 의하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인가? 싶었다.


한 주 또 한 주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리고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에 들어서면서,

뭔가 커다란 것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더욱 사로 잡히곤 한다.

일종의 공허함이랄까?

마땅히 있어야할 것이 없는 듯,

늘 하던 것을 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 밑에서 부터 치밀어 오르는 것이라.

특히 목요연습 때마다 60여 마일

교회로 향하는 기나긴 운전의 시간때마다

말할 수없는 허전한 기분에 휩쌓이곤 하는 것이다.

솔직히 상실감이라 해도 내게는 과언이 아니다.


곰곰히 생각을 해본다.

'무엇 때문에 이런 허전함에 사로잡히는가?'

두가지로 결론을 짖게 된다.


첫째는 사라진 그 설레임이다.

칸타타나 특별 찬양을 드릴 때마다 갖았던 기대감과 

하루하루 연습을 하는 즐거움은 어디로 갔나?

두 말할 것도 없이,

찬양만큼 성령에 사로잡히게 하는 일도 없다.

수십명의 대원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하나가 되도록 모으고,

그 [천상의 소리(?)]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과정은,

분명 신앙 생활의 중요한 모티브였다.

부족한 인간의 목소리지만,

사랑과, 열정, 그리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하나로 된 소리의 집합체는 그 자체가 은혜이며 예술이다.

찬양은 주님을 향한 확실한 사랑의 표현이며,

신앙의 고백이자, 은혜로운 외침이다.

소리내어 부르짖는 기도이며, 가장 확실한 축복의 통로를 제시하는,

믿음의 행위임을 확신한다.

목회자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표현데로,

[찬양은 그 자체가 예배]임을 또한 십분 동감한다.


교회 안에 문화원을 만들고,

교우들에게 몇년간 컴퓨터를 가르치고,

이런저런 사역을 할 때마다,

다른 사람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그럴 때마다 갖아야했던 고통과 교회에 대한 실망감,

성도들 간에 만연한 권위주의와 상업주의,

마치 패거리를 지어야만 신앙생활이 순탄(?)해 질 것 같을 때나,

심지어 성도들이 담임목사를 몰아내야만 했던

일련의 사건들 등등을 보면서,

굳건하지 못했던, 그리고 아직 여린 믿음의 행로에는

과히 순탄치 만은 안은 시련의 시간들이 적잖이 있었다.

그야말로 [시험]에 들어야했던 순간들,

소위 [고비]라고 하는 것이 몇번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들은 몇몇 [믿음의 선배들]의 말대로,

하나님/주님만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아가려고, 무진 애를 쓰곤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어려운 시간을 견디고, 굳건히 [위만 보고] 열심으로 지내올 수있었던 데는,

찬양과 성가대가 크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없다.

다행히도 모태신앙으로 평생 찬양을 드려온 아내와,

그 신앙생활의 조건과 방법, 그리고 행위를 일치시키며 교회를 섬길 수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며 감사의 제목이 아닐 수없다.

내게 있어 찬양은 [첫사랑의 울림]이었다. 

뿐만 아니라,

찬양사역은 그 한가지로만 족하다는 것을 통렬히 배웠다.

몇년 전에 있었던 어떤 음악목사님의 세미나를 통해,

주님께 드리는 찬양은,

그 한가지에만 전념하기에도 분에 넘침을 깨닳았고,

모든 다른 사역을 내려 놓기로 했다.

아내와 함께 [찬양을 드리는 일]에만 전념하기로 다짐을 했고,

몇 년 동안 잘 지켜오는 중이었는데...

어쩌면 그로 인한 지나친 향념이,

허탈감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두번째는 원칙없이 편의주의에 편승하는 교회의 흐름이다.

이런저런 현실적인 어려움은 얼마든지 있을 수있다.

