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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의 유혹 - 세가지 유혹
11/06/2010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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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의 유혹

- 세가지 유혹 -

 

 

 

마침내 올것이 왔다. 

평생을 미루어 오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이제는 정면으로 부딪혀야할 때가 된 것이다.   공부하여 남주냐는 말이 있듯이, 신앙과 믿음의 문제에 누가 권한다고 신의 존재를 무조건 받아드릴 것이며, 누가 비난한다고 특정종교를 싸잡아 폄하할 것이랴.  평생을 아니 뱃속에서부터, 소위 모태신앙을 갖고 살아온 아내,  반면에, 이유가 어디에 있었든, 40 중반이 되어서, 비로소 절대자와 자신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게된 나이다. 

적어도 그의 종용을 못이겨서 선택한 길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외치는 고집쟁이로 나이들어간다는 것도, 이겨낼 자신도 없었다.  이는 모든 인간이 갖는 숙명적 나약함일까?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다른 믿음의 세계를 갖자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에든지 전지 전능한 존재,  불가함이 없으며, 어디에도 있을 수있는 힘의 존재는무엇일까?  아니 더 원초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은 어디서, 누구로부터 구할 것인가?  사람이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아마도 인간의 나약함과 불완전성을 깨닫는 순간마다, 자연 스러이 찾게 되는 것이 신이 아닐까.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래 나의 이야기를 하자.  남이 어찌 나일 수가 있으랴.  나 또한 신앙이 선택의 문제인지, 운명의 문제인지도 모르는  우매한 인간이 아니더냐.

 

아마도 그 시작은 지극히 단순한 의문에서부터 시작되었던것 같다.  궂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꼭 규명해야할 철학적 명제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겟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왓는가?

나는 왜 사는가? 

...

나는 왜 고뇌를 갖고 사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던 시절에, 예수의 이야기는 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죄도 없는 존재로서, 인간의 모든 죄와 세상의 모든 고뇌를 한몸에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르는 사람.   그가 나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처음에는 그의 거룩함이었다.  그리곤 그의 금욕적이고 순결한 행적,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의 아픔이 나의 것인양, 그의 고뇌가 나의 가슴에 저리도록 아파오는 것은, 그의 고독과 외로움이었다.   나중에 그것은 하나의 연민이 되었고, 언제부턴가 그의 고뇌와 수난을 이해하고 싶은 느낌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군중속의 고독, 그는 늘 많은 이들에게 둘러쌓여 있는듯하다.  그의 12 사도들이 그렇고, 그가 가는데 마다, 구름처럼 그를 따르는 군중들이 있다.  심지어 그를 곤란에 빠뜨리기 원하는,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조차도 그를 혼자 놓아두지는 않았다.  그는 가는곳마다 사람을 일으키고 치유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축복을 받고자 했던가?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과연 그를 이해하고 따랐을까?   나는 많은 의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의 12 사도들은 과연 예수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것일까?

그가 이야기하는 천국을 이해한 사람들은 그당시 몇명이나 될까? 

산언덕에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와 교훈을 얼마나 가슴에 새기었으며, 그가 왜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지 정말 알고 있는 것인가?

그가 왜 십자가를 지어야하는지, 사람들은 아는 것일까?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을 통하여 시간이 있을 때마다 간간히 신약성경을 읽으며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어갔다. 그의 모든 행적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경이롭기조차 했다.  

우연하게도 칼릴 지브란이며, 사반의 십자가, 싣다르타, 천로역정등을 읽게되고, 갈매기의 꿈이나 나자리노, 등과 같은 영화와 음악을 보고들으며, 나는 무엇엔가 점점 빠져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소설 사람의 아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죄와벌이나 이방인과 같은 글을 대한 것도 비슷한 시기였던것 같다.  고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많은 종교영화들도 빼놓지 않고 보았다.  십계, 왕중왕, 벤허, 예수의 생애...등등. 

Rock Opera, Jesus Christ Superstar에 빠져서, 듣고 또 듣고 전곡을 달달 외우다시피한 것도 그때였다.  이화여대에서 안무한 버젼을 현장에서 구경하던 것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예수를 가까이하고, 그에 대한 더 많을 것을 가까이 하면서,  그의 아픔과 고독과 절망을 알것만 같았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때론 곁에 있는 듯했다.  그것은 연민이나 이해 이상의 감정이었지.  

