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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부부의 늦깎이 사랑
10/15/2018 09:25
조회  1104   |  추천   15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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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약이고하늘 아래 사람이 겪어내지 못 할 일은 없다던가요?

불과 석 달 전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던 걸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글을 쓰고 있는 제 모습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아직 폭염이 시작되기 전저희 친정 엄마는 청천벽력과 같은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누구라도 충격을 받을 일이겠지만그때 저희 가족들이 받은 충격은 몇 배로 컸습니다.

왜냐하면엄마는 그 누구보다도 건전한 생활습관으로자신을 관리해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술 담배는 물론몸에 해로운 어떤 것도 멀리해왔습니다.

직접 재배하고 요리한 건강식으로 본인은 물론 주위 사람들까지 챙겨주는 사람이지요.

체중이나 혈압 등 건강지표들이 너무 좋았고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암이라니...!

 

엄마 본인도 억울해했습니다.

두렵다는 감정보다 먼저 엄마를 덮친 것이, “왜 내가?”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까지 내려버리더군요.

원인은 스트레스평생 속 썩인 남편 때문에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이라고요.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엄마는 아버지에게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암에 걸렸다고요.

 

그런 말 듣고 수긍할 배우자가 있을까요?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 안 하시더군요.

환자가 하는 말이니 그냥 들어주는 게 맞다고 생각하셨을 테고,

또한 지난 세월을 돌아봤을 때 마음에 걸리는 부분도 영 없지는 않으셨던 겁니다.

 

저는 스트레스가 뭉쳐서 암 덩어리가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하는 말에 일리는 있다고 생각해요.

엄마는 나무랄 데 없는 아내에살림꾼이었던 데 비해 

아버지는 자의반 타의반 사고를 여러 번 내신 분이거든요.

그다지 자상한 남편도 아니셨고요.

저희들에게는 좋은 아버지셨지만엄마에게는 좋은 배우자가 아니셨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편이 저지른 사건들을 수습하며자식들 문제를 혼자 고민해온 삶이

엄마의 건강을 해쳤을 거라는 말에는식구들 중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겁니다.

오죽하면 엄마는 입버릇처럼 그런 말을 했었죠.

네 아버지 병들면 나한테 맡길 생각 마라!

평생 속 썩고마지막에 그것까지 하면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하다.

 

그러면 저는 얼른 엄마 말에 동의하는 척 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엄마도 알고 저도 알았습니다.

아버지한테 무슨 일 생기면 제일 가슴아파하며 달려들 사람이 엄마라는 것을요.

그게 우리 엄마의 성격이니까요.

그런데 우리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엄마가 먼저 큰 병을 앓게 되었으니

세상일이란 참 하루 앞도 모르는 것이랄 밖에요.

 

항암 치료를 시작하고 얼마 후저는 엄마와 미용실에 갔습니다.

일반 미용실이 아니라대학병원에 있는 환자 전용 미용실이었죠.

뭉텅뭉텅 빠지는 머리카락이 너무 두려워 아예 머리를 밀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 모녀는 씩씩하게 미용실로 밀고 들어갔습니다.

말 안 해도 사정을 아는 원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었고우리는 껄껄 웃으며 머리를 밀었죠.

 

드디어 머리손질이 끝나고 엄마는 거울을 보았습니다.

거울 속에 저도 얼굴을 넣고 같이 봤는데,

제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엄마 모습에 가느다랗게 안도의 숨이 토해지더군요.

그런데 엄마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어매완전 남자네!” 그리고는 들릴 듯 말 듯 말합니다.

니 아빠가 보면 천리만리 도망가겄다!”

 

저는 그 순간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육십 대 후반에생사의 갈림길에 선 상황인데도삭발한 모습으로 남편 앞에 설 일이 제일 걱정이라니...

엄마의 기분을 바꾸기 위해,

그 자리에서 예쁜 모자를 사서 엄마한테 씌워주며 여류 예술가 같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원장님이 거드시더군요.

아들 있으면 이럴 때 좋더라구요속만 썩이던 아들이 같이 머리를 밀어버리는 거예요.

손님은 아들 없으세요?”

그때 저는 난생처음 제가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게 한스러웠습니다.

남자였다면미련 없이 머리를 밀었을 텐데...

그래도 말은 했죠.  엄마나도 이참에 밀어버릴까?

 

그러자 엄마가 펄쩍 뜁니다.

아이구그런 말마라너 말고 니 아빠한테 밀라고 할 테니까.

당신도 듬성듬성한 그 머리 깔끔허니 밉시다 해야지.

두 노인네가 민머리 하고 마주앉아 있으면 거 참 볼만 하겠네.”

 

그 날 저는 엄마의 모자 쓴 모습을 찍어 동생들과 아버지에게 전송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한테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엄마 모습 보고 절대로 놀라시지 말라고요.

저희 아버지가 워낙 센스가 없으셔서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었거든요.

그렇게 아버지 안 계신 집에 엄마를 모셔다 드리고저는 우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저는 암 선고 다음으로 충격적인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누가 뭐라지도 않았는데아버지가 삭발을 하고 들어오셨다는 겁니다.

엄마와 아버지가 모자 쓰고 나란히 찍은 사진이 제게 날아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왈칵 울음이 터지더군요.

울기 시작하면 무너질 것 같아 애써 참아온 눈물인데,

두 분의 든든한 모습을 보니 더는 참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왜 하필 우리 엄마인가라는 질문에 저는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엄마에게 암이라는 손님이 온 이유는아버지와의 새로운 추억을 위해서였다고 믿기로 했습니다.

 

평생 부엌 근처에도 안 가시던 아버지가 요즘 서툰 솜씨로 밥상을 차리십니다.

여전히 센스는 없지만하루하루 배워나가고 있다고 하십니다.

엄마가 아버지를 수발들기 전에아버지가 먼저 수고하게 만드신 신에게 저는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성을 다하시는 아버지께, 말로는 못 드린 감사를 이 자리에서 드려요.

 

아버지엄마를 잘 부탁드려요.

 

(옮겨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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