성가대(찬양대)를 동원하거나 연합성가대를 구성하는 문제,

지휘자를 내정하고 연습일정을 세우는 일,

반주자를 할당하고 식사나 간식을 위해 해야할 준비들,

또한 교회의 예산을 집행하고 선교회의 협조를 구하는 문제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습에 돌입하여 한 주 또 한 주 그 거룩한 행위를 실제로 하는 일,

등등은 분명 간단하고 쉽지 만은 않은 하나의 범교회적 행사이다.  

그러나 [형편과 사정]은 주어진 여건일 뿐이지.

대안이나 해법이 될 수는 없다.

믿음의 중심에는 어떻한 장애라도 넘어서야 하는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예배는 성도와 교회가 마땅히 드려야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섬김의 표현의 결정체이다.

예배의 중심에 찬양이 우뚝 자리잡고 있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이다. 

아니 찬양은 예배 자체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2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3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4 대대로 주의 행사를 크게 칭송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시편 145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높임을 소리내어 부르짖고 있다. 

늘 중요한 절기마다 갖는 아쉬움 한 가지가 있었다.

왜부활절 칸타타나 성탄절 특별찬양을

부활주일과 성탄주일에 본 예배 시간에 올려 드리지 못하나?

마땅히 찬양의 예배됨에 손색이 없을 터인데,

그것이 교회가 성도들을 예배의 중심으로 인도하는 길일 지언데

...


찬양을 드리고 싶다.

도망자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동굴에 까지 몰린 다윗이 그랬듯이,

감옥에 갇혀 고난에 처한 바울이 그랬듯이,

그 사랑하는 마음과 전능하심을 찬미하는 열정의 노래를 외치고 싶다.

두번 다시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신앙의 본질을 외면하며 교회는 바로 설 수없고,

본질적 원칙이 변질 되는 가운데 기독교는 살아남을 수없을 것이다.

[본질과 원칙]은 [형편과 사정]을 이기고 면면히 이어져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셩경에 줄줄히 말씀으로 살아서 엄연한 교리를 이루고 있다.

성경데로 만 하자는 것이다.

아니, 성경 말씀에 이르시는 바 만이라도,

지키고 행하여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와 기독교의 본질과 원칙이 아니겟는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요한복음 1:1-2)


말씀데로 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할 일이다.

믿음의 시작이요 믿음생활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회가 어떤 경우라도,

말씀이신 주님을 외면하는 일은 다시 없기를 바래본다.

찬양을 드리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행위이다.


편의 주의에 따라서 가는 교회는 있을 수없다.

바래건데,

교회가 형편과 사정을 빌미로,

주님에 대한 본질적 사랑의 외침을 저버리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 드린다.

편의주의는 인본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누가 장담하랴?

편리에 따라 가는 교회가,

언젠가는 일주일에 단 한번 드리는 예배조차도,

생략하거나 편한 데로 간략하게 드리는 일이 없다는 보장을?



2017 남가주 장로 협의회 찬양제 중에서




찬양을 드리고 싶다.

교회는 제발 그 거룩한 행위를 막지 말아다오.

단지 주님의 오신날을 감사와 기쁨으로 찬미하고플 뿐이다.

어찌할꺼나.

2017년에는 혼자라도 어떻게 찬양을 드려야 하나?

몇년전 크리스마스 특별찬양으로,

디즈니홀에 가서 Sing Along Messiah를 참여한 기억을 떠올려본다.

Walt Disney Hall 을 가득 메운 청중들,

인종과 언어와 문화, 성별과 나이가 다른 수천명의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언어와 소리를 내며,

하나의 지휘자, 하나의 오케스트라에 맞추어,

열심으로 [헨델의 메시아]를 부른 적이 있었지,

처음과 나중까지.

그때의 그 감동과 그 성령의 충만하던 순간을 잊을 수없다.


찬양을 멎을 수는 없다.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찬양은 아무도 멈출 수없으며,

그로 인해 성도의 본질적 행함을 막는 일은,

교회와 기독교가 타락의 길로 가는 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 살며 사랑하며 -

2017년 12월 둘째주, 성탄절 칸타타를 그리며





찬양, Choir, Christmas, Church,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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