학창시절을 통하여, 떠오르는 많은 기억들 속에서,  순간순간 예수의모습과 그의 진리말들을 떠오르던 무수한 순간들이 스쳐간다.

 


 

 

교회를 다닌다고 다 진정한 신앙은 아닐것이다.  세례를 받고 여러가지 제자훈련을 받으며,  기독교와 예수에 대한 지속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약간의 소위 신학적인 의미를 배우는 가운데, 예수와 그가 차지하는 비중과 기독교(특히 개신교)의 관계를 나름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예수는 틀림없이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갖은 존재이다. 

그의 행적과 십자가의 사건은 기독교의 본질적 특성을 형성하고, 교리를 구성한다.  신구약의 비교적인 측면에서, 예수의 탄생,행적,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은, 유대인 고유의 민족적 신화(구약)를, 인간역사상 가장 많은 이야기와 시간적 공간적 영향력을 갖는 종교로 발전시키 놓았다. 

또한 그를 추종한 사도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등은, 예수가 생전에 힘써 가르친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고, 목숨바쳐가면서 전파하였다.  바울과 사도들의 노력으로 기독교는 율법주의적 전통에서 탈피하고 깨달음의 믿음, 변혁하는 종교로 발전이되엇다.  놀라운 것은 예수의 사랑과 진리의 말씀이, 이방인들에게 조차도 생명과 구원의 복음 된 것이다. 

 

 

 
 

돌이켜보니 나의 예수에 대한 사랑은 지극히 그의 인간적인 면에 치중되어 있었던것 같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  나와 똒같은 피와 살을 갖은 사람,  33년 생애를 사람들 가운데서 거했던 성인.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죽음조차도 불사하고, 주어진 길을 가는 아들의 모습.  낮은 데로 거하며 작은자, 병든자, 가난한자를 가까이 하기를 주저하지않으신분. 

한편으로 원수를 용서하라시며, 이웃사랑을 외치시며,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본이되신 예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모든 사람을 다시금 인도해준 은혜의 주체.  

아담이래로 인간이 지어야했던 원죄의 굴레로 부터 자유하게 해준 축복의 통로.  

무상으로 내게도 주신 영생의 소망을 간직하며 오늘도 살아간다 .



 

 
 
내가 보는 기독교의 의미와 정체성의 한가운데 우뚝 선 예수. 
Christianity 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계승, 심지어는 계시적 종말에 이르는 믿음의 역사를 모두 담고 있는 것이 신약성서이다.   그 신약성서의 줄거리와, 전파되는 진리의 말씀, 그리고 예수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과, 부활의 영광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컴플렉스를 따라가고 있다.  적어도 내가 보는 신약성경의 플롯은 끈임없는 투쟁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그것은 아름답고 평온한 진리의 말 가운데서도 면면히 고개를 쳐들고 있다.  기적과 치유, 그리고 용서의 에피소드 속에도 살아있다.   예수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도 집요하게, 인간인 나의 의식의 속에서 붙들고 늘어지고 있다.  


 

 

 

내가 아는 기독교는 유혹의 종교이다. 

아니 유혹의 달콤함과 고뇌를 이기어 딛고 서는 종교이다.

피와 살을 갖은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탓일수도 있겠다.  예수의 공생활 3년은 끊임없는 유혹의 이야기이다.  광야에서부터 십자가 위에까지, 유혹은 차라리 갈수록 거대하게 진행되고 있다.

유혹은 다분히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건드리는 자극적인 표현이다.  인성과 신성을 모두갖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유혹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있었을까?   때로 유혹은 다분히 아름답고, 인간적이며, 공감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예수가 물리쳐야할 유혹은 3가지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세번에 걸쳐서 반복되고 있다.

 


 
 
 
1. 첫번째 유혹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으로 부터 3가지 유혹을 받으시다.
 

 

I. 사탄의 첫번째 유혹 (마 4:3-4)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밤낮으로 금식한 후 주릴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을 떵덩이가 되게 하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로 살 것이다"

 

 


II. 사탄의 두번채 유혹 (마 4:4-7)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저가 사자들을 명하시어 저희가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라 "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III. 사탄의 세번째 유혹 (마 4:8-10) 

 

마귀가 지극히 높은 산으로 그를 데려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화를 보이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하였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사탄의 첫번 째 유혹은 가희 말초적이다.  극도로 주린 사람에게 던져진 음식의 유혹은, 가장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필요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애초에 헛물을 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비록 인간의 모습으로 왔지만, 예정된 이 세상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사람으로서, 한 순간의 지나갈 일에 연연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또한 필요한 떡뿐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 원하면 스스로 충족하여 취할 것인데, 구지 사단의 종용을 받을 일이 무엇이겠는가? 

