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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에서
01/09/2018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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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를 끼고 흐르는 계곡의 물이 참 맑았다. 마음을 닦는 도량을 끼고 흘러서 이리 맑은 것인가,

아니면 계룡산 깊은 계곡의 맑은 바람에 씻겨서 그럴까. 그 맑은 물의 유혹에, 발을 담근 채 쉼 없이 몰려다니는

조그마한 물고기들을 바라본다. 물이 아주 차지는 않지만, 한여름 더위를 식히는 데는 이만한 피서법도 없다.

한동안 물고기들이 노는 것에 빠져있는데, 비구니 한 명이 내가 발을 담그고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런데 가까이 와서는 가만히 서서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갸름하고 작은 얼굴을 가진 비구니는

한 사십 여세쯤 되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해우소가 어디 있을까 생각하던 중이라

“이곳에 걱정 근심을 덜어 주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그 비구니는 창졸간 내 질문을 이해 못 하였는지 망연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기를 잠시, 곧 빙그레 웃으며 산 쪽을 가리켰다. 한 오십 미터쯤 올라가면 있을 거라는 대답을 하면서

길을 좀 비켜 달라고 했다. 마침 내가 발을 담그고 있던 곳이 커다란 돌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어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길목이었다. 길을 비키는 대신 조금 더 가까운 곳에는 없느냐고 되물었다.

“오십여 미터 정도 올라가서 근심을 덜어 놓을 수 있다면, 그리 먼 길도 아니지요.”

대답하며 내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무언중 빨리 길을 내달라는 몸짓이리라.

 

하긴 그렇다, 그 정도 더 올라가서 근심 걱정을 모두 없앨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해우소를 찾아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5, 6십 미터쯤 올랐음에도 해우소

비슷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이 비구니가 거짓말을 했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산길에 오십여 미터라는 것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이지 정확하게 5, 6십 미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로부터 다시 한 오십여 미터를 더 올라갔다. 그러나 해우소를 나타내는 표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방향을 돌려 내려오는 수밖에.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데 마침 문이 열려있는 조그마한 법당 비슷한 곳이 보였다.

‘혹시 저곳에서 해우소를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건물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더운 관계였는지 문이 열려있는 그곳은 역시 법당이었다. 안쪽에는, 정면으로 부처님 상이 보였고 

오른 쪽 측면에는 도인처럼 보이는 그림이 모셔져 있는데, 그 맞은편으로 호랑이가 앉아 있는 

옆에 산신령처럼 보이는 멋진 할아버지가 서 있는 그림이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절을 하는 비구니.

 

법당 안의 비구니는 더운 날임에도 가사 장삼을 두른 채 절을 하고 있었다, 중앙의 부처님을 시작으로 오른 쪽

그리고 방을 가로질러 왼쪽 신령 그림을 향해 한 번씩. ‘절을 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깨닫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속으로 뇌이면서 자리를 옮기려던 나는 그 자리에 다시 멈춰 섰다. 얼핏 보인 비구니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깨달음의 한 방편일까, 아니면 수행의 한 과정일까.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절하는 비구니의 모습이 ‘위대한 침묵’이란 영화에 등장하는

검은 피부의 수도사와 겹쳐서 보인다. 소유하는 것에 대한 모든 욕망을 끊고 묵언으로 신께 귀의하고자 하는 삶,

한 덩이의 빵을 들고 깊이 머리 숙여 기도하던 모습, 왜 하필 그 수도자가 새삼 떠오르는 것일까.

수도사 하면 으레 백인들의 얼굴만 보아서일까.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절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비구니의 절하는 모습을 

조금 더 자세히 바라봤다. 약간 상기된 듯 보이는 얼굴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비구니는 절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할까? 무엇을 바라서 저리 절을 올리는 것일까? 아니면, 바라는 것을 없애기 위해 절을 하는 것일까? 

대답도 들을 수 없는 물음이 시나브로 떠오른다.

 

비구니의 진지하고도 무거운 구도의 모습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늘 생각해오던 ‘인간은 시간이란 강 속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본다.

 

유유히 흐르는 강, 그 강 속에는 많은 생물이 무엇인가를 붙들고 삶을 영위하고 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 생물들은 자기네들이 무엇인가를 붙들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모두 자기가 붙들고 있는 것이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자기를 

유지 하게 하는지를 연구하며 산다.어떤 생물은 조그마한 자갈을 붙들고 있다. 다른 생물은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이상한 구조물에 목을 매고 있다. 또 다른 생물은 끊임없이 물결에 흔들리는 

수초를 붙들고 있다. 

물결이 조금 거칠어지면 수초를 붙든 생물은 춤추듯 흔들리며 간신히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고정된 구조물을 붙들고 있는 생물은 흔들리며 사는 삶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뭇 생물들이 ‘산다는 것은 열심히 붙들고 있는 것’이란 생각 속에 빠져 있을 때,

한 생물은 그 붙들고 있어야만 한다는 삶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왜, 우리의 삶은 붙들고 있어야만 하는가?’ 어느 날 그 생물은 자기가 붙들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때까지 붙들고 있던 바위를 놓아버린다. 처음에는 

습관화되어 있던 경직으로 이곳저곳 부딪히고, 또 거기서 생기는 약간의 두려움에 긴장하지만, 

곧 물결을 따라 여기저기 떠다니며,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다. 바닥에 붙어사는 뭇 생물들은 

이 생물을 보고 깨달은 자라고 하였다.

(리처드 바크 ‘환상’ 중에서.)

 

시간의 강 속에서 우리는 실로 많은 것들을 붙들고 있다. 이 붙들고 있는 것을 놓으면 존재 자체가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욱 집착을 하게 한다. 저 비구니는 무슨 인연으로 이생에 여성으로 태어나고,

이제는 비구니가 되어 절을 올리고 있는가. 승복을 입고, 모든 것을 놓아 버린 시간 속에서 자유로워진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붙들고 있는 그 질긴 집착을 끊기 위해 절 공양을 하는 것일까.

 

나는 비구니가 조금 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여러 질문 중 한 가지라도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어서이다.

한데 비구니의 절 공양은 짧은 시간 안에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찌 된 게 시간이 지날수록 

깊이를 더해 가는 듯, 진지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실없는 생각을 접은 채 발걸음을 돌린다. 

내게 와 있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부름이 다급해져 있기 때문이다. 산문 밖을 나서니, 

마침 산 위에 서늘한 바람이 반가운 향기를 싣고 왔다. 순간 예전에 무심히 들어 넘겼던 선문답이 

천둥처럼 머릿속을 울린다.

"스님, 무엇이 깨달음인가요?"

"밥 먹고, 똥 싸는 거지!"

수필, 동학사, 절, 수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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