 

두번째 사단의 유혹에서,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분명히 표출하고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아울러 시험하는 행위의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고있다.   애초에 사단의 질문 속에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는 뉴앙스롤 담고있다.

 

사단의 세번째 유혹에서, 사단은 이미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처하여 desperate 한 자신의 입장을 들어내고 있다.

마치 "이 모든 것"은 사단 자신에게도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단지 예수의 길을 방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는 사단을 물리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사단이 해야할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종용하고, 나아가서는 모든 존재가 하나님에 대해 경배해야함을 단호히 말하고 있다. 

 

 



 




 

2. 두번째 유혹

 

인간적인 삶에의 유혹을 받으시다

 

 

나는 믿는다.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온것은, 다시금 사람과 가까와 지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창조하신 인간의 지위를, 그 옛날 아담의 시대로 복귀시켜 놓으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일 것이다.  창조이후에 지은 인간의 모든 죄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끈임없이 저버린, 인간의 무심함에 대한 하나님의 간곡한 바람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세상에서 해야할 일은 분명하고 논리적이어야 한다.

1. 먼저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세상에서 삶을 영위한다.

2. 빵만으로만 살지 않는, 인식의 주체인 인간에게, 형이상적 셰계에 대한 눈을 뛰운다.

3.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그와의 관계성을 인식시킨다.

4. 죄에 대한 인식과 회개를 깨우친다.

5. 사랑을 가르치고 행하게 한다.

6. 하나님과 화합하며, 하나님 자녀로서의 지위를 회복한다.

7. 하나님 나라를 알리며, 도래할 왕국을 선포한다.

8. 사람에게 영생의 소망을 심어준다,

 

이는 하나의 사건을 요구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선 하나의 요식절차가 필요하다.  왜냐면 요식절차는 인간들이 좋아하는 의식행위이기 때문이다.  구약적 표현을 빌리자면 큰제사를 치르는 것이다.  가장 성대하고 의미있는, 또한 확실한 효과를 거둘 단 하나의 제전을 치러야하는 것이다.  제사에는 두말할 나위없이 제물이 필요하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건인 것이다.

예수께서 인류역사상 치러야할 가장 의미있는, 마지막 제사의 희생물이되어 스스로 십자가에 오르는 사건.

그것은 인간사에 영원히, 가장 크고 긴 반향을 이르키는 하나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성서의 주인공인 예수

그가 이세상에서 남긴 의미 중에서, 가장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사랑]이다.   그가 들려준 수많은 진리의 말 중에 가장 많은 의미가 된 것이 이 두글자이다. 

산위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준 사랑의 이야기,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약시대의 새계명,

간음하다 끌려나온 여인을, 돌로침으로부터 구원한 사랑으로 이야기,

질병과 지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어 구원한 예수,

제자를 사랑하여 손수 그들의 발을 씻어준 사랑의 스승,

약한자와 작은자를 감싸주는 사랑의 수호자,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에게 더 큰 축복을 주는 참 메시아,

신약성서 전편을 가득메운 예수의 사랑의 언어와 메세지는 끝이없다.

 

예수는 공생애 3년이란 세월동안 12명의 사도들을 거두었고,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함께자고 함께 온 이스라엘을 여행했다.  고기잡이를 하며 혹은 세상의 평범한 일을 하며 살던 그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팽개치고 그를 따라나섰다.

그들이 팽개친 것은, 어부라고하는 그들의 직업만이 아니다.  그들의 가정,  그들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모두 뒤로하였을 것이다.   그때까지 그들에게 의미가 되었던, 세상의 모든 것을 내던져야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온 땅을 돌며 여행한, 예수의 행적으로 보아, 그의 제자들은자신의 세상적 삶의 여건들을 포기해야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전 생애를 그들 스승에게 맞겼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스승의 사랑의 메세지를 흠모한 사도들은, 나중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후에도, 예수의 사랑의 복음을 전하기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오직하나 예수의 이야기만을 전하기 위해, (한 사람을 제외한)모두가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다.    

 

 

 

그들이 발견한 스승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산상에서 들려준 그의 진리의 말씀들이엇을까?  병자를 고친 이야기일까?

폭풍을 잠재운 때문일까? 물위를 걸을 수있는 초자연적인 힘때문일까?  5병2어의 기적인가?  죽은자를 살린 탓일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자니..."구름 속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엇기 때문일까?  그때도 예수는 그들에게 다가가 "일어나라 두려워말라" 하고, 이어서 "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하였다. 

그들의 입장에 내가 선다면 나는 어떨까?  

나는 선한 이야기를 하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존재를 어떻게 대할까?  폭풍에 소리치며, 수면위를 걷는 자를 어찌할까?  무한한 경외감이 있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약간의 두려움과 더불어.   선한 이야기,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 존경심을 갖을 수도 있겟지. 

그러나 그를 사랑하며 무조건 따를 수있을까?  모든 것을 포기해가며...?

예수의 제자들이 그를 무조건 따를 수있었던 배경에는 무엇이 숨어있었을가?

아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인지와 그들의 정서가 허용하는 인격적 대상으로서, 그들의 스승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듣기만 하는 사랑의 이야기를 넘어서, 그들은 분명히 보았다, 가난한자에게 더하는 예수의 축복을. 병든자 죽어가는자에게 사랑의 긍휼을 실천하는 스승의 모습을.  그의 성결함을.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스승의 모습을.

사도들은 분명히 보았으리라.  그들의 스승이 그들을 율법의 굴레로 부터 자유롭게 하심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소외된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실천하는, 예수의 큰사랑의 범주를 그들은 느꼈으리라. 

죽음앞에서서, 돌로 침을 받을 간음한 여인을, 긍휼히 여겨 사랑으로 구원하는 것을 그들은 보았다.

 

영화 [Passion]의 한장면

 

 

반대의 입장이 되어보자.

3년이란 세월을 함께하며, 예수와 그 제자들에게 일어난 세상적 일들은 얼마나 많을까?

예수가 보는 사도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예수의 눈에 사도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제자들이 무조건 고마왔을까?  그들이 자신이 설파하는 모든 진리의 말들을 무조건 들어주어설까?  나중에 사도들이 그와 그의 말씀을 위해, 목숨까지 모두 버려줄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런 것만이 아닐 것이다.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려고 수선떠는 모습을 보고, 그들에 대한 사랑에 빠졋을 지도 모른다.  차라리 제자들은 그의 말을 듣기는 듣데,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도 왕왕이 있었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로, 한결같이 평범한 소시민적 사람들을 선택한 것은, 자신이 선택한 사랑의 대상이 평범하고 가난하고 작은 자들이엇기 때문이다.  자신이 외치는 진리의 말들이, 삶속에서 실천할 대상으로서, 제자들이 예수의 마음을 샀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예수는 그들의 고기잡이 이야기며, 그들의 가정의 이야기,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의 삶의 이모저모 이야기를 접하며, 그들에 대한 사랑과 공감을 더 키워나갔다고 보아야한다. 

그는 제자들의 인간적 삶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앗을 것이다.  심지어 삶속에 전전긍긍하는 그들의 모습을 사랑했다고 보아야한다.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구할 수있는가?  그것은 언어도단이다.

어쩌면, 애초에 구원을 목적으로 이세상에 오실 때부텨, 그들의 삶의 애환과 질곡을 이해하고자 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예수는 낮은 곳으로 임하였고, 그곳에서 구원의 확신, 아니 피구원자에 대한 대상으로서의 확신을 얻었을 것이다.  

어차피 세상의 왕들과 부자와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유대인)들을 위해서만, 이땅에 오신 예수가 아니다.

범인류를 대상으로 펼칠 예수의 사랑과 구원의 드라마는, 그의 제자들처럼,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려가는 것이다. 

 
 
다빈치의 원본벽화의 이미지
 
 
예수의 공생애의 최대 페러다임은 사랑을 통한[인간의 구원]이다.
이제 남은 것은, 피구원자를 상승시키는 일이다.  그들에게 사랑의 의미를 일깨우고, 죄의인식을 고취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기 시키며, 소망의 기쁨을 전달하는 일이 남은 것이다.
대상은 12 제자들과 그들이 몸담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다. 
 
상상을 해보자.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33년 몸담고 살아온 세상이다.  3년을 함께하며 사랑했던 제자들이다. 3년을 한 솥밥을 먹으며, 함꼐 고생과 즐거움을 나누던 사람들을 뒤로하는 선택이 쉬운것일까?   몸소 사랑했던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이들을 떠나야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  방법은 무엇이 되어야는가?
그들에게 다가올 운명(?, 예정된 사건)을 알려야하는 것인가?  어떻게 그럴 수있을까? 
나는 왜 저들과 어우러저, 끝까지 살아갈 수없는가?
 
그러나 예수는 해야할 일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예수는 그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상기하엿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하심을 되새겨야 했을 것이다.
어떻게 죽는 것이 사는 길이며, 한 사람의 죽음이 모두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음을 보일 것인가? 
부활의 뒤에는 영생의 소망이 뒤따름을 어떻게 게시할 것인가?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예수의 왼쪽에 앉은 사람.

많은 사람들이 여자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사람의 아들, 예수에게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는 어떤 존재엿을까?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는 참으로 비중있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여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세상적으로 많은 소위 논란이 있는 (controversial) 면 이외에도, 성서적으도 많은 부분이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성경은 그녀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Davinci Code의 옹호자나 Piory of Sion의 신봉자는 아니다.  다만 facts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으로서 막달라 마리아(MM, 마릴린 몬로가 아니다)와 예수와의 깊은 관계를 모르는 척할 수없다. 

예수께서 간음하여 끌려나온 여인을 돌로치는 위기에서 부터 구해낸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혹자는 그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로 보기도 한다.   복음서를 보면, 그녀가 여러군데 등장하는데,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있다.

 

 

1) 예수의 사도로서의 막달라 마리아 (Luke 8:1-3):

    MM은예수께서 7귀신이 들린 여인을 치유한 것으로 되어있고, 그녀는 요안나와 수산나와 더불어 예수의 무리에게

   재정적 후원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2) 십자가 처형 장소에 있던 MM  (Mark 15:40-41, Luke 23:49, Matthew 27:55-56, John 19:25)

   4대 복음에 모두 나타나는 MM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한결같이 목격하고 있다.  때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때로

   십자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3) 예수의 시체의 매장 준비를 한 MM (Luke 23:55-56, Matthew 27:61)

    아리마데아 요셉의 장지에서 시체의 싸임을 목격한 MM.  가까운 거리에서 참으로 죽은 예수의 몸을 볼 수있었다.

    또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염하는데 필요한 향료를 준비한 것으로 되어있다.

 

4)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MM (Mark 16:1-11, Luke 24:1-11, Matthew 28:1-10, John 20:1-18)

    4대복음이 모두 언급하고 있다.  예수의 몸이 무덤에 있지않은 것을 발견했다.  천사로부터 처음으로 승천할

    예수를 볼  것이라는 메세지를 받는다.  예수부활의 첫 목격자이다.

 

 

첫번째 MM에 관하여 구분하여야할 것은, 3년의 떠도는 세월 동안,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사도들이 예수를 동반한 것으로 본다.  한구릅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남자의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MM을 중심으로 하는 여서의 그룹.  그당시 여자와 남자들이 함께 여행하는 것을 당연히 보는 견해이다.  다만 두 그룹이 나뉘어져서 간다는 것이다.  다른 견해는,

그당시  여자가 남자와 함께 여행하는 경우는 있을수없는 것으로 보는 견해다.  다만 그 여자가 연인이나 배우자, 딸, 혹은 하인 (servant)일 경우가 아니라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재력적인 능력을 겸비한 비지니스 워먼이라면, 하인의 지위를 갖을리는 없다.  질병을 치유해준 은인에 대한 무조건 적인 지원과 헌신이었을가? 

혹자(예, Priory of Sion)들이 주장하는데로, MM은 예수에게 특별한 관계를 갖은 이성의 여인일까?

분명한 것은, 그녀는 예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기에 전념하고, 그를 지극히 가까히 수발하며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네번째 MM관하여 내게 더욱 놀라운 것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MM은 무덤에 가서 돌이 옴겨간 것을 보았다.  그녀는시몬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 (요한)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린다.  두 사도들은 무덤으로 들어가 예수의 시체가 없어졋음을 본다.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두 제자가 자기집으로 돌아간 뒤, MM은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다.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 두 천사가 시체 뉘었던 곳에.. ~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
..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굴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예수께서 '마리아야'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turned toward him) 히브리말(Aramaic)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부활하여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신 예수

 

예수는 왜 먼저 무덤으로 들어간, 베드로와 요한에게 나타나지 않았을까?  왜 그들에게 몸을 보이지 않았을까?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셔야했을까?   십자가의 죽음을 목격하고, 시체의 처리를 본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내게는 풀리지 않는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카톨릭에서는 Bethany 의 마리아와 동일한 인물로 다룬다.  성경에는 6명의 마리아가 나오는데,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같다.

 

1)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 (Mary the mother of Jesus)

2) 마리아, 마사와 라자로의 누이, Mary of Bethany 

3) 막달라 마리아, Mary  Magdalene, "Mary so-called Magdalene"(Luke 8:2), 막달라는 나자렛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고, 예수는 생애에 여러번 이곳을 오가며 그녀의 병을 치유했을 것으로 본다.

4) 마리아, "The other Mary" (마태 27:61), the wife of Clopas, and the mother of James the Less and Joses (마태 27:56)

5) 마리아, the mother of John Mark and the aunt of Barnabas (행 12:12)

6) 마리아, Mary fo Rome, Paul sent greetings to her at Romans 16:6

 

막달라 마리아가 혹자들의 주장데로, 예수의 연인이었다한들 내게는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그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다고 해도, 나의 예수에 대한 사랑과, 나의 믿음에 대해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신앙과 믿음의 세계에 견실한 사실이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r Kazantzakis)는, [문제의] 그의 저서 "최후의 유혹"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 1960) 에서, 예수를 보통사람들과 똑같이 유혹받는 인간으로 그리고 있다.  아니 신성을 갖고 있으되, 유혹에 빠지는 인성을 갖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혼란과 의혹, 불확실성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이 Messiah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전혀 모르는 상태가 된다.  그는 사람을 모으고, 새로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무미건조한 연설을하고, 믿음의 사람들을 어찌 인도해야할 지 몰라 주저앉는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미온적이거나 모르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는 광야에서 돌아와 분기탱천하여 칼를 들고, 예루살렘을 로마로부터 찾으려고 애쓴다.  당연 그의 가장 충직한 사도는 혈맹당원인 가롯유다일 수밖에 없다. 
이작품이 교계에 어마어마한 반감을 산것은 말할 것도 없다.  28년의 세월이 지난후(1988), 마틴 스콜세시 감독이 이를 똑같은 제목으로 영화화할 때, 전세계적인 무리를 일으켯다.
 
카잔차키스의 소설,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를 구현한 영화
예수는 십자가에 올라 손과발에 못이 박힐 떄, 군종속에서 어린아이의 모양을 한 천사를 보게되는데, 천사는 그가 십자가에서 걸어내려올 수있음을 말한다.  천사는 그가 예수가 그 할일을 다했고, 하나님은 단지 그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두시간에 걸친 여러가지에 유도된 후에, 관객은 드디어 최후의 휴혹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이다. 
욕심이나 죄가 아닌유혹, 행복으로의 유혹으로.
예수는 십자가를 내려와, 천사가 주선하는데로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고, 갑자기 그녀를 하나님이 데려가자, Mary of Bethany, (Sister of Lazarus) 그리고 그녀의 자매 Martha와 결혼한다.  그는 아이를 낳고, 아내들을 갖고, 행복하고 좋은 삶을 산다. 
한편 예수는 바울을 우연히 만나, 그로부터 죽음을 초월하는 Jesus Christ의 이야기를 듣는다.  바울은 살아있는 육체의 존재 예수가 누구이던 간에, 부활하는 예수의 신화가 얼마나 중요하며 사람들에게 필요한 소망을 주는가 역설한다.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불타고 성전은 잿더미가 되엇을 떄, 늙어버린 인간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성난 유다가 찾아와서,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그를 따라야햇던 그들의 생애를 이야기 한다.  그가 십자가를 버린 것을 상기시키며. 
이에 예수는십자가에서 발견한 천사와 천사가 그에게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고 한 것을 상기 시킨다.  그러자 유다는 그것이 모두 사탄의 장난임을 지적한다.  순간 영화는 그가 십자가를 떠나던 순간부터 모든 것들이 환상인 것임을 암시한다. 
 
충격에 휩싸인 예수는 불타는 예루살렘 시가지를 지나, 골고다에 있는 십자가로 가, 하나님께 자신이 메시야가 되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죽기를 간청한다.  
한 순간에 그는 그 많은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 로마병과 야유하는 군중들 사이에 서있게 된다.
그는 두팔벌려 자신의 삶의 목적을 받아들이며, 그것으로부터 도망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십자가로 돌아간다.
그의 행복한 날들은 꿈이었을까?  아니면 예수는 정말고 그 유혹에 함몰하였을까?  어쩌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지 모른다. 
결국 그는 "이제 다 이루엇도다" (It's accomplished), 해야할 그 마지막 말을 하고, 세상은 천둥과 번개를 치고,음울한 오색의 빛이 난무하는 가운데 영화는 끝을 맺는다. 

 

 

Rock Opera, Jesus Christ Superstar의 CD 디자인

 

공전의 히트로 브로드웨이의 여러가지 기록을 깨뜨린, Jesus Christ Superstart 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유명한 아리아 (?) I Don't Know How to Love가 3번에 걸쳐 불러진다 (2번은 MM에 의하여, 1번은 유다에 의하여).  두번째의 MM의 유혹이 있던 밤, 그날밤은 그녀가 예수에게 비싼 몰약과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기운 밤이다.  예수는 마침내 함몰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And I think I'm going to sleep well tonight.  I'll let the world turn without me tonight"

이장면에서 내게 보이는 세상적 유혹은 두가지다.  하나는 아름다운 막달라마리아가,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예수에게 다가서는 면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는 여행, 수많은 군중들에게 받는 시달림, 제자들의 아둔함, 그리고 계속되는 치유와 기사의 사역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와 군중 속에서 느끼는 예수의 절대 고독감이다.

 

 

 

3. 세번째 유혹

 

십자가 위에서 신성을 보이시지 않다


 

 

 

십자가에 오른 예수에게는 말 그대로 [최후의 유혹들]이 숱하게 따른다.

 

1)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 27:40)

 

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도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2)

 

3)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고"

 

4)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누 23:35-37)

 

이때 예수의 심정은 어떻하였을까?

Why have you forsaken me?  참으로 비통한 말이 아닐 수없다.   육체적 고통이 극에 달한 순간이리라.  차라리 고통이란 표현으로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유혹에 함몰하지 않았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서 처럼, 십자가를 버리고 내려오지 않으셨다.

어느 누구의 조소와 비아냥 거림도 더 이상 문제가 될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이미 모든 것을 감내하시며,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면 애초에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체포의 사건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게세마네의 기도

 

 

정말로 예수에게 고통의 시간, 유혹의 시간은 따로 있었다고 보아야한다.

예수께서 게세마네 언덕에서, 혼자 기도하실 때의 일이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 22:42)

소름이 끼친다.  무서울 정도로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셨다.

피와 살을 갖은 인간이, 감내할 수없는 육체의 고통을 받는 가운데, 극도의 정신적 허탈감에 빠진다면, 그것이야말로 견디기 어려운 최대의 고통일 것이다. 

초인간적인 능력의 소유자만이, 그것을 이겨낼 수있을 것을 확신한다.  

 

사람의 아들, 예수의 자기와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체포되시기 전에, 홀로 외로이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하실 때에...

 

 

예수께서 만민을 위한, 구원의 산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치르셔야했던 유혹과의 싸움은, 신약성서 전편을 아우르는 거대한 드라마이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예수께서는, 33년 긴세월의 여정속에서, 인간의 길을 몸소 실천하시며, 사람과 사람의 세상을 그 한몸으로 품으시며 사랑을 키워 나가셨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잊지 않고, 아버지의 피조물인 사람들을, 아버지의 사랑안으로 데려가기위해, 피 한방울 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 다 쏟으셨다.
죽는 길이 사는 길이며, 죽음 뒤에 부활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신 것이다. 
 
40 대 중반에,
비로소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보통의 한 인간은,
오늘도 자신에게 되쳐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어진
생명의 (mortal) 사람
 

나는 어디에서 왓는가? 

태초부터 하나님의 뜻하심으로

세상에 있게되었다.

 

나는 왜 사는가? 

사랑의 하나님이 뜻하신 바대로,

배운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쓰임받기를 원하는 가운데

...

 

나는 왜 고뇌를 갖고 사는가? 

?..욕심,...욕망... 유혹의 재물..? ...? 

 

나는 어디로 가는가? 

아버지 하나님, 사랑의 예수에게로

 

 

그대는 왜 고뇌하는가?

 

 



 

* 그림은 인터넷에서, 일부 텍스트 자료는 성경과 인터넷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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